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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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Richard Flanagan 1961~)의 작품이다. 요 전에 읽은 <화이트 타이거>도 인도 작가의 4번째 수상인데, 이 소설도 호주 작가로는 4번째 맨부커 수상이다. 작가가 호주의 섬 태즈메이니아 출신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몇 해간 정말 좋은 작품들이 맨부커상을 받았지만, 올해 수상작은 그야말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몇몇 북플 친구분들의 리뷰를 읽고 알게 됐지만, 결정적인 건 쓸쓸한 느낌의 제목이 주는 어떤 강함 끌림이었다. 2019년 12월에 산 책을 이제야 읽었는데, 난 왜 책을 사서 바로 안 읽는지 자괴감이 든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남아 정글에서 일본군 포로가 되어 타이-미얀마 철로 건설에 강제로 동원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 병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는 호주 태이메이니아 섬 출신으로, 바로 이 '죽음의 철로' 라인에서 살아남은 군의관이자 장교로 현재 유명한 외과의사이다. 포로수용소에서 '병사 천 명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살리려고 애쓴 그의 노력은 그를 전쟁 영웅으로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77세의 노년에 이른 도리고 에번스. 보통 쇠퇴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그는 '세월과 비극의 대중적인 상징'으로 다시 환한 조명을 받는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p.15)라는 어디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이 말을 그는 떠올린다.

"세상은 그냥 그런 거야. 원래 그래, 아들."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과 함께...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과거의 기억은 그의 삶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가 전쟁에 나가기 전 우연히 알게 된 여인 에이미와의 격정적인 사랑의 기억, 일본군 전쟁 포로로서 겪은 잔혹한 경험의 기억은 노년에 이른 그에게 고통이자 기꺼이 떠 안아야할 자신의 삶이다. 


일본은 1941년 말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홍콩에 있는 영국 해군기지, 필리핀 미국 공군기지, 싱가폴 영국 해군 공격의 잇다른 성공으로 동남아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이런 승승장구 속에서 사기가 오를대로 오른 일본은 자신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일본 정신'만 믿고 설치다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을 야기했고, 1942년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는다. 


'1943년 무렵 능력 이상의 일을 벌인데다가 자원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은 버마(미얀마)를 통해 중국 국민당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미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인도를 손에 넣기 위해 415km에 달하는 철로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이때 도리고를 비롯한 천 명의 호주 포로병사들이 이 일본의 야심찬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물론 이 철로 건설에 6만명의 연합군과 25만 명 이상의 민간이 투입되었다고 하나 이 책에서는 호주 포로들만을 다룬다. 


패색이 짙었던 일본은 철로를 지을 돈과 기계, 시간도 없었다. 오직 여기저기서 강제로 데려온 포로들과 그 잘난 '일본 정신'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닷새 동안 강철 차량에 갇히고 또 이틀동안 트럭을 타고 정글에 도착한 포로들에게 일본군 장교는 다름과 같이 말한다.


"천황 폐하를 위해 철로 건설을 도우려고 먼 길을 와줘서 고맙다. 포로로 잡힌 것은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 좋다! 천황 폐하를 위해 철로를 건설해서 명예를 되찾아라. 굉장한 명예다. 굉장해!" (p.61)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에게 저 말은 어떻게 다가왔을까...천황, 명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제대로 된 장비는 커녕 식사도 나치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열악한 상황에서 많은 포로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간다. 그들에게 제공된 도구라고는 '밧줄과 장대, 망치와 쇠지레, 짚바구니와 괭이 뿐' 포로들은 심각한 굶주림 상태에서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저 도구들을 가지고 '정글을 베어내고 바위를 부수고 흙을 옮기고 침목과 레일을 운반'한다. 


'아픈 사람, 심하게 아픈 사람, 죽어가는 사람'만이 있는 이곳에서 군의관이자 포로병사들의 지휘관인 도리고는 일본군 장교, 나카무라에게 철로공사에 나갈 수 있는 인원을 날마다 보고해야 한다. 그는 한 명의 병사라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의약품은 커녕, 콜레라와 이질, 각종 질병으로 병사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단축된 공사 기일에 강도 높은 노역을 요구하는 일본군 장교와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는 도리고 대령간의 '흥정'은 참으로 기가막히고 슬프다.


"363명입니다." 

"고햐쿠!" (500)

"380명"

"용햐쿠 규쥬고" (495)

그는 다시 한번 환자 수를 언급하고, 그들의 다양한 병을 자세히 설명하며 400명을 제시한다. 

