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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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더빙된 외화나, 번역된 외국 소설을 볼 때면 자연스럽게 새겨지는 그림이 있다. 항상 '하오' 내지는 '해'로 종결되는 권위적인 말투의 남자 주인공과 '해요'로 끝맺는 고분고분한 말투의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아무런 부당함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남성우월의 무의식 속에 얼마나 뿌리 깊게 젖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 이미 여성인권 신장과 사회적 인식의 개선이 발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에 남성우월주의에 타격을 가하는 일은 더 이상 혁신적인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노출된 대중문화 속에서 조차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불공정함이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을 아는지?  

오현종은 대중문화 속에서 그동한 누구도 발견해내지 못했던 불공정함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당당히 항의하고 있다.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첩보영화의 대명사가 된 007시리즈를 경쾌하게 뒤엎는 소설이다. 말하자면 007 영화 속 본드걸의 후일담에 대한  것인데, 영웅적이며 거침없는 007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다가 다음 시리즈에서는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장신구같은 존재인 본드걸들 중 하나를 말한다. 이쯤되면 짐작할 수 있듯이 소설은 007의 마초같은 본성과 그가 걸치는 새로 산 셔츠나 다름없는 본드걸의 위상에 대해 열렬히 항의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의 무의식 속에 뿌리내린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이다.

이 소설은 주제와 형식을 포함한 다양한 부분에서 작가의 참신한 시도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남성우월주의의 산물인 액션스파이영화를 통해 억압된 여성성을 발굴해내는 시도는 참신하다. 게다가 작품 아래 깔려있는 작가의 날카로운 비판과 무관하게 소설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가볍고 경쾌하다. 액션영화처럼 빠른 전개, 전형적이지만 조금씩 뒤틀린 인물들, 솔직담백한 고백투의 어조 까지. 특히 톡톡 튀는 구어체는 가독성을 높이고 주제를 부각시킨다. 소설 속 화자인 미미는 독자에게 조곤조곤 말을 걸듯이 자신의 모험담을 독자를 향해 털어 놓는데, 이로 인해 독자는 미미의 시각과 미미의 입장에서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미미의 편에 서서 007을 비난할 수 있게 된다. 남성우월주의에 의해 희생된 아리따운 여주인공이 억울하다며 호소하는데야 마음이 동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는가.

서두에서도 거창하게 털어 놓았듯이 이 책의 본질은 페미니즘 소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소설로 보기에는 허점 또한 많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비꼼이 나타나지만, 독자적으로 여성 자신의 주체성을 개선시키는 과정에 대한 문제의식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미미는 자신이 통렬하게 비판을 가하는 007의 뒤를 고스란히 밟는 것으로 자아를 성취했다고 믿는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식의 오기에서 비롯된 복수극을 남성의 그늘에서 벗어난 미미의 진정한 자아찾기의 과정으로 보아주기는 힘들다.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면 남자와 동등해지려고 하기보다 남성과는 차별화되는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주체성을 발견해 나가는 노력이 두드러져야 할 것이다. 차라리 미미가 언니의 갈비집에서 열심히 일한 끝에 갈비굽기의 달인이 되어 보란듯이 성공했다고 하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007의 그림자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미미의 선택은 이래저래 아쉽다.  

쉽게 읽히는 것에 비하면 큰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는 점도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첩보물이라는 소재 자체가 나에게는 크게 흥미를 끌만한 것이 아닐 뿐더러, 한국적이지 않은 소설 속 세계와 정서가 나와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반전이라는 것도 독자의 허를 제대로 찌르지 못할 바에야 없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결국 발상의 기발함과 스토리텔링의 신선함을 제외하면 남는 게 없다는 이야기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발상의 기발함이야말로 우리 문학에 있어서 더없이 귀중한 재산이다. 무겁고 겉멋만 잔뜩 부린다고 결코 좋은 소설이 될 수는 없다. 평범한 일상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깃거리는 거의 다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당에, 매우 독창적인 소재가 등장하면 괜히 반갑다. 소설이 이렇게도 쓰여질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성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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