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연대기
기에르 굴릭센 지음, 정윤희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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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도 '쿨한 건 사랑이 아니다' 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쿨내진동하는 사랑이야기를 볼 때마다 거품물고 비판을 쏟아냈었다. 사랑에 '시무 몇 조' 이런 게 있다면 꼭 들어가야 할 조항 중에 '상대에게 예의지키기' 는 거의 0순위다. 그 예의에는 '바람피우지 않기'가 들어가고, '바람을 피우다 걸리지 않기' 가 들어가고, '바람을 피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않기' 가 있다. 그러나 바람보다 더 경계하는 것은 '쿨한척 하지 않기' 다. '나말고 다른 사람 만나봐도 돼.' 같은 류의 부부 자유연애사상을 거의 경멸하는 수준이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거다. 사랑을 할 때 나와 상대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체고 내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상대가 채워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래서 또 다른 사랑을 만나서 공유하는, 그러니까 반절만 사랑하는 것을 용인하다니. 그게 무슨 시덥잖은 사랑인가 싶다.

결혼 한지 한참 돼서 구닥다리 같은 사랑론을 펼치는 걸까? 요즘은 저렇게 해도 된다고? 외국이라 괜찮다고?


책을 읽고 분노함은 개인의 생각차 다름아니다. 책 자체는 죄가 없다. 작가도 죄가 없다. 그저 등장인물의 행보가 기가막힐 뿐이다. 누구를 죽이지 않았지만 철저하게 벌거벗긴 타미가 미울 뿐이다. 얼마나 미운지 헐뜯어도 그녀가 존에게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소설은 존이 과거의 일을 서술하는 역순행적 구조를 가졌다. 존은 타미와 만나 재가했다. 존과 타미는 사랑했다. 부부인만큼 육체적으로도 사랑했다. 둘이 얼마나 서로의 육체를 탐닉했는지 책에 아주 자세하고 소상히 나와 있다. 그러던 중 타미는 군나르라는 남자에게 성적매력을 느낀다. 그런 감정을 존에게 털어놓는다. 근데 이건 존이 은근히 떠본 탓도 있다. 타미는 그저 그런 남자가 있노라고 말했을뿐이었다. 하지만 존은 알았다. 군나르 이야기를 할 때 타미에게 존재하는 생기나 미묘한 호기심들을 포착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남자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든 말해달라고.


타미는 우연히 군나르와 운동을 같이 하게 되는데 그 횟수가 잦아지고 급기야 외박을 일삼는다. 결국 타미는 군나르를 선택하고 존과 타미는 아이들 때문에 한집에는 살되 별거(別居) 아닌 별거에 들어간다.



나는 이미 고구마를 백개 먹은 듯 답답해졌다. 군나르하고 사적으로 만나기 시작할 때 그녀를 집에 주저앉혔어야 된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고 사랑에 구속과 억압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쯤은 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일반적인 애인이 아니라 부부다. TV도 아빠가 틀어줘야 볼 수 있는 어린 아이들이 있는 부모다. 그런데 이렇게 무책임할수가 있나.


존은 쿨한 척 하다가 사랑하는 아내를 놓치고 말았다. 처음부터 본인이 얼마나 불안한지 어필했어야 했다. 아내가 그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자 자기가 그 남자가 된 것처럼 아내를 만족시키려고 하다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의식의 흐름일까.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다.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상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앞 쪽의 다소 지루했던 서술과는 달리 마지막 장면은 진저리나게 슬펐다. 존이 마지막에 사력을 다해 구애를 할 때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타미의 눈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치 본 것처럼 생생하다) 끝나버린 사랑에 대한 갈구, 둘의 사랑으로 한 밤을 지새우던 불타는 침대는 싸늘하게 갈라진 부부의 실존만 드러낼 뿐이었다. 와, 너무 슬픈데 이건.


'노르웨이 비평가 협회 화제의 문제작'

'노르딕 카운슬 문학상 최고의 화제작'

'북유럽 맨부커상 노르딕 문학상이 주목한 시대의 문제작'


문제맞지. 이건 엄청난 문제작이다. 성애를 지독히도 자세히 묘사해 놨다. 아주 찐한 부부용 에로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성애묘사가 너무 많아서 약간 불편하기도 했다. 굳이 이렇게 말해놔야만 결혼의 '연대기' 란 말인가?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완성하기 위한 기단(基檀)이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려 마침내 정점에 이른 것이 마지막 씬이다. 이게 뭐람. 하고 싶었지만 그 장면이 너무 슬퍼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아내를 빼앗긴 남자의 처절한 삶. 그것마저 쿨하게 , '나가 나쁜X아.' 욕하고 빵 차버리지도 못하고 그저 얕은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부부의 세계. 그러나 결국 아내를 잊지 못해 마치 공작새가 암컷 앞에서 춤을 추듯이 구애하는 그 몸짓이 반으로 접혀들 때 마치 내가 주인공인 것 같은 참담함을 느꼈다. 이 기분 뭐지?


 


아무튼 문제작은 확실하다. 29금 책이라 누구에게 섣불리 권해주지는 못하겠다. 다만 오래된 부부라면 한 번쯤 읽어봐도 좋지않을까? 제목처럼 장황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에게도 결혼의 연대기는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연대기가 아직은 망국으로 가지 않았으면 싶다. 매일 불타오르지는 않아도 미지근하게나마 온기를 체험하고 있다고, 자리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배우자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ㅎㅎ 나의 정서와 잘 맞지는 않지만 희한한 외로움을 흠뻑 경험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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