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리뷰해주세요.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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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미국 대기연구센터에서 또 하나의 우울한 정보가 나왔다. 북극의 기온이 2000년 만의 최고 온도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 징후들은 지구의 미래를 더욱 더 암담하게 만든다. 하지만 걱정은 한순간일 뿐, 에너지 소비와 열대림의 파괴는 여전히 증가일로에 있다. 이따금씩 불어 닥치는 어마어마한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전 지구적 대책은 사실상 전무하고 할 수 있다. 선진국들의 실익과 개도국들의 현실 앞에 이 엄청난 문제는 그저 뒤로만 미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지구온난화에 속지마라>는 제목의 책을 만났다. 어이없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이 책의 제목을 보며 이 책과 비슷한 주장을 펼쳤던 또 다른 책이 생각났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구온난화를 명목으로 내세워 기업들에게 '환경세'를 더 걷기 위해 온난화 문제를 부풀렸다고 주장했던 내용의 책이었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객관적 근거들을 문제 삼은 점은 비슷하지만 <지구온난화에 속지마라>는 배후세력의 이익문제가 아닌 새로운 이론을 통해 지구온난화에 대한 통념을 깨고 있다.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지구의 기온은 적어도 백만 년 전부터 1500년(+/-500년)을 주기를 가지고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기온 상승 역시 그 주기에 따른 변화일 뿐이며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다른 모든 주장들은 억측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새로운 주장은 시추한 빙하 코어로부터 얻어낸 정보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며 약간의 오차가 있긴 해도 전체적인 주기에는 어긋남이 없다고 주장한다. 보면 볼수록 솔깃한 이론, 과연 저자의 주장은 사실일까?

솔직히 저자가 문제 삼는 지구온난화에 대한 여러 지표나 저자가 주장하는 새로운 이론의 근거들을 내가 가진 정보로만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책에 나오는 수많은 연구결과며 학식 있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이 분야에 문외한인 내가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척 수동적으로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저자가 주장하며 내세운 근거 속에서 몇 가지 오류점과 평소의 내 생각과 어긋나는 대목들을 발견하고부터 책읽기에 변화가 생겼다. 나는 이것들을 저자가 내세우는 주장에 반박하는 내 나름의 근거로 삼고, 저자를 앞에 둔 것처럼 전의를 불태우며 책을 읽어나갔다.

저자는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원을 개발하려는 현재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충분한 양의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풍차를 설치하고, 태양력 발전소를 만들어야 하므로 다시 수억의 산림과 황무지를 파괴해야 할 것이다." 알맞은 바람이 불고, 충분한 태양력을 모을 수 있는 곳이 꼭 울창한 산림이라는 주장은 다소 지나치다. 게다가 산림파괴가 심하게 진행되고 있는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대륙의 경우는 대체에너지를 위한 개발이 아닌 소고기와 사료를 위해 거대한 숲이 파헤쳐지고 있다.

"비료공장에서 만들어지는 화학비료가 없다면, 우리는 세계의 남아있는 숲들을 갈아 없애고 농경지를 늘려야만 생산량이 적은 농작물로 현재 식량 소비량을 충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화학비료로 대별되는 현대기술이 환경파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이것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 역시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화학비료와 농약을 양껏 사용하는 관행농법과 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토양미생물을 활용한 자연농업을 비교했을 때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수확량을 거뒀다는 보고가 있다.

더불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화학비료 없이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고, 수확량이 적은 유기농법으로 충분한 곡물을 수확하기 위해 더 많은 숲들이 농경지로 바뀌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화학비료의 사용이 식량증대의 유일한 길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유기농법의 수확량이 적다는 믿을 만한 보고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생산자가 적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아 상태에 빠지는 건 분배의 불공정(다국적 식량기업의 횡포)이나 자연환경 때문이지 화학비료가 없어서가 아니다.

저자의 고집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기술 중심주의와 지구온난화에 대한 반감은 이 책의 가치를 많이 희석시키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후변화주기설' 역시도 저자의 그런 지나친 비약과 미숙한 근거들 때문에 크게 와 닿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는 선진국에서 태어난 저자가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조치가 많은 지구온난화 대응책들에 대해 어깃장을 놓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공업화 과정을 거쳐 지구온난화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게 선진국들이지만 저자는 이게 무척 못마땅한 것 같다.

