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영상매체시대에 활자만 가지고 사람의 감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면 진정 뛰어난 소설이라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매체, 음악, 미술 등에 비하여 문학은 독자들의 보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때문에 진정으로 몰입할 수 있는 소설이란 재미있는 영화나 아름다운 음악보다도 더 발견하기 어렵고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모른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그런 소설이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글로 쓰여졌기에 더욱 특별한 그런 이야기이다. 책장 한 장을 넘기는 순간마다 가벼운 떨림이 느껴진다고 할까. 단조로운 서술 속에 환멸과 유머, 허무의 페이소스로 가득 차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거듭 혼란에 빠지지만, 그 혼란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단숨에 마지막까지 읽게된다. 이 삼 부작의 독특한 서사구조는 그리하여 독자를 완벽히 장악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비밀노트>, <타인의 증거>, <50년 간의 고독> 세 편의 소설을 묶어서 일컫는 제목이다. 이는 역자에 의해 만들어진 제목이며, 삼 부작을 묶는 원제는 없다. 세 작품의 원제는 각각 '커다란 노트(Le Grand Cahier)', '증거(La preuve)', '세 번째 거짓말(Le Troisieme Mensonge)'이다. 1부와 2부는 원제목을 조금씩 바꾸면서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해주고 있어 큰 무리가 없지만, 3부는 철저하게 역자의 주관이 개입된 제목이다. 내용으로 보나 작가의 의도로 보나 3부작은 원제를 수정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 제목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말하는 이유는 제목에서조차 소설을 읽는 열쇠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삼부작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따로 또 같이'이다. 각각의 작품은 따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독립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삼부작임을 의식하고 연달아 읽으면 또 다른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따로 읽어도 좋고 같이 읽어도 좋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따로 읽었을 때와 연달아 읽었을 때 받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작품으로 보기보다 삼부작으로 생각하고 읽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다. 이 삼부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속되지만, 인물과 공간적 배경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다. 단순히 앞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앞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뒤집기도 한다. 종국에 가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삼부작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이다.    

 

아래부터 스포일러 주의
 

 이야기는 루카스와 클라우스라는 쌍둥이 형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1부에서는 '하나의 자아를 가진 두 개의 몸'이다가, 2부부터는 '두 개의 자아와 두 개의 몸'으로 분리된다. 쌍둥이의 이별은 자아의 분리를 겪은 한 개인의 내면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럽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쌍둥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2부에서의 가정이다. 쌍둥이라는 설정은 완벽하게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놀라운 것은 쌍둥이가 아니라고쳐도 자아의 분열로 인한 상실감과 고통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인공이 쌍둥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 없지만,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은 언제나 변함 없다.

인물의 존재 못지 않게 서사 구조 자체도 혼란의 연속이다. 1부의 서사는 2부에 와서 어느정도 부정되고, 2부의 서사는 또 3부에 와서 완벽하게 부정된다. 노트 안에 적힌 이야기인 1부의 이야기는 과연 진실인가 허구인가, 2부가 또 다른 거짓말이라면 3부는 과연 진실인가. 이에 대한 실마리는 3부에서 서점의 여주인에게 털어놓는 클라우스(혹은 루카스)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 라는. 소설은 본질적으로 거짓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거짓말이 겹겹이 싸여있다. 우리는 소설이 허구임을 알지만 그것을 읽는 동안은 진실이라고 믿고 읽게된다. 때문에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다시 한 번 부정되었을 때 느끼는 혼란과 충격은 적지않다. 그래서 이 삼부작이 주는 여운은 여느 소설과 달리 특별한 것이다.

중층적인 거짓말로 이루어진 서사구조뿐 아니라 소설 속 몇몇 개별적인 장면들도 충격을 더해준다. 태연하게 어머니의 유골을 니스칠하여 다락방에 걸어 놓는다던가, 자신들을 성추행한 여자를 죽이기 위해 장작에 폭탄을 넣어 둔다던가, 아버지를 미끼삼아 국경을 넘는다던가 하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행위들이 속출한다. 이들이 더욱 잔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파행적인 행동들을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건조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윤리적 기준마저 흔들려 버리는 전쟁 시기의 혼란한 상황을 인물의 행위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결국 혼란기의 사회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 절제된 문체로 밀도있게 형상화함으로써 환경으로 인해 붕괴된 도덕성마저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정한 소설가란 우선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이 탁월해야 한다. 글을 매끄럽게 쓰고,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것은 다음 일이다. 서사문학의 본질은 다름 아닌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기호가 이 방면에 있어 누구보다 뛰어난 소설가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까지 두 편의 소설집을 출간한 그의 소설들은 (비록 단편 뿐이지만) 역동적이다.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은 생생한 소설 속 세계는 독자들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단편은 한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의무적으로 읽게 되는 경향이 강한데, 이기호의 소설은 비록 단편 뿐이지만 소설 읽는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이기호의 첫 번 째 소설집이다. 작가의 등단작품 '버니'를 비롯해 개성있는 단편 8편이 실려 있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하자 있는 인물들이다. 고교 중퇴자, 앵벌이, 본드중독자, 광신론자 등. 각기 다른 의미에서 비루한 삶의 언저리에 존재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어수룩해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무수한 이야깃거리가 나온다. 이기호의 소설에는 수많은 '이시봉'들(최순덕이여도 좋고, 황순녀여도 상관없다)의 어수룩함이 빚어낸 우여곡절들이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절실하게 펼쳐진다.

