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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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저자 소개를 먼저 읽고 시작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읽다보니 본인이 대전과 조치원 사이의 시골에서 자랐다고 말하길래 깜짝 놀랐다. 지금은 그 곳이 세종 특별 자치시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는지!

천지개벽한 그 도시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훨씬 이전에 태고의 순수를 간직한 목가적인 마을에서 천재 시인이 탄생했었다니 우야둥둥 적을 두고 있는 나로서는 놀랍고 반가울 따름이다.

서평을 쓸 때 책의 소개는 잘 하지 않는 게 좋다지만 이 책은 좀 소개를 해야 할 것 같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에세이는 원래 1989년에 이미 출간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90년대와 2000년대 기록을 추가해 4부로 편집, 난다 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된 거였다.

본인을 게으르다고 말하지만 부지런히 고독할 줄 알았던 시인 최승자는 고려대 독문과를 나와서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할머니 손에 자라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학을 갔다.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했는데 수재였던 모양이다. 의식 있는 엘리트이기도 했다. 문학작품을 번역했다고 하니 문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시인 본연의 감수성에 내장된 단어들 역시 남달랐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우울함이 내포되어 있지만 타인의 고통과 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글에 휘감을 줄도 알아서 읽는 동안 비감이 느껴졌다.

1-3부는 순수한 시절의 에피소드, 갑자기 도시로 이사하게 되면서 겪은 고독감, 시를 만나게 된 과정, 목도한 죽음들과 개인의 고뇌들이 담담한 필체로 다소 솔직하게 적혀있다. 글에서 검열 따윈 없다. 붓가는 대로 쓰는 게 이런 걸지도 몰라. 멋있으면 언니라는데 이 언니 멋있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있으니 오해 말라)

4부로 가니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자서전은 아니다보니 아주 상세히 적혀있지는 않지만 정신병원에 입원을 해야할 정도로 피폐해진 어떠한 이유와 생의 고통이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은 겅중 뛰어 있지만 여전히 그 정신분열이 치료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 안타깝다. 절필까지는 아니지만 본인의 시가 이제 명을 다했노라 말하기도 하는 최승자 시인. 미안하게도 그의 시는 본 적이 없고, 나는 그저 우연히 이 책을 집어 든 것 뿐이어서 아쉽다. 조만간 그의 시집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p.14

작가 정신은 반드시 있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소중한 시인 최승자의 에세이에는 그가 평생 붙잡고 살아간 작가정신이 박제돼 있다. 시보다는 에세이가 좀 더 울림을 준다. 그러나 이제는 시를 보지 않고는 그를 다 안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젊은 시인의 뜨거운 마음이 어디로 흘렀는지는 시선(詩線)으로 확인해 봐야겠다.



출판사에서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쩜 때가 딱 맞는지. 많은 글에서 한해가 지나는 것에 대한 회한을 많이 다루었다. 페이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한해가 간다는 것은 또 한해가 온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한해가 간다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맞는 말이라서 곱씹으면서 웃었다. 최승자 시인의 문장은 곱씹고 싶은 게 많았다. 그리고 '소소하지만 확실한' 이라는 표현을 1989년에 썼다. 소확행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최승자 시인에게 있다는 생각에 또 혼자 웃었다.

최승자 시인은 멋있는 사람이다. 그의 생각 중에 엄지를 치켜 들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시를 왜 쓰냐는 사람들에게 놓아 주는 일침, 도덕에 관하여, 떠나는 것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한 해의 끝에서 녹초가 된 몸, 녹초가 된 정신과 더불어 고요히 떠오를 그러한 질문에 합당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나 또 한 해를 새로이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986)

흠집이 나버린 정신 건강이 빨리 좋아져서 말년이 행복하시길 바라본다. 인생의 고락과 쓰디쓴 고뇌의 산물을 시라는 아름다운 언어로 못 박아 두었으니 이제는 편히 쉬라고 전해 드리고 싶다. 그만 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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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2021-12-25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에세이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ランゲルハンス島の午後)》(1986)에서 쓰인 말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뜻한다.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A Small, Good Thing》에서 따와 만든 신조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