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뒤렌마트 희곡선 - 노부인의 방문.물리학자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김혜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평점 :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뒤렌마트(1921~1990), 그의 희곡을 처음 읽었다. 스위스 베른 주에서 태어난 뒤렌마트는 '기술문명과 자본이 결탁하여 만들어 내는 세계, 개별자로서 갖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억압하는 사회나 체제'를 비판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작가로서, '투쟁적인 작가, 눈치 보는 일이 없는 작가, 서구에서 가장 혹평을 받는 작가'라는 평판을 얻었다.(p.278작품해설 )
이 책에는 두 편의 희곡 <노부인의 방문>,<물리학자들> 을 담고 있다.
1955년 발표된 <노부인의 방문>은 3막으로 구성, 귈렌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인간성이 물질의 욕망 앞에서 어떻게 변해가고 무너져가는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섬뜩하게 보여준다.
경제적으로 파산해가는 작은 도시 귈렌의 시민들은 억만장자 노부인의 방문을 앞두고 분주하게 환영 준비를 한다. 이 작은 도시를 살릴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돈밖에 없기에 그녀의 방문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과거 그녀와 연인 관계였던 소상인 '알프레드 일'은 노부인이 많은 돈을 기부하도록 설득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드디어 요란한 치장에 '온갖 기괴함에도 불구하고 드문 우아함을 갖'춘 모습으로 노부인이 등장한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그녀를 보고 시민들은 당황하지만 노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1막이 끝날 때 쯤 나는 책을 읽다 벌떡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직접 읽어보시고 느끼시길 바란다. 단 하나 노부인은 시민들이 바라던 액수보다 훨씬 큰 10억을 기부하겠다고 한 사실!
<물리학자들>은 2막으로 이루어진 극으로 1962년 발표되었다.
이 극은 과학발전이 야기하는 인류 멸망의 가능성, 학문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사이에서의 과학자들의 양심, 과학은 국가와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등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엘리트 환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세리제 정신병원의 한 살롱에 세 명의 환자가 격리되어 있다. 이들은 한 때 저명한 물리학자였지만 지금은 정신 이상자로서 한 명은 자신을 뉴턴으로 또 한 명은 아인슈타인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솔로몬 왕이 나타나 자신에게 우주의 비밀을 알려준다고 생각하는 '뫼비우스'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만든 상상의 세계 속에 틀어박혀'(p.183)살고 있다.
이들의 치료는 '인도주의자이자 정신과 의사로서 명성을 얻고' 있는 곱사등이 여의사이자 이 병원의 설립자인 '마틸데 폰 찬트 박사'가 맡고 있다.
1막은 이 정신 병원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경찰이 수사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인슈타인이 간호사를 목졸아 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3개월 전에는 뉴턴이 간호사를 목졸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기이한 상황설정이 처음부터 이 희곡을 흥미롭게 만들고, 이야기는 점점 더 그로테스크하면서 역설적으로 흘러가는데, 그 기이한 긴장감을 여기서 발설하면 안될 듯 하다.
다만 뒤렌마트가 작품 뒤 부록에서 언급한 것처럼 '역설 속에서 현실이 드러난다'는 사실과 그런 '역설과 마주 선 사람은 현실에 노출'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 극의 배경이 정신병원인 점은 이런 현실이 품고 있는 위험을 보여주기 위한 중요 장치이며 마지막에 가서 독자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엄청난 역설의 진실에 놀라게 된다.
역자는 작품해설에서 뒤렌마트가 보여주는 '세계상은 왜곡되어 있고,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하며, 거부감을 주고, 모욕을 느끼게 한다'(p.289 작품해설)고 말한다. 그로테스크한 상황을 보며 관객은 그 상황에 이입하기 보다는 거리를 두게되고, 바로 그 거리두기를 통해 관객과 독자는 냉철하게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게'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두 작품 속에서 인간은 거대한 사회 속에서 무력한 존재로 그려진다. 물질적 풍요와 과학 기술의 발전 속에서 개개인의 실존은 보이지 않는다. 개인의 저항은 막강한 권력과 자본 앞에서 너무나 보잘 것 없고 그저 집단 속에서 도구로 살아갈 뿐이다. 뒤렌마트는 이런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의 실상을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고 역설적인 기법으로 '현실에 대응되는 상징적인 상을 만들어 보임으로써'(p.289 작품해설)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나는 이 작품을 두 번 읽었는데, 두 번째 읽을 때 작가가 곳곳에 깔아 둔 복선들이 잘 보여 더 재미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나도 뒤렌마트는 천재라는 생각이 드는데, 비극인거 같으면서도 희극이고, 희극인거 같으면서도 비극인 이 두 작품을 읽어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