작가의 상상력의 원천은 매우 다양하다. 티비 특종프로에서 다루어졌을 법한 뒤로 걷는 사나이, 뉴스에서 집중 보도되었을 보도방, 본드흡입, 앵벌이 문제, 이제는 아물어져가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까지 이야깃거리를 찾아 낸다. 거기에다 그 소재들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독특하게 비틀고 다듬어 낸다. 때로는 기발한 판타지로, 때로는 우매한자가 벌이는 한 편의 촌극으로, 때로는 아이러니한 블랙코미디로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이기호는 소설작법에 있어 하나의 방식만을 맹렬하게 고집하지 않는다. 소설 한 편을 전부 랩의 가사로 채우는가 하면(버니), 피의자 조서형식으로 꾸미기도 하고(햄릿 포에버), 성경의 의고체 어투를 흉내내어 쓰기도 한다(최순덕 성령충만기). 단지 형식적 실험을 위해서만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에서 이러한 형식의 파괴는 작품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관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랩의 가사를 흉내낸 것은 작품 속 인물 버니가 랩밖에는 할 줄 모르는 백치여서이고, 피의자 조서형식으로 꾸며낸 것은 작품의 주인공이 실제로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또 성경의 어투를 흉내낸 것은 주인공이 광신도인 것과 관계가 있다. 이밖에도 이러한 형식적 파괴를 통해서 얻는 효과는 적지 않다. '버니'의 경우 랩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어서인지 활자에 리듬감이 부여되어 청각적인 효과를 거둔다. 성경을 흉내내어 의도적으로 다단편집을 해 놓은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문자가 지시하는 의미 뿐 아니라, 문자의 배열 상태에 따른 시각적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 작가의 이러한 시도는 다음 소설집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에서도 꾸준히 이어진다. 이야기 자체 뿐 아니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를 포함해) 이야기를 이루는 모든 것이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기호의 소설을 기존의 소설 형식에 반기를 드는 말장난으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소설들은 낯선 형식 속에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이기호의 소설은 붓가는대로 끄적인 듯 하지만 한 편을 읽고나면 묘하게 질서정연함이 느껴진다. 마구잡이로 확산되는 상상의 나래가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고 결국은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되돌아 오는 느낌을 준다. 표제작인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광신론자 최순덕의 일대기를 성자의 삶에 빗대어 서술하고 있지만, 읽는 이를 숙연하게 만드는 성인의 전기와는 반대로 인물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버니'와 '햄릿 포에버', '옆에서 보는 저 고백은' 등에서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한 인물들을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적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백미러 사나이', '간첩이 다녀가셨다',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에서는 정치나 권력,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번득이는 기발함, 수준 높은 풍자와 유머가 이기호의 모든 작품을 일관적으로 포용하는 특징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말로 더빙된 외화나, 번역된 외국 소설을 볼 때면 자연스럽게 새겨지는 그림이 있다. 항상 '하오' 내지는 '해'로 종결되는 권위적인 말투의 남자 주인공과 '해요'로 끝맺는 고분고분한 말투의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아무런 부당함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남성우월의 무의식 속에 얼마나 뿌리 깊게 젖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 이미 여성인권 신장과 사회적 인식의 개선이 발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에 남성우월주의에 타격을 가하는 일은 더 이상 혁신적인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노출된 대중문화 속에서 조차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불공정함이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을 아는지?  

오현종은 대중문화 속에서 그동한 누구도 발견해내지 못했던 불공정함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당당히 항의하고 있다.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첩보영화의 대명사가 된 007시리즈를 경쾌하게 뒤엎는 소설이다. 말하자면 007 영화 속 본드걸의 후일담에 대한  것인데, 영웅적이며 거침없는 007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다가 다음 시리즈에서는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장신구같은 존재인 본드걸들 중 하나를 말한다. 이쯤되면 짐작할 수 있듯이 소설은 007의 마초같은 본성과 그가 걸치는 새로 산 셔츠나 다름없는 본드걸의 위상에 대해 열렬히 항의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의 무의식 속에 뿌리내린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이다.

