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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얼마 전까지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을 읽은 터였고, SF 소설을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다가 <1984>식 통제 시스템을 여러 SF영화에서 보았기에 그다지 흥미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1984>에 영향을 받은 다양한 작품을 접했기에 오히려 원전에 관심이 희미해진 거죠.
길지 않은 작품의 분량에 혹해서 펼쳐든 <1984>는 뜻밖이었습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만큼 흥미로웠지만 보다 더 어두웠고, <화씨 451>만큼 풍자적이었지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있었으며, 그 어떤 사회과학서적보다 논쟁적이고 정치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쉽게 휘리릭 읽어 치울 만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요약하면 <1984>는 어둡고 풍자적이며 정치적인 미래소설입니다.
<1984>가 그리고 있는 미래사회는 그 유명한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독재 사회입니다. 그냥 주는 대로 먹고, 보여주는 것만 보고, 생각 따위는 하지 말고 그냥 ‘닥치고 있으라!’는 것이 권력을 가진 자의 요구입니다. 이 점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이는 비단 독재자가 군림하는 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통해 오웰이 말한 것처럼 이는 권력을 쥔 자들의 속성이지 독재자만의 특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84>에 등장하는 통제 시스템과 음험한 지배 논리는 권력이 존재하는 어디에나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웰의 끔찍한 통찰력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를 전율케 만듭니다.
<1984>는 총 3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윈스턴이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미래 사회의 이야기는 각 부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로 읽힙니다. 1부는 엄격하게 통제된 전체주의 사회 속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한 남자의 고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부는 이른바 금서인 ‘그 책’을 등장시켜 이 남자의 각성과 행동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고, 3부는 좌절에 관한 씁쓸한 풍자극입니다. 거칠게 재단하면, 1부는 소설이고, 2부는 정치이론서이며, 3부는 고문과 심문을 소재로 한 연극을 보는 듯 합니다. 독자들은 각성-행동-좌절의 과정을 주인공 윈스턴과 함께 고스란히 경험하게 되는데, 그 패배감은 독자를 더욱 몸서리치게 만듭니다.
책을 읽으며 메모를 하거나 열심히 밑줄을 긋는 성실한 독자가 아닙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휘리릭 읽어치울 수 있는 소설을 주로 읽는 터라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1984>를 읽는 동안 비교적 열심히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만큼 오웰의 흥미로운 통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중 하나가 커피와 담배, 설탕에 관한 설정입니다. 빅 브라더는 초콜릿과 커피, 설탕, 담배의 배급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통제합니다. 사람들 역시 그 어떤 것보다 초콜릿과 커피, 설탕, 담배의 품질과 배급량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품질 좋은 커피를 마시고 진짜 설탕을 맛보는 것이 통제에 대한 일탈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기호품은 인간의 생존과 직접 관련이 없죠. 다만 인간의 정신적인 면, 즉 욕망과 관련이 있죠. 섹스 역시 당의 엄격한 통제 아래 이뤄집니다.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욕망을 철저하게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떤 분의 리뷰를 보니 문학동네 판 <1984>의 번역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며 민음사 판 <1984>와 비교하시더군요. 저는 이번에 <1984>를 처음 읽는 지라 여러 판본의 번역본들을 서로 비교할 처지는 못 됩니다. 다만 읽는 내내 <1984>는 번역이 쉽지 않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빅 브라더는 언어를 정신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작품 속에는 ‘신어’라는 새로운 언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문학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심리 묘사와 사회과학서에 버금가는 정치이론이 혼재되어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문학동네 판 <1984>의 고지식한 번역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원문의 뉘앙스가 살아있는 고지식함 말입니다. 작가와 함께 생각할 여유가 느껴지거든요. 아무래도 고전은 천천히 씹어 삼켜야 깊은 맛을 알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