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건너는 집 특서 청소년문학 17
김하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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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서재에서 신간소설이 나왔다. 늘 그랬듯이 청소년 소설이다. 열두살 딸이랑 같이 읽었다. 그런데 청소년보다 어른인 내가 더 감동받았다. 재밌었다. 어려운 소설만 읽다가 만나서 그랬는지, 갑자기 나도 앞길이 창창한 청소년이고 싶었는지 정말 재밌게 읽었다.

하얀운동화, 파란대문, 빨간 우체통, 비밀, 중2 둘과 고2 둘, 문제



이 소설을 이해하는 몇가지 키워드다.

주요등장 인물은 넷 . 주인공이다. 선미와 강민, 자영과 이수.



네 명의 학생들은 모두 하얀운동화를 우연히 만나 신고 등교길에 할머니를 한 분 만난다. 할머니는 놀랍게도 이 들의 가벼운 인적사항을 알고 있으며 금요일 5시까지 오라며 하얀운동화의 비밀을 알려준다.



모르는 어른은 다 조심해야 하는 요즘 아이들의 의심은 당연하다. 아무리 웃으면서 인자하게 말해도 갑자기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쉬이 따르기 어렵다. 하지만 기묘하고 놀라운 일들은 벌어지고 만다.



솔직히 말하면 타임리프 같은 거야말로 진짜 허황된 이야기다. 그렇게 가능하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재밌겠는가. 몇 가지 규칙만 지키면 과거로든 현재로든 미래로든 내가 원하는대로 갈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인생에 신중할 필요도, 후회하다가 깨닫고 발전하는 일도 없겠지. 가고 싶은대로 가면 되니까.

하지만 알다시피 그런건 없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도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텐가.

이 책에서 가장 재밌었던 설정은 각기 다른 공간에서 이 집으로 들어온다는 설정이었다. 서울에서 두 명, 경기도에서 두 명. 등교길에 만난 파란문이지만 열리는 곳이 다르다. 그런데 들어오면 같은 집에서 만나는 것이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현대인은 제각기 다른 고민과 상황과 여건 속에서 살아간다. 그 모든 일들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그럴 때 누가 따뜻하게 손 내밀어주면 어떨까? 따뜻한 음식과 나를 기다리는 안온한 공기와 나를 반겨주는 어떤 이가 있다면 살기가 좀 퍽퍽하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아예 시간이 멈춘 것처럼 행복할 것 같다. 그런 꿈의 공간이 바로 이 시간의 집이었다. 가장 부럽고, 가장 재밌는 설정.



작가 김하연은 따뜻한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 같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전개에 이야기를 멈출 틈이 없지만 읽고난 후에도 계속 따뜻한 감성이 남아있다. 학원물이 아니지만 학원물 같다. 세태를 잘 아는 것도 같았다. (이야기가 좀 세기는 했다) 소설가가 구축한 세계 속에는 뉘우침이 있고 화해가 있다. 게다가 미래도 있다. 그래서 재밌다.
스포방지를 위해서 내용을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찌질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네 명의 청소년들을 보면서 이 땅의 청소년들도 저런 아름다운 관계를 만나서 무슨 일을 결정함에 있어 용기를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라보았다. 용감하기 정말 힘든 요즘 청소년들. 수 많은 고민 중에 있지만 아무도 만져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의지하기 어려워서 반항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도 이런 판타지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그 따스함이 돼줄 수 있을까.



중2를 견디고 있는 나의 아이도 두려운 어떤 상황을 만난다면 홀로 표류하지말고 뜻밖의 안온한 공기를 만나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현재를 용감하게 견뎌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 읽어볼 시간 없나 자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겠다. 이런 깨달음은 자주오지만 청소년 소설로 인생을 배웠으니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돼봐야지!

어른판도 있으면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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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아 2.2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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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사회가 본격 도래하게 되면 사라지는 직업군 중에 작가도 있다지? 에이 되겠어, 싶다가도 김주하 아나운서랑 똑같이 생긴 AI 아나운서를 보면서, AI가 적었다는 기사문을 읽어보면서, AI가 그렸다는 그림을 보면서 아 진짜로 오겠네. AI작가가 오겠어, 싶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아이퍽10] 이란 러시아 SF소설에서 마침내 그것이 도래한 미래사회를 만난 적이 있다. 그 AI는 추리소설가인데 실제로 인간처럼 돌아다니면서 사건을 조사하고, 탐정처럼 파헤쳐서 소설로 쓴다. 그 AI는 어벤져스의 비전처럼 현실성이 없다. 두렵기만 하고.