이 소설은 주제와 형식을 포함한 다양한 부분에서 작가의 참신한 시도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남성우월주의의 산물인 액션스파이영화를 통해 억압된 여성성을 발굴해내는 시도는 참신하다. 게다가 작품 아래 깔려있는 작가의 날카로운 비판과 무관하게 소설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가볍고 경쾌하다. 액션영화처럼 빠른 전개, 전형적이지만 조금씩 뒤틀린 인물들, 솔직담백한 고백투의 어조 까지. 특히 톡톡 튀는 구어체는 가독성을 높이고 주제를 부각시킨다. 소설 속 화자인 미미는 독자에게 조곤조곤 말을 걸듯이 자신의 모험담을 독자를 향해 털어 놓는데, 이로 인해 독자는 미미의 시각과 미미의 입장에서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미미의 편에 서서 007을 비난할 수 있게 된다. 남성우월주의에 의해 희생된 아리따운 여주인공이 억울하다며 호소하는데야 마음이 동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는가.

서두에서도 거창하게 털어 놓았듯이 이 책의 본질은 페미니즘 소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소설로 보기에는 허점 또한 많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비꼼이 나타나지만, 독자적으로 여성 자신의 주체성을 개선시키는 과정에 대한 문제의식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미미는 자신이 통렬하게 비판을 가하는 007의 뒤를 고스란히 밟는 것으로 자아를 성취했다고 믿는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식의 오기에서 비롯된 복수극을 남성의 그늘에서 벗어난 미미의 진정한 자아찾기의 과정으로 보아주기는 힘들다.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면 남자와 동등해지려고 하기보다 남성과는 차별화되는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주체성을 발견해 나가는 노력이 두드러져야 할 것이다. 차라리 미미가 언니의 갈비집에서 열심히 일한 끝에 갈비굽기의 달인이 되어 보란듯이 성공했다고 하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007의 그림자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미미의 선택은 이래저래 아쉽다.  

쉽게 읽히는 것에 비하면 큰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는 점도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첩보물이라는 소재 자체가 나에게는 크게 흥미를 끌만한 것이 아닐 뿐더러, 한국적이지 않은 소설 속 세계와 정서가 나와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반전이라는 것도 독자의 허를 제대로 찌르지 못할 바에야 없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결국 발상의 기발함과 스토리텔링의 신선함을 제외하면 남는 게 없다는 이야기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발상의 기발함이야말로 우리 문학에 있어서 더없이 귀중한 재산이다. 무겁고 겉멋만 잔뜩 부린다고 결코 좋은 소설이 될 수는 없다. 평범한 일상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깃거리는 거의 다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당에, 매우 독창적인 소재가 등장하면 괜히 반갑다. 소설이 이렇게도 쓰여질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성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혼녘 백합의 뼈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와의 첫 대면을 위한 작품으로 <황혼녘 백합의 뼈>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미즈노 리세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미즈노 리세는 다른 소설에서 이미 활약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황혼녁 백합의 뼈>는 전작과 그 어떤 긴밀한 연관을 가질 것 같지 않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하나의 이야기이다. 연작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좋은 특정 장면이나 상징성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혼녘 백합의 뼈>는 분명히 하나의 독립적인 플롯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시리즈라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007 시리즈의 최신작을 본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볼 수 있다.

소설은 미즈노 리세라는 신비한 분위기를 지닌 여고생이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백합장이라는 낡은 저택에 머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백합향이 불쾌할 정도로 이상하게 코를 찌르고, 주위의 동물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가는 백합장은 주위 사람들이 '마녀의 집'이라 부를 정도로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곳에 사는 인물들 또한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스테리하다. 그들은 모두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가면 속에 어떤 진의를 감추고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모를 미궁속에서 할머니가 남긴 주피터의 정체와 불길한 사건들의 주모자를 탐색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소설은 선과 악, 미와 추의 경계를 미묘하게 허물어 버리고 있다. 이야기는 서정적으로 흘러가는 듯 싶다가 한순간 잔혹함을 드러낸다. 서구적인 저택 주변에서 풍기는 백합향은 도가 지나쳐 불쾌감을 자아내고 을씨년스러운 저택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요정의 존재가 신비하게 감추어져 있다. 그런가하면 인물들의 아름답고 고상한 모습 뒤에는 헛된 욕망과 잔혹한 본성이 감추어져 있다. 아름다움을 추함으로 선량함을 악랄함으로 순식간에 전복시키는 번뜩이는 기교는 감탄할 만하다. 작가는 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황혼녘 백합의 뼈>는 추리소설치고는 무척 풍부한 감성을 담고 있다. 일본의 현대소설이 감성에 지나치게 호소하는 경향이 있어 가볍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감성적이면서 서스펜스를 가미하여 다분히 소녀적 취향의 독서물의 경계를 가볍게 벗어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양한 복선들과 깜짝 놀래키는 반전의 묘미도 있다. 뒤통수를 치는 듯한 놀라운 반전은 그동안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이 책의 반전이라는 것은 크게 놀라운 것이 아닐지는 모른다. 그러나 충분히 허를 찌르는 구석이 있다. 또 그 반전의 내용이 아니더라도 이야기를 서스펜스의 극한까지 몰고가는 작가의 구성력은 뛰어나다.