저자는 교토 의정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미국과 다른 선진국들에게 기후 대책을 위한 모든 짐을 떠맡기는 안들로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3세계 나라들은 비후 변화보다는 지금보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가진 자의 사악한 방종이 아닐 수 없다. 기후변화는 원인에 의한 결과물이다. 지금의 지구온난화 역시도 어떤 원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과거 선진국들의 공업화가 그 원인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니 그 책임도 큰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지구의 기후변동에는 일정한 주기가 있다는 것은 가능한 이론일 수 있다. 하지만 지구의 온도가 전적으로 그 주기에만 영향을 받는 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인류는 실로 막대한 양의 화석연료를 사용했으며,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연료사용으로 인한 오염이나 파괴를 완화시킬 수 있는 열대림도 더불어 대단위로 파괴되고 있다. 이는 전에 없던 광경이며 무서운 사실이다. 어쩌면 인류는 저자가 주장한 그 주기마저 흔들어버릴 만큼의 파괴를 했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무시무시한 경고가 빈번히 찾아오고 있는 이때에 그 주기를 믿고 안심하기는 어렵다. 더 큰 재앙이 닥치기 전에 지구의 온기를 낮춰주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하는 유일한 대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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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작업실>을 리뷰해주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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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구인의 낭만어린 작업실 풍경

<지구 위의 작업실>의 저자 김갑수 씨는 평소 평론가로 알고 있었지만 다양한 TV프로에서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학전집을 파는 홈쇼핑 채널에서부터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그리고 그가 진행하는 인문학 열전이란 프로까지 평론가라곤 하지만 그는 비교적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와 뿔테 안경은 그가 글 쓰는 일에 종사한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게 해주었지만 TV에서 보이는 모습 이외에 그가 구체적으로 무얼 하는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들고 나온 책 <지구 위의 작업실>은 무척 반가웠다. 비로소 그의 정체를 파악케 해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특색 있어 보이는 그의 작업실, 음침하지만 일에 대한 열정에 빠져 있는 중년 작가를 생각게 하는 그 공간이 과연 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궁금해졌다.

<지구 위의 작업실>은 작업실의 풍경을 묘사하며 이따금씩 작업실을 거쳐 갔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풀어놓는다. 벽면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는 LP음반과 그의 커피 취향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커피기구들, 그 음침한 지하세계는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의 집합소였다. 그 곳에 찾아왔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놀랄 만큼 그 공간은 자기만의 꿈과 낭만이 깃든 아득한 장소였다.

하지만 책은 너무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지극히 개인적인 면모만을 보여준다. 그 공간은 단순히 한 개인의 낭만을 위한 작업실일 뿐,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뭔가 심오한 내용을 있을 것이라는 처음의 생각은 점점 사라지고 신변잡기식 작가의 글에 결국에는 지치고 말았다.

책 표지의 뒷부분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작업실에서 무슨 작업을 하지? 하는 의문의 해답은 내려지지 않는다. 다만 작업실 바깥의 세상 사람들을 향해 '제발 조금씩은 미쳐달라'고 저자는 소망한다." 평범한 세상 사람들 중에 하나인 나는 작가인 그에게 그가 가진 작업실에서의 창조적인 작업에 대해 궁금해 했지만 작가는 그런 대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너도 너만의 세계를 만들라'라고 하니 좀 어리벙벙한 기분이었다.

열정을 찾지 못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지내는 현대인들에게 분명 그의 작업실은 부럽고 멋져 보이는 공간임에 확실하다. 하지만 그런 공간이 단순히 개인의 낭만을 즐기는 데만 그친다면 그 또한 의미 없는 일이 아닐까? 책 속에는 LP세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노인들이 죽으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음반들이 대량으로 중고시장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참으로 씁쓸하지 않은가? 그토록 열정을 바쳤던 일이 어느 순간 싸구려 중고품으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지구 위의 작업실' 혹은 '줄라이홀'이 어느 순간 폐품더미가 되지 않고 끝까지 멋진 작업공간으로 남아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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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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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 속에서 피어난 이성의 꽃


1755년 11월 1일 전대미문의 대지진이 부유한 대도시 리스본을 강타한다. 땅 위의 모든 것들은 폐허더미가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야말로 대재앙 그 자체였다. 악몽과 같은 대지진의 여파가 지나간 뒤 남아있는 사람들은 건물 잔해와 시체 더미를 보며 생전 처음 보는 이 재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누구는 대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떠들었으며 누구는 퇴락한 도시에 신이 내린 벌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들과는 다르게 이 희대의 사건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대재앙은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집어삼켰고, 그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 더 이상 신은 없었다. 리스본에 닥친 자연재해는 종교에 묶인 인간의 이성을 탈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땅이 꺼지고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는 그 순간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기도가 아니라 더 멀리, 더 높은 곳을 향해 도망치는 것이었다.

