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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평점 :
고골(1809~1852)의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 뻬쩨르부르그를 배경으로 도시의 화려한 이면에 감춰진 소시민의 비극적 삶을 환상적으로 그린 5편의 단편을 담고있다.
'코', '외투', '광인 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 로 구성된 이 단편집은 고골이 실제로 체험했던 뻬쩨르부르그에서의 비참한 생활이 녹아 있으며, 특히 '광인 일기'는 실제로 미쳐서 죽은 고골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아 섬뜩하다.
도스토예프스키,푸시킨,고골이 살았던 도시 뻬쩨르부르그는 유럽 문명을 흡수하기 위해 표트르 대제의 지시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그러나 고골이 현실과 환상을 교묘히 섞어 보여주는 이 도시의 모습은 인간의 정신과 가치는 찾을 수 없는 '영혼이 부재하는 곳'이며 '악의 공간'(p.316 작품해설)이다.
특히 소시민들의 삶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관료제도는 이 화려한 도시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이다. 고골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을 소개할 때 관등은 꼭 따라온다. '관등의 노예로 전락'한 소시민들의 삶은 비참하다.
고골의 이 단편집은 바로 이런 관료제가 지배하는 도시의 민낯을 보여준다.
'외투'의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관등에 관한 한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관등부터 밝혀야 한다) 그는 만년 9급 관리였다. 아시다시피 밟혀도 끽소리 한 번 못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훌륭한 습성이 있는 온갖 종류의 작가들이 마음껏 놀려대고 마구 비꼬는 바로 그 9급이다. (p.56 '외투')
그는 관청에서 정서 업무를 하는 말단 관리이다. 상관들은 물론 모든 이들이 그를 아무렇게나 대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자신의 정서 업무에는 열정을 가지고 있어 맡은 일은 완벽하게 해낸다. 양심적인 국장이 그의 일처리 능력을 보고 좀 더 중요한 직책을 맡기려고 하지만 그는 "못하겠어요, 차라리 정서하는 일을 맡겨주십시오." (p.60) 라고 말한다.
정서하는 일 외에는 옷차림에도 먹는 것에도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인간, 그는 탐욕스러운 도시가 만들어낸 자의식, 영혼이 없는 인간이다.
'광인 일기'는 정신병에 걸린 9급관리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 9급 관리 뽀쁘리시친은 국장의 딸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낮은 관직으로는 사랑을 얻을 수 없다. 국장의 딸이 자신을 사랑하기는 커녕 비웃고 시종무관과 결혼하게 되자 미쳐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는 인물이다. 다음 일기는 그가 9급 관리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얼마나 비관적으로 집착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나는 9급 관리다. 왜 9급 관리가 되었을까? 어쩌면 나는 백작이나 장군인데, 다만 9급 관리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아마 나 자신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있을 거다. (...) 어떤 평민이나 농부가 어쩌다가 그 신분이 드러나 갑자기 어떤 귀족이나 황제라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농부까지도 종종 그럴 수 있는데, 귀족인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p.121 '광인 일기')
마지막 작품 '네프스끼 거리'는 이 단편집의 주제와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뻬쩨르부르그에서 가장 번화하고 화려한 거리 네프스끼는 '수도의 미인'으로 뻬쩨르부르그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소설은 이 네프스끼 거리를 찬양하면서 시작한다.
뻬쩨르부르그에는 네프스끼 거리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 이 거리는 이 도시를 위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의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거리가 왜 훌륭하지 않겠는가! 내가 아는 바로 이곳 사람들은 가난한 자든 고위직 관리든 누구나 네프스끼 거리를 다른 어떤 좋은 것과도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 (...) 그 거리가 즐겁지 않은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p.227)
누구나 좋아하는 이 거리가 밤이 되면 많은 젊은 독신자들로 분주해진다.
그리고 등장하는 두 명의 독신남, 삐로고프 중위와 화가 삐스가료프. 네프스끼 거리에서 이 두 젊은 독신남은 우연히 아름다운 검은 머리 여인과 금발 여인을 발견하고 각기 미녀를 쫓아간다. 그리고 이어서 일어나는 환상과 현실이 묘하게 섞인 일들은 뻬쩨르부르그의 가려진 실체를 드러내고, 이야기는 결국 다음과 같이 끝나니 아이러니하다.
이 네프스끼 거리라는 건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 그리고 악마가 모든 것들을 실제 모습으로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램프의 불을 직접 켤 때, 네프스끼 거리는 더욱 심하게 사람들을 속인다. (p.282)
화려함 뒤로 천박한 물질적 욕망과 계급의 허위를 숨기고 있는 도시 뻬쩨르부르그. 이 곳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탐욕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간 소외를 생생하게 풍자한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는 고골이 환상과 현실을 교묘하게 직조하여 만든 그만의 세계이다.
만약에 뻬쩨르부르그 여행을 가서 네프스끼 거리를 걷게 된다면...이 말이 떠오를 것이다.
"오, 이 네프스끼 거리를 믿지 마라!"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