그런데 [갈라테아2.2] 은 도래한 인공지능이 어떤 일을 벌인다기보다는 '사람이 기계에게 언어를 훈련시킬 수 있을까?' 라는 전제로 출발하기 때문에 두렵고 무섭다기보단 기발하고 궁금하게 만든다. 



주인공 리처드 파워스는 작가의 이름이 그대로 투영된 작가 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소설적인 요소는 많이 들어가 있지만 그의 사랑과 문학에 대한 그의 고뇌는 일정부분 사실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여기서는 파워스라는 말 자체보다는 이니셜 P라고 지칭한다. 



 


이 소설을 끌어가는 커다란 이야기 주축은 셋이다.

첫번째는 획기적인 인공지능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왜 만드냐는 물음에 외로워서라고 답하는 렌츠 박사의 엉뚱함과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상처와 추억에 젖은 P의 고독함이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헬렌이 탄생하고 교육이 진화하는 과정이 이 글의 핵심이다.


두번째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마치 현재를 잠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연인 C와의 사랑과 이별도 이 소설을 끄는 핵심이 된다. 그 안에는 사랑과 더불어 P가 늘 고뇌하던 문학에 대한 갈망이 엿보인다. 또, 렌츠의 숨겨진 아내 요양원에 살고 있는 오드리의 등장도 독자에겐 놀라운 사건 중의 하나였다. 렌츠는 대체 왜 이런 AI를 발명하고자 했을까에 대한 해답. 


마지막은 인공지능 시대를 대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론으로 과는 과정이다. 이 부분이 사실 생각거리를 많이 던진다. 혼자 말하기엔 어렵고 여러사람과 논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P는 사랑했던 연인 C와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온다. 모교인 U대학에 취직했다가 고등과학연구센터에서 렌츠박사를 만난다. 렌츠는 영문학 석사 자격시험을 볼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다른 과학자들은 어렵다고 이야기해서 결국 내기를 한다. 1년 동안 인공지능에게 영문학을 가르치고 인간처럼 시험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그 시험지가 인간과 비교해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하면 렌츠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P는 얼떨결에 튜링테스트의 전개와 인공지능 학습을 맡는다. 그리고 임플리멘테이션 A에서 H까지 진화하는 네트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네트는 점전 발전한다. 결국 언어를 알고 책을 읽는 수준에 이르렀다. 인공지능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문학을 가르치던 P가 인간적으로 인공지능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헬렌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고 마치 사람인양 대한다. 헬렌의 대사를 보면 이미 사람같았다. 모양은 그냥 컴퓨터인지 몰라도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미 컴퓨터이기 때문에 한번이라도 업뎃 된 얼굴은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라면 헬렌의 원래 얼굴- 그러니까 컴퓨터- 를 보여주면서 이거야. 할 것 같다. 아니면 그 요구 자체를 묵살하던가. 그러나 P는 더이상 헬렌을 그저 기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P는 헬렌에게 거의 인성을 부여했지만 렌츠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완벽한 진화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헬렌을 절단했다. 일각에서 대두되던 '기계인권' 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나도 어벤저스에서 비전 죽을 때 많이 울었다) 과연 사람과 흡사한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을 죽게 하는 것이 도덕성의 결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각도로 생각해봐야겠지만 인형의 목을 잘라 놓는 것도 잔인해보이는데 나와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대화를 나누었고, 나의 가르침을 사사한 인공지능을 자르고 붙이고 심지어 죽이는 (p.490) 건 부도덕이 아니더라도 정신적 건강을 해칠 것 같다.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오다니.나는 이 책이 너무 어렵다고만 생각해서 며칠을 끌었다. 헬렌을 만드는 과정들이 지난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헬렌과 P의 유대가 드러나는 순간 너무 재밌어졌다. 전개되고 밝혀지는 내용들이 흥미진진했다.결말은 좀 슬펐다. 모든 것을 깨달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한 일에 깜짝 놀랐다. 사람이라고 생각해 봤을 때 옳은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ㅠㅠ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책 [갈라테아 2.2] 였다. 1995년에 출간된만큼 지금하고는 25년의 차이가 있지만 다분히 현대적이라는 생각이다.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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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 마녀 또는 아그네스
해나 켄트 지음, 고정아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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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고 예전에 읽었던 마거렛 애트우드의 [그레이스]가 생각났다. 정황에 의한 수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지 알 수 있는 책이었다. 해나 켄트의 화제의 데뷔작 [살인자, 마녀 또는 아그네스]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사 해나 켄트는 교환학생으로 아이슬란드 북부에서 1년을 살면서 아그네스라는 여자를 알게 됐다. 아이슬란드의 마지막 사형수 아그네스. 두 남자의 살해에 가담한 실존 인물이다. 그의 이름과 사형집행일, 하인이라는 신분만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해나 켄트. 처음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묘사와 서사가 탁월하다.

