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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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소설가란 우선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이 탁월해야 한다. 글을 매끄럽게 쓰고,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것은 다음 일이다. 서사문학의 본질은 다름 아닌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기호가 이 방면에 있어 누구보다 뛰어난 소설가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까지 두 편의 소설집을 출간한 그의 소설들은 (비록 단편 뿐이지만) 역동적이다.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은 생생한 소설 속 세계는 독자들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단편은 한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의무적으로 읽게 되는 경향이 강한데, 이기호의 소설은 비록 단편 뿐이지만 소설 읽는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이기호의 첫 번 째 소설집이다. 작가의 등단작품 '버니'를 비롯해 개성있는 단편 8편이 실려 있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하자 있는 인물들이다. 고교 중퇴자, 앵벌이, 본드중독자, 광신론자 등. 각기 다른 의미에서 비루한 삶의 언저리에 존재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어수룩해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무수한 이야깃거리가 나온다. 이기호의 소설에는 수많은 '이시봉'들(최순덕이여도 좋고, 황순녀여도 상관없다)의 어수룩함이 빚어낸 우여곡절들이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절실하게 펼쳐진다.

작가의 상상력의 원천은 매우 다양하다. 티비 특종프로에서 다루어졌을 법한 뒤로 걷는 사나이, 뉴스에서 집중 보도되었을 보도방, 본드흡입, 앵벌이 문제, 이제는 아물어져가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까지 이야깃거리를 찾아 낸다. 거기에다 그 소재들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독특하게 비틀고 다듬어 낸다. 때로는 기발한 판타지로, 때로는 우매한자가 벌이는 한 편의 촌극으로, 때로는 아이러니한 블랙코미디로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이기호는 소설작법에 있어 하나의 방식만을 맹렬하게 고집하지 않는다. 소설 한 편을 전부 랩의 가사로 채우는가 하면(버니), 피의자 조서형식으로 꾸미기도 하고(햄릿 포에버), 성경의 의고체 어투를 흉내내어 쓰기도 한다(최순덕 성령충만기). 단지 형식적 실험을 위해서만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에서 이러한 형식의 파괴는 작품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관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랩의 가사를 흉내낸 것은 작품 속 인물 버니가 랩밖에는 할 줄 모르는 백치여서이고, 피의자 조서형식으로 꾸며낸 것은 작품의 주인공이 실제로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또 성경의 어투를 흉내낸 것은 주인공이 광신도인 것과 관계가 있다. 이밖에도 이러한 형식적 파괴를 통해서 얻는 효과는 적지 않다. '버니'의 경우 랩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어서인지 활자에 리듬감이 부여되어 청각적인 효과를 거둔다. 성경을 흉내내어 의도적으로 다단편집을 해 놓은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문자가 지시하는 의미 뿐 아니라, 문자의 배열 상태에 따른 시각적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 작가의 이러한 시도는 다음 소설집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에서도 꾸준히 이어진다. 이야기 자체 뿐 아니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를 포함해) 이야기를 이루는 모든 것이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기호의 소설을 기존의 소설 형식에 반기를 드는 말장난으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소설들은 낯선 형식 속에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이기호의 소설은 붓가는대로 끄적인 듯 하지만 한 편을 읽고나면 묘하게 질서정연함이 느껴진다. 마구잡이로 확산되는 상상의 나래가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고 결국은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되돌아 오는 느낌을 준다. 표제작인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광신론자 최순덕의 일대기를 성자의 삶에 빗대어 서술하고 있지만, 읽는 이를 숙연하게 만드는 성인의 전기와는 반대로 인물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버니'와 '햄릿 포에버', '옆에서 보는 저 고백은' 등에서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한 인물들을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적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백미러 사나이', '간첩이 다녀가셨다',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에서는 정치나 권력,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번득이는 기발함, 수준 높은 풍자와 유머가 이기호의 모든 작품을 일관적으로 포용하는 특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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