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읽은 모일간지에서 <그랜 토리노>가 미국인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드러난 작품이라는 요지의 칼럼을 읽을 적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못했던 터라 ‘그런가 보다’하고 넘겼지만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하는 터라 마음이 쓰였습니다.
며칠 후 <그랜 토리노>를 봤습니다.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자연스레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되었죠.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작품은 유색인종에 대한 거친 묘사와 욕설로 가득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담은 것일 뿐입니다. 결코 편견이나 악의적으로 비하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인종주의에 대한 편견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면, 똑같은 돈을 내고 영화의 알맹이를 놓친 자신에게도 화가 나야할 겁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백인영감이 옆집 동양인들을 보고 내뱉는 첫 대사는 “쥐새끼같은 것들!”이라는 욕설이고, 침을 찌익~ 내뱉은 걸로 매조지합니다. 확실히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으로 똘똘 뭉친 주인공이죠.
그런데 이런 인물은 동양인 이웃을 만나며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식과 손자들에게 얻을 수 없는 위안과 사랑, 감사를 이민 온 동양인 가족들에게서 느끼는 거죠. 결국 쥐새끼같은 이웃을 위해 갱들과 맞서죠.
동양인 이웃을 괴롭히는 갱들은 백인이 아닙니다. 같은 민족인 동양계 갱이죠. 그러니까 백인영감 아저씨는 제 삼자 일뿐인데 어쩌다가 일에 얽혔고, 이웃에 사는 ‘쥐새끼들’에 대한 호의로 갱들을 혼내주죠.
문제는 그가 끼어들어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일이 더욱 심각해졌다는 겁니다. 화가 난 갱들은 이웃집 가족에게 끔찍하게 보복을 했으니까요. 이에 주인공인 백인영감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평생 자신을 지켜온 신념이 흔들린 거죠. 자기가 과시한 힘이 부메랑처럼 날아들어 자기가 보호하려던 사람들의 가슴에 꽂혔으니까요.
그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다른 나라 전쟁에 뛰어들었고 서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것은 국가인 미국을 위한 길이었고, 민주주의를 위한 길이었으며, 지금까지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미국은 그럴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도리어 그 힘은 그에게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번에도 말이죠.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뼈아프게 인정합니다. 결국 백인영감은 자기가 벌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갱들과 맞서기로 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총을 놓고 참회와 희생이 무기입니다. 더티 하리가 틀렸고, 간디가 옳았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죠.
영화가 끝날 즈음 관객들은 동양인 이웃을 구한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백인영감이 ‘쥐새끼들’덕분에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참회하고 구원을 얻죠. 이런 통렬한 반성이 엿보이는 작품에서 백인우월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눈감고 영화를 본거 마찬가지입니다.
보수적인 백인영감으로 그려진 주인공이 '코왈스키'라는 성을 가진 폴란드계 이민계 출신이라는 설정도 의도적입니다. 아시다시피 폴란드인은 유대인 못지않게 미국 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민족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는 이탈리아계, 인도계, 흑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중에는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나약한 사람, 현명한 사람, 용감한 사람이 뒤섞여 있습니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렇잖아요. 여기에 순수 앵글로색슨계의 백인만 쏙 빠졌다고 인종주의 어쩌구 시비를 거나요?
코왈스키 영감이 도와주는 동양계 이웃이 일본인이나, 한국인, 중국인이 아닌 아시아의 소수민족인 몽족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중국, 베트남, 태국 등지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으로 특별히 국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코왈스키 영감이 “미국에는 왜 왔냐?”라고 묻자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을 지지했다고 살던 곳에서 쫓겨났다. 그때 당신들이 선교사가 우리를 데리고 왔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원해서 미국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보수적인 미국인 폴란드계 백인영감 코왈스키가 남긴 '위대한 유산'인 그랜 토리노 72년식을 타고 질주하는 것은 백인 아들이나 손자가 아닙니다. 이제 이웃이 되어버린 이민계 미국인인 몽족 젊은이입니다. 편견이 담겨있지도 않고, 아이러니하지도 않고, 진보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현실을 직시하고 있은 태도일 뿐입니다. 이 젊은이는 누가 뭐래도 미국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