이미 띠지가 스포일러다. 마지막 사형수라는 말 자체가 아그네스가 사형을 당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레이스]의 결말과는 사뭇 다른 전개다. 초반에는 이상한 기시감이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해나 켄트가 마거릿 애트우드라는 노년의 대작가와 견줄 만큼의 서사력을 갖췄다는 반증이 된다. 그녀의 다음 소설과 세계 문학사에 끼칠 영향 등이 기대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그네스고 서술자는 장면마다 다르다. 아그네스의 독백을 제외하면 모두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장면마다 주요한 전개자가 따로 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용의자는 셋. 셋 다 재판을 받고 수형 되었지만 재정상의 문제를 제기하며 사형수 중 하나인 아그네스를 민가로 보내서 일을 시킨다는 결정이 났다. 엥? 감옥을 운영할 비용이 없어서 민가에 흉악범을 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이지만 암튼 그러겠단다. 동네 사람들, 특히 집주인은 바들바들 떨었다. 남편은 공무다 뭐다 해서 밖으로 돌고, 집에는 딸 둘과 자기와 하녀뿐인데 너무 위험했다. 그러나 결정을 번복하기는 어려웠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형수를 받아들였는데 겉으로 보기에 흉악스럽기는커녕 여기저기 맞아서 멍이 들고,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한 옷이 썩어들어가고 있는 부랑아였다. 그래서 집주인 마르그리에트는 수갑을 끄르고 아그네스를 씻겨준다. 그리고 아그네스는 그곳에서 하인으로 일한다.

옛날 유럽 사회는 교구마다 관리하는 목사님이 따로 있었는데 아그네스는 부목사인 토티 목사를 요청했다. 토티는 두려운 마음과 죄인 구원의 사명감으로 요청에 응하지만 아그네스는 뚱딴지같은 소리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러나 토티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려 애를 쓴다. 어느날 군수 브뢴달을 만나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정말 아그네스가 잔혹한 살인자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아그네스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다 다르다. 누군가는 하나님께 범죄 한 악마 중의 악마로 보고, 어떤 사람은 살날이 얼마 안 남은 탓에 조금 불쌍하게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흉악범으로 보고, 어떤 이는 불쌍한 일에 연루된 똑똑한 하녀로 본다. 진실은 누가 알고 있을까? 진실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작가가 의도한 대로 아그네스의 외로움이 제대로 묻어났다. 곧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걸 알면서도 하인의 일을 감당하며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끝내 억압된 채 죽음으로 걸어들어가야 하는 그녀의 인생 말로가 너무 비참했다. 기껏해야 서른 중반인데... 그러나 살인 이전의 삶도 사형수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부모가 버렸고, 온갖 죽음과 멸시를 경험해야 했고, 성착취에 노출된 채 학대당하며 살아온 삶이었다. 자꾸만 들려오는 아그네스의 이야기는 토티 목사를 힘들게 했다. 그는 독자를 대변해 아그네스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싶어 하지만 군수마저 어리다고 무시하는 젊은 교구 부목사에게 그럴만한 힘은 없었다. 아그네스를 진정으로 도와줄 - 죽은 양 엄마 같은 -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 안타까웠다.

아그네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왜 두 남자를 죽인 사건에 어떻게 연루되었는지 말할 수는 없지만 정말 흥미진진한 소설이었다. 읽을수록 빠져들었고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까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결말이 정해진 소설이라는 게 때론 가독성이 떨어지게 할 수도 있는데 처음 쓴 소설이라기엔 서사가 상당히 힘이 있었다. 영화화 확정이라고 하니 영화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붉은 장미가 뚝뚝 떨어지는 뒤표지처럼 잔혹하고 슬픈 영화가 될 것 같다.


