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녘 백합의 뼈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와의 첫 대면을 위한 작품으로 <황혼녘 백합의 뼈>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미즈노 리세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미즈노 리세는 다른 소설에서 이미 활약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황혼녁 백합의 뼈>는 전작과 그 어떤 긴밀한 연관을 가질 것 같지 않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하나의 이야기이다. 연작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좋은 특정 장면이나 상징성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혼녘 백합의 뼈>는 분명히 하나의 독립적인 플롯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시리즈라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007 시리즈의 최신작을 본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볼 수 있다.

소설은 미즈노 리세라는 신비한 분위기를 지닌 여고생이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백합장이라는 낡은 저택에 머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백합향이 불쾌할 정도로 이상하게 코를 찌르고, 주위의 동물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가는 백합장은 주위 사람들이 '마녀의 집'이라 부를 정도로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곳에 사는 인물들 또한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스테리하다. 그들은 모두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가면 속에 어떤 진의를 감추고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모를 미궁속에서 할머니가 남긴 주피터의 정체와 불길한 사건들의 주모자를 탐색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소설은 선과 악, 미와 추의 경계를 미묘하게 허물어 버리고 있다. 이야기는 서정적으로 흘러가는 듯 싶다가 한순간 잔혹함을 드러낸다. 서구적인 저택 주변에서 풍기는 백합향은 도가 지나쳐 불쾌감을 자아내고 을씨년스러운 저택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요정의 존재가 신비하게 감추어져 있다. 그런가하면 인물들의 아름답고 고상한 모습 뒤에는 헛된 욕망과 잔혹한 본성이 감추어져 있다. 아름다움을 추함으로 선량함을 악랄함으로 순식간에 전복시키는 번뜩이는 기교는 감탄할 만하다. 작가는 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황혼녘 백합의 뼈>는 추리소설치고는 무척 풍부한 감성을 담고 있다. 일본의 현대소설이 감성에 지나치게 호소하는 경향이 있어 가볍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감성적이면서 서스펜스를 가미하여 다분히 소녀적 취향의 독서물의 경계를 가볍게 벗어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양한 복선들과 깜짝 놀래키는 반전의 묘미도 있다. 뒤통수를 치는 듯한 놀라운 반전은 그동안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이 책의 반전이라는 것은 크게 놀라운 것이 아닐지는 모른다. 그러나 충분히 허를 찌르는 구석이 있다. 또 그 반전의 내용이 아니더라도 이야기를 서스펜스의 극한까지 몰고가는 작가의 구성력은 뛰어나다.

그러나 온다 리쿠의 지배적인 특징은 서스펜스나 예상치 못한 반전, 섬세한 필치같은 것에 있지 않다. 두뇌에 호소하는 긴박한 추리물을 잘 쓰는 작가라면 널려 있다. 소녀의 섬세한 감성과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을 잘 묘사한 소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온다 리쿠의 소설에는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는 이 한 편의 소설만으로도 충분히 감지된다. 서정적이면서 잔혹한 느낌의 제목과 안개 속과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 묘하지만 매력적인 인물들이 온다 리쿠만의 특별한 색깔을 이루고 있다. 인상적인 일러스트도 소설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한몫한다. 뛰어난 가독성이 대부분 일본 소설의 장점이라면 독서 후 감상이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일 것이다. 그러나 온다 리쿠는 그 독특한 분위기로 인해 쉽게 읽히고 쉽게 잊히는 다른 일본소설과는 달리 제법 오랫동안 인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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