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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여 안녕 ㅣ 창비세계문학 46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5년 11월
평점 :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 1904~1986)는 동성애가 형사 고발이던 시절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애써 숨기지 않은 첫 세대 작가로 유명하다. 25세가 되던 1929년 시인이자 연인인 오든(W.H. Auden)과 함께 베를린으로 떠났는데, 당시 베를린은 유럽 그 어떤 도시보다도 자유분방하고 특히 '게이 베를린'이라고 불릴 정도로 동성애에 너그러운 도시였다. 이셔우드 입장에서는 당연히 보수적인 영국보다는 자유롭고 진보적인 도시, 베를린이 끌렸을 것이다.
요전에 읽은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와 마찬가지로 <베를린이여 안녕> 역시 이셔우드가 베를린에서의 체류 경험을 소재로 한 6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중단편집으로 1939년 발표되었다. 또한 1954년에는 두 소설을 합본하여 <베를린 이야기(Berlin Stories)>로 재출간되기도 하였다.
<베를린이여 안녕>에서 화자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인데, '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주변 인물들과 상황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한다. 마치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이.
나는 카메라다. 셔터를 열어놓고, 생각하지 않으며, 수동적으로, 기록만 하는. (p.12)
중단편집인 만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나'가 머물고 있는 슈뢰더 부인 집의 다양한 하숙인들, 배우로서 성공을 꿈꾸고 베를린으로 왔지만 현실은 늙은 유대인에게 몸을 팔아 근근히 생활하는 변덕스럽고 정신산만한 영국 여성 샐리 볼스, 백화점 소유주로 부유하지만 점점 다가오는 위협에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외로운 유대인 란다우어가(家) 사람들, 못 배운 전형적인 노동계급으로 하루하루 삶이 전쟁인 노바크가(家) 사람들, 소매치기로 먹고 사는 하층민들, '나'가 영어를 가르치는 독일 상류층 사람들, 공산주의 이념에 진심인 순진한 소년 등이 그들이다.
'나'는 이런 인물들의 행동을 어떤 해명도 없이 그저 피상적으로 담담하게 그려 자칫 무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주변 인물들이 저지르는 그 어떤 실수나 잘못도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면모도 보여 전체적인 소설의 분위기는 유머러스하면서도 따뜻하다.
위태로운 바이마르 공화국의 끝자락에서 그래도 아등바등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나가려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는 안타까움과 애정이 담겨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어떠한 인간이든지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나'의 모습은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작은 위로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지난 11월 선거에서 그녀가 공산당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면, 그녀는 열렬하게, 완벽하게 선랑한 신념에서, 그것을 부인할 것이다. 그녀는 겨울을 대비해서 털갈이를 하는 짐승처럼, 단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적응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슈뢰더 부인과 같은 수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적응시키고 있다. 결국, 어떤 정부가 권력을 잡든, 그들은 이 도시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이니까. (p.313,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