내면에서 아무리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하고 외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결정되고 말아요.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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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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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에 특별히 귀한 것은 없다. 

선량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극도 뼛속까지 발라내진다. p.100


나는 일본 소설 알레르기가 있다. 선전하고 있는 유명 작가들의 책을 안 읽어본 건 아니지마는 특히 요즘은 여러 번 실패해서 그런지 읽기 전부터 엽기 혹은 폭력이나 광기쯤은 염두에 두고 한숨 쉬고 입장한다. 당연히 [유랑의 달] 읽기 전에도 그랬다. 지독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나라마다 가진 색채를 무시할 수 없어서 편견을 장착한 셈이다. 그런데 놀랐다. 이 책은 등장인물을 제외하면 그냥 우리나라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보편적인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위해서라면 짓밟혀도 되는 개인의 사생활, 그리고 황색언론.


(줄거리 생략)


이 책은 특별한 사랑 이야기임과 동시에 황색언론의 폐해를 꼬집고 있기도 하다. 후미는 로리콘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몰렸다. 여기까지는 정황상 그럴 수 있다. 아홉 살 여자아이가 두 달을 열아홉 살 대학생 집에 감금돼 있었다고 믿는 순간, 후미는 소아성애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좋다. 그래서 복역했다. 그런데 사라사는 어떻게 됐을까? 사라사는 피해 아동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졌고, 그녀의 행보와 삶이 관심을 갖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포스팅돼 있었다. 사라사가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라고 동정표 섞인 손가락질을 받는 동안 그 누구도 사라사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후미가 자기에게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말하면 스톡홀름 신드롬이네 뭐네 하면서 아예 믿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인 사라사의 사진이 웹상에 떠돌아다녔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혐오의 눈빛은 

피해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고 아연했다.

위로나 배려라는 선의의 형태로 

'상처 입은 불쌍한 여자아이'라는 도장을,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쾅쾅 찍어댄다. 

다들 자기가 상냥하다고 생각한다. p.84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만, 미스터리한 괴생물체나 유령이 등장하지 않지만 이 소설은 가독성이 좋다.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리고 문장이 아름답다. 번역을 잘한 건지, 작가의 원래 문체가 유려한지 너무 궁금하다. 또, 공감대가 많다. 진짜 인물 이름만 바꾸면 우리나라 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취업난, 아동학대, 황색언론, 상처받은 영혼 등 우리가 알고 나누어야 할 문제들이 넘쳐나는 소설이다. 많은 사람이 읽고 서로 생각을 나누면 좋겠다.

담겨있는 메타포도 좋다. 나는 사라사와 후미가 글라스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좋았다. 인간은 원래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다. 그 유리잔 속에 담긴 음료는 인생이다. 깨지기는 쉽지만 얼마든지 조심할 수 있다. 그리고 글라스는 혼자보다는 둘이 좋다. 완전히 똑같지 않으면 어때, 두 사람이 마주 들 수 있는 잔이면 됐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정말 재밌었던 소설이다. 띠지의 표현대로 오래도록 읽힐 소설이다. 대단히 추천한다. 시대를 읽을 줄 알고, 사람의 마음을 만질 수 있는 작가라고 의심치 않는다. 다음 작품이 나오면 반드시 읽어볼 것이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결심했던 소설 [유랑의 달]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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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연대기
기에르 굴릭센 지음, 정윤희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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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도 '쿨한 건 사랑이 아니다' 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쿨내진동하는 사랑이야기를 볼 때마다 거품물고 비판을 쏟아냈었다. 사랑에 '시무 몇 조' 이런 게 있다면 꼭 들어가야 할 조항 중에 '상대에게 예의지키기' 는 거의 0순위다. 그 예의에는 '바람피우지 않기'가 들어가고, '바람을 피우다 걸리지 않기' 가 들어가고, '바람을 피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않기' 가 있다. 그러나 바람보다 더 경계하는 것은 '쿨한척 하지 않기' 다. '나말고 다른 사람 만나봐도 돼.' 같은 류의 부부 자유연애사상을 거의 경멸하는 수준이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거다. 사랑을 할 때 나와 상대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체고 내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상대가 채워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래서 또 다른 사랑을 만나서 공유하는, 그러니까 반절만 사랑하는 것을 용인하다니. 그게 무슨 시덥잖은 사랑인가 싶다.

결혼 한지 한참 돼서 구닥다리 같은 사랑론을 펼치는 걸까? 요즘은 저렇게 해도 된다고? 외국이라 괜찮다고?


