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80년대생 작가 김애란은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고루고루 환영받는 작가치고는 아주 젊은 축에 속한다. 장편 소설 한 권 발표하지 못한 작가가 이처럼 인기를 얻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 김애란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이 바로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이다. <달려라, 아비>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들이 대부분 2004~5년 사이 발표된 것이니 소설을 쓸 당시 작가는 겨우 이십 대 중반에 접어들 때이다. 그럼에도 소설 속에서 세상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몹시 날카롭고 주제 형상화 방법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은 내공이 느껴진다. 까놓고 얘기해서 열 권 남짓한 창작집을 낸 중견작가의 최근작보다도 더 느낌이 좋다. 같은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데서 오는 동질감일 수도 있지만, 김애란은 세대론으로 규정짓기에는 제법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 20대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한국 사회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달려라, 아비>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의 비루한 일상에서 출발한다. 최고도 최악도 아닌 평범한 인생을 살아 왔으나, 가장 왕성한 활동이 필요한 시기에 사회의 암초에 걸려버린 채 정지되어 버린 삶. 오늘날 이십대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다.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인물의 삶은 하나같이 비루하지만 지나치게 과장되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범속하지도 않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투영되어 있기는 하나 이를 정면으로 문제삼지도 않는다. 다만 사소한 일상에서 포착해 내는 삶의 진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인물들은 별 볼일 없는 일상을 꾸려나간다. 작가는 이들의 일상을 마치 체험에서 우러난 것처럼 핍진하게 묘사한다. 이들이 사는 곳은 서울 한 귀퉁이의 자취방인 경우가 많다. 그 자취방은 반지하이거나 옥탑방, 때로는 1.5층이라는 비정상적인 공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방들은 좁고 음습할 뿐 아니라 더러는 균열이 생겨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작가는 이런 비루한 생활 환경을 장판 위의 흠집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바닥까지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달려라, 아비>라는 표제작을 비롯하여, 이 소설집 속에는 아버지의 존재가 여러 차례 변주되어 나타난다. 대부분의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전통적인 권위와 무게를 내려 놓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피임약을 사기 위한 목적으로 밤거리를 질주한다든가, 딸의 자취방에 기식하면서 줄창 티비를 틀어 놓아 딸의 숙면을 방해해한다든가, 복어를 먹고 잠을 자면 죽는다는 식의 황당한 거짓말을 태연하게 늘어놓는 식이다. 주말 저녁에 방영되는 홈드라마의 보수적인 아버지의 모습이기보다 시트콤의 우스꽝스럽고 무능력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어 시종 가벼운 웃음을 자아낸다.  

이 같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에서 반복되는 화두가 나타나지만, 작품마다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보인다. 아프고 아련한 이야기를 짐짓 유쾌하게 풀어내려간 <달려라, 아비>, <스카이 콩콩>, 현대인의 익명성과 비정함을 잘 드러내는 <나는 편의점에 간다>, <노크하지 않는 집>, 섬세한 심리묘사가 압권인 <그녀가 잠 못드는 이유가 있다>, <영원한 화자> 등 어느 작품 하나 버릴 게 없는 책이다. 특히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기발하고 톡톡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이며 환상에 젖게 한다.

김애란의 소설 속에서는 평범한 일상도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 별볼일 없는 생활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발견해내는 힘, 이것이 젊은 작가가 세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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