그러나 온다 리쿠의 지배적인 특징은 서스펜스나 예상치 못한 반전, 섬세한 필치같은 것에 있지 않다. 두뇌에 호소하는 긴박한 추리물을 잘 쓰는 작가라면 널려 있다. 소녀의 섬세한 감성과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을 잘 묘사한 소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온다 리쿠의 소설에는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는 이 한 편의 소설만으로도 충분히 감지된다. 서정적이면서 잔혹한 느낌의 제목과 안개 속과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 묘하지만 매력적인 인물들이 온다 리쿠만의 특별한 색깔을 이루고 있다. 인상적인 일러스트도 소설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한몫한다. 뛰어난 가독성이 대부분 일본 소설의 장점이라면 독서 후 감상이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일 것이다. 그러나 온다 리쿠는 그 독특한 분위기로 인해 쉽게 읽히고 쉽게 잊히는 다른 일본소설과는 달리 제법 오랫동안 인상에 남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80년대생 작가 김애란은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고루고루 환영받는 작가치고는 아주 젊은 축에 속한다. 장편 소설 한 권 발표하지 못한 작가가 이처럼 인기를 얻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 김애란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이 바로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이다. <달려라, 아비>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들이 대부분 2004~5년 사이 발표된 것이니 소설을 쓸 당시 작가는 겨우 이십 대 중반에 접어들 때이다. 그럼에도 소설 속에서 세상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몹시 날카롭고 주제 형상화 방법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은 내공이 느껴진다. 까놓고 얘기해서 열 권 남짓한 창작집을 낸 중견작가의 최근작보다도 더 느낌이 좋다. 같은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데서 오는 동질감일 수도 있지만, 김애란은 세대론으로 규정짓기에는 제법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 20대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한국 사회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달려라, 아비>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의 비루한 일상에서 출발한다. 최고도 최악도 아닌 평범한 인생을 살아 왔으나, 가장 왕성한 활동이 필요한 시기에 사회의 암초에 걸려버린 채 정지되어 버린 삶. 오늘날 이십대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다.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인물의 삶은 하나같이 비루하지만 지나치게 과장되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범속하지도 않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투영되어 있기는 하나 이를 정면으로 문제삼지도 않는다. 다만 사소한 일상에서 포착해 내는 삶의 진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인물들은 별 볼일 없는 일상을 꾸려나간다. 작가는 이들의 일상을 마치 체험에서 우러난 것처럼 핍진하게 묘사한다. 이들이 사는 곳은 서울 한 귀퉁이의 자취방인 경우가 많다. 그 자취방은 반지하이거나 옥탑방, 때로는 1.5층이라는 비정상적인 공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방들은 좁고 음습할 뿐 아니라 더러는 균열이 생겨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작가는 이런 비루한 생활 환경을 장판 위의 흠집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바닥까지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달려라, 아비>라는 표제작을 비롯하여, 이 소설집 속에는 아버지의 존재가 여러 차례 변주되어 나타난다. 대부분의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전통적인 권위와 무게를 내려 놓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피임약을 사기 위한 목적으로 밤거리를 질주한다든가, 딸의 자취방에 기식하면서 줄창 티비를 틀어 놓아 딸의 숙면을 방해해한다든가, 복어를 먹고 잠을 자면 죽는다는 식의 황당한 거짓말을 태연하게 늘어놓는 식이다. 주말 저녁에 방영되는 홈드라마의 보수적인 아버지의 모습이기보다 시트콤의 우스꽝스럽고 무능력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어 시종 가벼운 웃음을 자아낸다.  

이 같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에서 반복되는 화두가 나타나지만, 작품마다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보인다. 아프고 아련한 이야기를 짐짓 유쾌하게 풀어내려간 <달려라, 아비>, <스카이 콩콩>, 현대인의 익명성과 비정함을 잘 드러내는 <나는 편의점에 간다>, <노크하지 않는 집>, 섬세한 심리묘사가 압권인 <그녀가 잠 못드는 이유가 있다>, <영원한 화자> 등 어느 작품 하나 버릴 게 없는 책이다. 특히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기발하고 톡톡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이며 환상에 젖게 한다.

김애란의 소설 속에서는 평범한 일상도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 별볼일 없는 생활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발견해내는 힘, 이것이 젊은 작가가 세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