책을 읽고 분노함은 개인의 생각차 다름아니다. 책 자체는 죄가 없다. 작가도 죄가 없다. 그저 등장인물의 행보가 기가막힐 뿐이다. 누구를 죽이지 않았지만 철저하게 벌거벗긴 타미가 미울 뿐이다. 얼마나 미운지 헐뜯어도 그녀가 존에게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소설은 존이 과거의 일을 서술하는 역순행적 구조를 가졌다. 존은 타미와 만나 재가했다. 존과 타미는 사랑했다. 부부인만큼 육체적으로도 사랑했다. 둘이 얼마나 서로의 육체를 탐닉했는지 책에 아주 자세하고 소상히 나와 있다. 그러던 중 타미는 군나르라는 남자에게 성적매력을 느낀다. 그런 감정을 존에게 털어놓는다. 근데 이건 존이 은근히 떠본 탓도 있다. 타미는 그저 그런 남자가 있노라고 말했을뿐이었다. 하지만 존은 알았다. 군나르 이야기를 할 때 타미에게 존재하는 생기나 미묘한 호기심들을 포착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남자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든 말해달라고.


타미는 우연히 군나르와 운동을 같이 하게 되는데 그 횟수가 잦아지고 급기야 외박을 일삼는다. 결국 타미는 군나르를 선택하고 존과 타미는 아이들 때문에 한집에는 살되 별거(別居) 아닌 별거에 들어간다.



나는 이미 고구마를 백개 먹은 듯 답답해졌다. 군나르하고 사적으로 만나기 시작할 때 그녀를 집에 주저앉혔어야 된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고 사랑에 구속과 억압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쯤은 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일반적인 애인이 아니라 부부다. TV도 아빠가 틀어줘야 볼 수 있는 어린 아이들이 있는 부모다. 그런데 이렇게 무책임할수가 있나.


존은 쿨한 척 하다가 사랑하는 아내를 놓치고 말았다. 처음부터 본인이 얼마나 불안한지 어필했어야 했다. 아내가 그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자 자기가 그 남자가 된 것처럼 아내를 만족시키려고 하다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의식의 흐름일까.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다.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상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앞 쪽의 다소 지루했던 서술과는 달리 마지막 장면은 진저리나게 슬펐다. 존이 마지막에 사력을 다해 구애를 할 때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타미의 눈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치 본 것처럼 생생하다) 끝나버린 사랑에 대한 갈구, 둘의 사랑으로 한 밤을 지새우던 불타는 침대는 싸늘하게 갈라진 부부의 실존만 드러낼 뿐이었다. 와, 너무 슬픈데 이건.


'노르웨이 비평가 협회 화제의 문제작'

'노르딕 카운슬 문학상 최고의 화제작'

'북유럽 맨부커상 노르딕 문학상이 주목한 시대의 문제작'


문제맞지. 이건 엄청난 문제작이다. 성애를 지독히도 자세히 묘사해 놨다. 아주 찐한 부부용 에로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성애묘사가 너무 많아서 약간 불편하기도 했다. 굳이 이렇게 말해놔야만 결혼의 '연대기' 란 말인가?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완성하기 위한 기단(基檀)이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려 마침내 정점에 이른 것이 마지막 씬이다. 이게 뭐람. 하고 싶었지만 그 장면이 너무 슬퍼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아내를 빼앗긴 남자의 처절한 삶. 그것마저 쿨하게 , '나가 나쁜X아.' 욕하고 빵 차버리지도 못하고 그저 얕은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부부의 세계. 그러나 결국 아내를 잊지 못해 마치 공작새가 암컷 앞에서 춤을 추듯이 구애하는 그 몸짓이 반으로 접혀들 때 마치 내가 주인공인 것 같은 참담함을 느꼈다. 이 기분 뭐지?


 


아무튼 문제작은 확실하다. 29금 책이라 누구에게 섣불리 권해주지는 못하겠다. 다만 오래된 부부라면 한 번쯤 읽어봐도 좋지않을까? 제목처럼 장황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에게도 결혼의 연대기는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연대기가 아직은 망국으로 가지 않았으면 싶다. 매일 불타오르지는 않아도 미지근하게나마 온기를 체험하고 있다고, 자리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배우자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ㅎㅎ 나의 정서와 잘 맞지는 않지만 희한한 외로움을 흠뻑 경험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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