"400명 이상을 데려가봤자 천황 폐하를 위해 아무 일도 못 합니다. 몸이 좋아지기만 하면 훨씬 쓸모 있을 사람들이 죽을 겁니다. 400명이 우리가 끌어모을 수 있는 최대한이에요." (p.273)


이런 도리고의 간곡한 부탁에 일본군 장교는 통역을 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헌신하라", "일본의 정신을 이해하라" (p.274)


그 순간 사열해 있던 한 명의 포로가 쓰러지고 에번스는 말한다. "399명입니다."

나카무라는 도리고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다. 계속 날아오는 따귀를 맞으며 도리고는 속으로 병동에 있는 환자 수를 다시 계산한다. 그는 속으로 406이라는 숫자를 생각하지만 입밖으로 말하진 않는다. 계속 날라오던 따귀가 멈추고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한다. 이 팽팽한 시선 속에서 '삶과 죽음을 거래하는 이 기묘한 시장의 흥정'은 다시 시작된다. 


"430명, 천황폐하의 뜻이다."

"압니다. 429명" (p.277)


이렇게 협상은 끝난다. 나카무라가 애시당초 제시한 500명에서 마지막 한 명까지 깍아 얻어낸 숫자 429명...71명을 깍았으니 이긴 것인가...아니면 도리고 자신이 쥐어짜서 겨우 제시한 숫자보다 66이 늘어났으니 진 것인가...아무리 자신이 최선을 다해도 그는 매일 좀더 많은 것을 잃는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아닌 '다른 사람들의 목숨'이다. 


이 소설에는 한국인으로서 잊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나온다. '고아나'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그는 조선인 포로 감시원으로 본명은 '최상민'이다. 일본군 꼭두각시로 포로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그는 벌 받아야 마땅한 가해자이지만, 작가는 역사의 거대한 압력 속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그의 기구한 인생도 들추어 냄으로써, 전쟁이 빚어내는 비극을 세세하게 그려내 나를 놀라게 했다.


포로들에게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것과 최상민과 같은 경비원들에게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하라고 지시한 고타 대령과 나카무라 소령은 처벌받지 않고, 조선 식민지에서 강제로 징집된 '최상민'과 같은 낮은 계급의 사람들만 희생양이 되어 교수형에 처해지는 전범재판의 불공정함과 모순은 분노를 자아낸다.


아무것도 모르는 16살짜리 조선인 청년은 일본이 약속한 매달 50엔의 봉급은 커녕, 일본군의 교육으로 점점 감정이 없는 '포로들을 후려갈기면 갈길수록 그들이 점점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어가는 모습'에 쾌락을 느끼는 괴물로 변해간다. 그는 '천황의 도구'였을 뿐임을 나중에 깨닫지만, 자신보다 더 악랄한 짓을 한 자들이 목숨을 건지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다. 


포로들을 때림으로써 '대단한 인간이 된 것 같다는 확신' 이 확신이 그를 점점 더 짐승같이 만들었고 '그런 짐승같은 모습이야말로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인간적인 모습'(p.401)이었음을 그는 나중에 이해한다. 교수형을 앞두고 감옥에서 받은 마지막 식사를 보며 그는 '어머니가 담근 매콤한 김치'(p.423)를 간절히 그리워하는데, 이 '김치'라는 단어를 보며 나는 미칠것만 같은 가슴 떨림을 느꼈다. 눈물이 났다. 이 시대에 자신의 삶에 단 한 번의 확신도 없이 미쳐 피기도 전에 사그라든 삶이 얼마나 많았을까...김치를 그리워하며 죽어간 영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 소설의 제목은 일본 시인 바쇼의 기행문인 <오쿠로 가는 좁은 길>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책은 사람 목 자르기를 좋아하는 고타 대령이 이 책 '한 권에 일본 정신의 천재성이 요약되어 있다'(p.162)고 칭송한 책이다. 

질병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포로들이 죽어 나가는 수용소에서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하이쿠를 읊어대는 고타대령과 나카무라 소령은 엽기적으로 보인다. 바쇼의 글에 빗대어 지금 자신들이 건설 중인 철로가 바로 '바쇼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일본의 정신을 버마까지 이어줄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라며 자아도취 속에 나누는 대화는 기괴하면서도 예술의 아름다움과 함께 묘한 슬픔이 밀려온다.


사람의 목을 자르고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꼈다는 고타 대령이 즉석에서 읊은 하이쿠.


