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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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을 더욱 순수하고 아름답고 풍부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 우리의 평화, 독립, 타고난 권리 등이 광신도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겨우 열 명 남짓한 인간들의 광증에 제물로 바쳐진 시대에, 시대로 인해 자신의 인간성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모든 문제는 단 한 가지로 집중된다. 곧 '어떻게 하면 나는 자유롭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p.32)


츠바이크는 나치의 광기를 피해 1935년 런던으로 망명, 1941년에는 다시 브라질로 이주했다. 브라질 페트로폴리스의 셋집 지하실에서 우연히 미셸 드 몽테뉴(1533~1592)의 <수상록>을 발견한 그는 전 부인 프리데리케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지금 몽테뉴를 큰 기쁨으로 자주 읽고 있거니와 그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껴요. 또 하나의 에라스무스. 진정 위로하는 정신." (p.165원서 편집자 후기)


츠바이크는 이 책의 서문에서 스무 살때 몽테뉴의 <수상록>을 처음 읽었고 문학적으로 이해는 했으나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기처럼 전해오는 힘'은 없었다고 고백한다. 

몽테뉴가 말하는 온건함, 관용, 마음의 진정같은 권고와 지혜가 피끓는 젊은 시절의 자신에게는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제적 이데올로기가 목숨을 위협'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한 츠바이크는 '이런 집단 광증의 시대에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기 위해선 얼마만 한 용기와 정직성과 단호함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이 거대한 파멸의 한 가운데서 정신적,도덕적 독립을 흠 없이 지키는 일'(p.21,22)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고, 종교전쟁으로 자신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몽테뉴와 '운명의 동질성을 겪고서야' 그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156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5년간 일했던 공직에서 물러난 몽테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의 탑 건물 하나를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의 서재를 만들어 10년간 외부 세계와 작별을 한다. 서재 천장에 프랑스어로 새겨넣은 "내가 무엇을 아는가?" 라는 문구처럼, 그는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독서와 글쓰기에 몰두한다. 몽테뉴가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신의 참된 자아'였고, 자신의 '정신에 완벽한 무위를 선물'하는 것에서 최고의 만족과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나 샤를9세 치세 동안의 성밖의 세상은 카톨릭과 개신교간의 내란이 십년 넘게 일어나 그야말로 프랑스에는 매일같이 피냄새가 진동한다. 이 중 하룻밤에 8천명이 살해당하는 '성 바르톨로메오의 학살'(1572)은 그 광기의 절정을 보여준다. 범죄는 범죄를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 야만성이 온 마을과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고 그 어디에도 관용은 없었다. 


정신적 독재에 '미친 자들', 자기들이 얻은 '새로운 것'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옳은 진리라고 우기면서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들보다 몽테뉴가 더 미워한 것은 없었다. (p.119)


그는 루앙에서 만난 브라질 출신의 식인종들을 보았을 때도 놀라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종교와 관습이 있음을 인정한다. '사람을 먹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을 고문하고 괴롭히는 것보다 사소한 일이라고'(p.120) 말한다.


다양한 세상을 학설이나 체계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 다른 사람을 자유로운 판단과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자기 안에 있지 않은 것을 강요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잘못이고 범죄다. (p.119)


몽테뉴는 '스스로를 위해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권리'(p.119)를 줘야하며,그 누구보다 이것을 실천하는데 앞장 선 사람이었다.

몽테뉴는 '그 어떤 선입견으로도 자신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상의 모든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다.(p.121)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가르치려하지 않고 개인의 내면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 선구자 몽테뉴는 나에게 이렇게 다가왔다. 

너와 나를 편가르고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버린 시대에 개인의 영혼과 자아, 자유의 보존을 위해 그가 평생에 걸쳐 얻어낸 사유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들에게도 크고 작은 위로를 주리라 생각한다. 


어쩌자고 그 모든 일을 그렇게 힘들게 받아들여? 너의 시대의 부조리와 야만성을 앞에 두고 어쩌자고 그렇게 힘들어하고 풀이 죽지? 그 모든 것은 너의 피부만을 , 너의 외적인 삶만을 건드릴 뿐 진짜 내면의 자아는 건드리지 못하는데. (p.38)


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건 오직 나 자신이며, '분별력'을 잃지 않는 한 그 어떤 압력이나 힘도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며 스스로 자유를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을 계속 상기시킨다. 


'우리가 가진 유일하고 잃어버릴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자아를 그 어떤 외적인 강요를 위해서도, 시대나 국가나 정치적 강제와 임무를 위해서도 내버리지 말라고 경고해주는 사람만큼 고마운 사람은 없다'는 츠바이크의 말에서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전 느꼈을 절망의 깊이를 알 수 있었다.

츠바이크는 이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1942년 2월 아내와 세상을 떠나는데, 몽테뉴의 위로가 그의 최후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일까...

자신의 자유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최상의 자유를 향해 떠나간 것일까...

츠바이크가 우리에게 위로를 주듯이 그도 위로를 받고 떠나갔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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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21 13: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상의 모든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다. ‘이 말 너무 좋아요!! 이 책 사놓길 잘했네용ㅋㅋ

coolcat329 2021-05-21 14:07   좋아요 4 | URL
츠바이크가 죽음을 앞두고 쓴 마지막 미완성 작품이라 전성기 때 쓴 전기들에 비하면 조금 아쉽지만, 몽테뉴를 통해 작가가 느꼈을 그 깨달음이 크게 다가왔고 여전히 내가 누군지 모르는 저에게도 저 자신을 지키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해줬습니다.

새파랑 2021-05-21 15: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완성 작품인가 보네요. 몽테뉴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5개라니 일단 ㅎㅎ 책도 그렇게 두껍지 않고 좋네요. 얼마전에 서점가서 마리앙뚜아네트 평전을 봤는데 벽돌책이어서 구매 포기했었는데, 이책은 읽을수 있을거 같아요^^

coolcat329 2021-05-21 17:02   좋아요 4 | URL
네,미완성이라 중간에 미처 정리 못한 문단도 들어가 있고...ㅠㅠ
체스이야기쓰고 당시 발자크 평전도 같이 쓰고 있었던듯 싶은데, 영국에서 얼마나 급하게 브라질로 왔으면 쓰던 발자크 원고도 놔두고 떠났는지...ㅠ
다행히 친구가 다 정리해서 발자크 평전이 세상에 나왔지요. 저는 발자크 평전을 최고로 생각합니다. 발자크 소설 두개밖에 안읽어봤지만 이 평전이 소설보다 더 잼있거든요. 아흑 눈물이...
마리 앙트와네뜨도 역시 강추합니다.

scott 2021-05-21 17: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완성이라니 너무 아쉽네요 츠바이크가 완성한 몽테뉴의 삶이 미완성으로 남았다는건 츠바이크 삶이 어제의 세상에서 스스로 끝을 내버려서 ㅜ.ㅜ

coolcat329 2021-05-21 17:17   좋아요 3 | URL
네...너무 아쉽습니다. ㅠㅠ

붕붕툐툐 2021-05-28 2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몽테뉴 작품부터 읽고, 이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수상록>이 인생책인 사람이 그리도 많다는데 연이 참 안 닿았었어요. 근데 이 책이랑 엮어서 이제 진짜 읽어야겠다 싶네요~~

coolcat329 2021-05-29 07:00   좋아요 1 | URL
이 책 읽으면 몽테뉴 읽고 싶어져요. <나이듦과 죽음에 대하여> 몽테뉴 글 중 죽음과 노화에 관한 것만 추려서 고봉만이 엮은 책도 있으니 참고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