모두 생존을 위해 하나같이 아우성쳤다. 지진은 순식간에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인류가 아무리 애써도 이루지 못한 평등이 한순간에 이루어진 셈이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그 순간은 지위도 부와 명예도 아무 소용없었다.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대지진의 울림이 멎고, 살아남은 지배층 인사들은 무너져버린 이 도시의 재건에 대해 궁리한다.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허물어져버린 도시, 그러나 도시의 신속하고도 합리적인 재건을 바라는 이들에게 더 큰 장벽은 대지진을 재앙으로 인식하며 죄를 회개하라 부추기는 광신도들이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넋을 놓은 시민들에게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소리쳤다. 다시 일어나 사라진 도시를 재건하려는 이들에게 일을 멈추고 기도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이들 세력은 굳건한 재건의지를 가진 카르발류에 의해 진압되고, 도시는 '이성적인 사람들'의 손에 맡겨진다.

지진의 피해를 입은 도시를 재건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해서 어디서부터 무얼 시작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선 카르발류는 무너진 도시 위에 새 도시를 건설하는 큰 틀의 계획을 세운다. 이런 그의 계획을 보고 리스본의 처참함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비웃지만 그는 리스본의 재건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다행히 카르발류를 전적으로 신임하는 주제 1세의 무조건적인 지지 덕에 그의 계획은 별다른 마찰 없이 실행된다. 하지만 당시의 리스본, 더 나아가 포르투칼은 식민지 브라질의 황금에 가려진 채 사회전반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 자국 내 산업은 전반적으로 취약했고, 무역에서도 적자를 면치 못했다. 카르발류는 리스본 재건계획을 교두보 삼아 포르투칼의 전면적인 개혁에 칼을 들이댄다. 그는 나라가 운영되는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직접 개입해 개혁을 시도하고 뚝심 있게 추진해 나간다.

카르발류라는 한 천재 공무원의 전 방위적인 노력 덕분에 포르투칼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전에 없던 사상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또한 회생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리스본도 재건의 기틀이 세워졌다. 암울했던 도시의 미래가 다재다능하며 헌신적인 한 인물에 의해 조금씩 빛을 찾게 된 것이다. 리스본 재건에 관해서는 그의 정책을 공공연하게 반대했던 사람들마저 카르발류처럼 단호하고 냉정한 인물이 지휘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영웅적인 위업임을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카르발류는 그가 계획했던 도시가 완벽히 재건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도시의 재건에 열을 올릴 무렵, 그는 이미 노년이었으며 스스로도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오늘 날까지도 남아 길이 빛나고 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놀랄만한 용기와 끈기 있는 추진력은 지금의 리스본을 만든 가장 큰 힘이었다. 대지진은 휘황찬란했던 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고귀한 이성을 가진 한 인간의 노력으로 도시는 재건되었고, 후손들은 새 도시에서 축복과도 같은 일상을 갖게 됐다. 때때로 자연은 인간을 위협하며 모든 걸 빼앗아가기도 한다. 이 험악한 시험을 빠져나갈 방법이란 없다. 그저 이성의 눈을 부릅뜬 채 그 이후의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해 나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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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리뷰해주세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나눈 3일간 심층 대화
오연호 지음 / 오마이뉴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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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들

지난 5월 23일 충격과도 같은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고, 국민들을 패닉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그의 뜻밖의 죽음, 그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며, 이 땅 위에 자라고 있던 희망의 새싹들이 모조리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가족과 지인이 연거푸 수사망에 오르며 최후의 보루였던 도덕성마저 타격받자 그는 끝내 스스로를 버리는 선택을 했다. 믿었던 국민들로부터도 외면 받았던 그. 그토록 소통하고 싶어 했건만 온갖 장벽에 부딪혀 끝내 자신의 뜻을 접어야 했던 그.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끊이지 않는 조문행렬이 말해주듯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다만 권모술수에 능한 자들의 횡포와 그의 입을 막으려는 자들의 농간으로 그는 대다수 국민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후죽순 터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그를 고립시켰고, 외롭게 만들었다.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해서 가장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던 그는 그렇게 홀로 남아 고군분투했다. 상처뿐인 패배의 연속, 그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믿었던 사람들은 이미 그를 포기했다.

