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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얼마 전 우리나라에 왔던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었다.
이 작품은 그녀의 데뷔작으로 영연방 작가상과 허스턴 라이트 기념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로도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아메리카나>,<숨통>,<엄마는 페미니스트> 등을 발표, 매번 문단의 격찬을 받으며 세계 독자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주인공은 15살 소녀 캄빌리 아치케. 그녀의 아버지 유진 아치케는 자수성가한 인물로 식음료 공장을 운영하며 <스탠더드>라는 진보 성향의 언론사도 소유한 나이지리아의 상류층이다. 지역 사회에 많은 기부금을 내고 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그를 마을 사람들은 '오멜로라'-고장을 위해 일하는 자-라고 부른다. 오빠인 자자는 학교에서 늘 1등을 하는 모범생이고 엄마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전형적인 나이지리아 여자이다.
멀리서 보면 이들 가족의 모습은 그야말로 부러움 그 자체이다.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은 아버지, 현모양처 엄마, 공부 잘하는 착한 남매로 이루어진 상류가정.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과 억압이 지배하고 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아버지 유진은 가족들에게 엄격한 카톨릭 원칙과 교리를 강요하고 자신의 뜻(=하느님의 뜻)을 거슬렀을 때는 폭력도 서슴치 않는 독재자이다. 학교에서 몇 분 늦게 나온 딸의 뺨을 때리고, 아들 자자가 1등을 못했을 때는 손가락을 부러뜨리며, 자신에게 안 알리고 이교도인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고 캄빌리의 발에 뜨거운 물을 붓는 등 끔찍한 폭력을 일삼는다. 아내에게도 폭력을 휘둘러 유산도 몇 번이나 하게 한다. 또한 자신의 아픈 아버지는 카톨릭을 믿지 않는 이교도라며 만나지도 않고 돈도 조금만 보내드린다.
사실 그가 사회에서 행하는 선행도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이 자신에게 특권을 주셨고 완벽을 기대하시기에 하느님을 실망시키면 안된다는 원칙에 따르는 특권의식에서 오는 행위인 것이다.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하면서 동시에 눈물도 흘리는 아버지 유진 아치케는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사회,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서구 사상을 가진 사람이지만 자신의 가정내에서는 스탈린 못지 않은 독재자이며 광적인 종교인이다. 어떻게 이런 정반대의 성향이 한 인간 안에 공존할 수 있는지, 독자를 매 순간 놀라게 하는 인물로는 단연 으뜸이다.
이런 캄빌리와 자자에게 어느 날 고모 이페오마가 나타난다. 이페오마 고모는 대학 교수로 남편과 사별한 후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는 싱글워킹맘이다. 고모의 부탁으로 캄빌리와 오빠는 고모집에서 사촌들과 지내게 되고 이들 남매에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아버지가 짜준 일과표대로 생활하고 아버지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만 살던 캄빌리는 비록 가난하지만 집안에서 자유롭게 대화하고 생활하는 사촌들을 보며 놀란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있게 말하고 궁금한 것을 마음껏 물어보는 분위기가 어색하지만 싫지는 않은 캄빌리...
고모의 소개로 젊고 매력적인 아마디 신부도 만나 난생 처음으로 묘한 설레임도 느낀다. 또한 자신이 믿는 하느님이 벌주는 두려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하느님이라는 사실 또한 아마디 신부로부터 배우게 되고, 캄빌리는 아주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나이지리아 역사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아 그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나이지리아가 세계 주요 산유국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 이페오마가 석유를 구할 수 없어 절절매며 차를 끌고 다니는 모습은 '나라가 어떻길래 이런 코미디같은 상황이 연출되나, 정말 정치가 보통 썩은게 아니구나' 싶었다. 진보적인 저널리스트를 폭탄으로 살해해 그 시신에 산성액을 뿌리는 사건 을 보며 안팎으로 고통받았을-지금도 그럴 것 같지만-나이지리아 국민들이 안스러웠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도 이페오마의 동료 교수는 학교에서 더 이상 월급도 안나오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나라가 부정부패가 심하고 국민을 억압하니 좋은 인력들이 다 국외로 빠져나가는 나이지리아의 현실이 눈 앞에 그려졌다.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채 살아야했던 캄빌리가 고모네 가족과 함께 지내며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자아에 조금씩 눈을 뜨는 과정이 섬세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진 작품이다.
소설은 한 번도 스스로 앞 날의 일을 결정해보지 못한 캄빌리가 미래의 계획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며 끝난다. 캄빌리가 소리내어 웃는 웃음은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를 얻은데서 오는 것이리라.
처음으로 희망의 씨앗을 가슴에 심은 캄빌리는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자랄 것이다.
아디치에의 다른 작품 중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를 읽어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아프리카 여성 특유의 건강미 넘치는 외모와 화려하면서도 예술적인 의상을 그녀만의 스타일로 소화시키는 아디치에에게 책을 읽기 전부터 반했었다.
나의 눈길을 가장 오래 사로잡았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