만주국에 있을 때도

목을 보면

나는 만주국이 그립다. (p.165)


이런 글같지도 않은 글을 이 곳에 쓰기가 싫지만 당시 일본장교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고 싶어 어쩔 수 없이 옮긴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이 고타 대령은 혈액은행의 간부가 되고 선(禪)명상가가 되어 잘 먹고 잘 살다 급기야 죽어서는 '살아있는 부처'가 되고자 하니 참으로 기가 차다.

혈액은행의 창립자는 전쟁 때 생체해부를 한 악마로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는데, 이들이 외국인 포로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생체해부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의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군인으로 일본 포로수용소 생존자이다. 책의 맨 앞부분에 '335번 포로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쓰여있다. 물론 '335번 포로'는 아버지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구상했고, 이 소설은 평생 참혹한 전쟁의 경험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아버지, 즉 '한 인간의 영혼을 문학으로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출판사 해설)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주인공의 과거와 현실을 넘나드는 기억의 두개의 축은 전쟁과 사랑이다.

나는 사랑 이야기보다는 전쟁 이야기에 더 깊은 인상과 감동을 받았기에 사랑 이야기는 다루지 않았지만, 참혹한 전쟁의 기억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반면, 유일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 사랑의 기억은 그를 지옥같은 세상을 살게 하는 버팀목으로 작용한다. 

'발아래에는 진흙이, 머리 위에는 더러운 하늘'(p.543)이 있다해도 사랑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도리고의 깨달음은 이 책의 첫 장에서 도리고가 본 최초의 빛과 연결된다.


처음에 이 책을 몇 장 넘기면서 '아...이건 무조건 별5개다' 라는 생각과 함께 너무나 부족한 독자이지만, '이 책은 정말 잘 읽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작가가 전쟁과 관계된 모든 인간들 하나하나에 세심한 생명을 불어 넣어줬는데, 나는 그것을 간결하고 능숙하게 담아내질 못하니...

다만 요리를 못해도 맛있는 건 알듯이 훌륭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읽은 부커상 수상작 중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과 함께 이 작품을 최고라고 생각한다. 참 묵직하면서도 아름답고 때로는 가슴 아픈 눈물이 흐르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완성도 있는 작품을 향한 작가의 노력이 정말 많이 보여 독자로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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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5-14 16: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ㅋㅋㅋㅋ 잘 읽으셨다니 반가워요!

coolcat329 2021-05-14 17:54   좋아요 3 | URL
폴스타님 리뷰가 좋은 책 고르는데 늘 많은 도움을 주셔요~

scott 2021-05-14 16: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발아래에는 진흙이, 머리 위에는 더러운 하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헌사 같은 이책 ,잔혹한 전쟁의 희생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사가(saga)라고 맨부커상 심사위원들이 이책을 선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책을 쓰는 동안 고통스러웠던 작가에게도 고맙지만 아룬다티 로이 작품을 비롯해 부커상이 주목하고 선정하는 작품들의 리스트들(롱/숏 리스트) 상당수가 소수자, 약자의 목소리에 집중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세상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볼 기회를 마련해 줘서 개인적으로 맨부커상이 선정하는 책들은 항상 챙겨 읽으려고 노력 한답니다.

coolcat329 2021-05-14 17:53   좋아요 3 | URL
아 정말 그러네요~제가 읽은 부커상 작품이 거의 다 차별과 억압을 받는 약자들의 이야기였어요. 앞으로 부커상은 꼭 챙겨 읽고 싶습니다. 스콧님 댓글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5-14 17: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괴감과 부커상 최고라니 이것도 안읽을수 없네요~!! 이런 직설적인 추천 완전 좋아요^^

Falstaff 2021-05-14 17:12   좋아요 3 | URL
이건 읽으셔야.....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 스토리>와 함께요. ^^

coolcat329 2021-05-14 17:58   좋아요 3 | URL
자괴감은 책을 사놓고 1,2년 지나서야 읽으니 늘 느낍니다ㅠ
리뷰를 책의 품격에 맞게 시처럼 쓰고 싶었으나 저같은 초짜는 그저 솔직한게 최고인듯 싶습니다. 🤭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한다는 폴스타프님 의견에 저도 동감입니다.

coolcat329 2021-05-14 17:59   좋아요 4 | URL
폴스타프님 <오버스토리> 매번 펼쳤다가 너무 무거워 다시 내려놓네요. 하지만 올해 꼭 읽을거에요~!!!

페넬로페 2021-05-14 18: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은 내용을 모르더라도 제목으로 확 끌리는 느낌이 있어요~~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 그랬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있어요^^
coolcat님의 리뷰로 꼭 읽어야겠어요**

coolcat329 2021-05-14 18:57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제목이 참 끌리더라구요~~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