지지층의 이탈과 그를 향한 잦은 원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더욱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실 수용에 급급한 그를 보며 보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냉담한 시선을 보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절박한 상황과 그의 선택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 대목에선 그의 실수 혹은 무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서의 과감한 승부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눈에 띄게 마련이다. 곧 그의 선택도 현실의 충분치 못한 여건에 눈을 감은 채 지나치게 앞서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실수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은 그를 궁지에 몬다. 이젠 진보도 보수도 모두 하나같이 그에게 촉수를 들이댔다.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도 그의 이름 앞에 '반'을 붙이며 떨어져 나갔다. 더욱 고립된 그였지만 대통력 직을 물러나는 순간까지고 아니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진보와 개혁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패배는 있되 패배주의는 없다는 그의 철학과 보다 나은 시민사회를 만들려는 그의 의욕은 오히려 대통력 직을 물러난 뒤에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안타깝게도 그의 목을 조이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글과 대화로 사람들과의 소통을 즐겼던 그였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에게 일방적인 목소리만 냈다. 이유도 배경도 없이 그의 의견을 묵살했고, 그를 깎아내렸다. 그리고 검찰의 수사가 더욱 심해질 무렵, 그는 소통의 모든 문을 닫아버린다. 홀로 남아 갖은 고뇌와 시름하던 그는 결국 충격적인 선택을 한다. 그를 둘러싼 모든 소요와 이유 없이 힐난하던 사람들을 홀로 모두 떠안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 앞에서 나는 깨져버린 꿈과 뭉개진 희망을 보았다. 이 땅 위의 어느 누구도 그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에 절망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 뒤 온 국민의 애도 물결에 놀라 숨죽였던 파렴치한들이 요즘 들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심지어 그의 장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시비조의 말을 하기도 한다. 그가 속절없이 떠나버렸기에 남겨진 이들은 저런 어이없는 말에 대항할 기력이 없다. 꺼진 희망의 불씨, 답답한 가슴, 생전에 그는 그토록 작아보였건만 그가 남긴 공허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우리를 압박한다. 하지만 그의 뜻을 생각하면 가만히 앉아 포기할 수만은 없다. 그가 강조했듯이 패배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주의는 없어야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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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희망이다>를 리뷰해주세요
거꾸로, 희망이다 - 혼돈의 시대, 한국의 지성 12인에게 길을 묻다
김수행 외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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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과 암울의 시대, 우리가 가야할 길은?

<거꾸로, 희망이다>는 한국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12명의 인물들에게 시대의 아픔이 어디에서 오며, 우리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모두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은 어디인지를 묻고 있는 유쾌한 대담서다. 약자를 궁지에 모는 사회, 자연을 돌보지 않는 사회, 무한 경쟁으로 삭막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 사회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어떻게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지 각 분야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분들이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은 타인이에요.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죠. 내 인생이 풍부하다는 것은 내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윤택하다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그래서 풍성한 이야기도 만들어지는 거죠. 그렇잖아요?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타인과의 소통과 연대는 여러 대담자가 강조한 중요한 요소이지만 스스로의 안위조차 살피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러한 가치는 설 자리가 없는 게 현실이다. 당구장의 한 편에서 그리고 술집의 한 자리에서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들이라도 있다면 다행이다.

개인이 고립될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아마도 직업과 돈에 대한 문제 때문일 것이다. 남들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는 직업, 한 턱 낼 수 있는 경제적 여유는 오로지 도서관에 처박혀 스펙을 올렸던 친구들의 몫이었다. 그래서 직업에 대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 친구들이 가는 데로 부모님이 떠미는 데로 우리는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경제 회복만 되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게 아니고, 자기 존재가 회복되고, 그걸 느껴야만 이 불안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질 수 있는 겁니다."

내 삶이 정체되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은 정처 없이 취업의 바다를 헤매게 만드는 동기가 된다. 그래서 더 취업에 유리한 더 많은 점수를 얻으려 책상 앞에 앉지만 좁아터진 취업문과 비슷한 길목에서 나보다 더 좋은 스펙을 가진 이들을 보며 이내 좌절한다. 내가 쫓는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할 수 없을 거란 걸 스스로도 잘 알고는 있지만 내 꿈이나 내 뜻을 펼칠 수 있는 더 넓은 세상을 찾기엔 남아 있는 열정이 부족하다. 한숨과 푸념, 좌절과 절망은 그래서 오래된 친구처럼 늘 가까이에 있다.

그래도 <거꾸로, 희망이다>를 읽으면서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은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당장 이렇다 할 결심을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동력원으로 삼을 만한 조언들이 참 많았다. 특히 '우정과 환대의 공간'이란 말은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그 다양성 자체를 축복하는 분위기, 바로 우리가 추구하고 만들어야 할 모습이었다. 우리가 다 함께 일궈나가는 사회, 사람들의 활력이 서로에게 힘이 되는 그런 사회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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