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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 1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재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황새>는 나무랄 데 없는 미스터리 모험소설입니다. 독특한 소재, 군더더기 없는 사건 전개, 사실감 넘치는 묘사는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작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작가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와 프레드릭 포사이스는 비슷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뛰어난 현장파 저널리스트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두 작가는 직접 보고 들은 생생한 정보들을 작품 속에 녹여내어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는 자칫 얄팍한 이야기의 유희로 그칠 수 있는 장르소설의 한계를 극복하는 역할을 합니다. 상상력 못지않게 탁월한 자산이죠.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작가로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데뷔를 했다는 거죠. <자칼의 날>이나 <황새>는 처녀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련미가 넘치는 작품입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다른 작품들이 처녀작인 <황새>보다 뛰어나다면 장르소설 팬으로서 대단히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황새>에서 작가가 보여준 역량은 대단합니다.
독자는 작품의 소재인 황새의 이동 경로를 따라 유럽과 극동지역, 중앙아프리카를 함께 여행하게 됩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나라만 해도 프랑스, 스위스, 불가리아, 터키, 이스라엘, 중앙아시아, 인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범세계적입니다. 마치 전 세계를 누비며 활약하는 스파이 소설을 보는 듯한데...... 그러고 보니 <황새>는 스파이 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에릭 앰블러의 <디미트리오스의 관>과 판박이군요! 고전은 본래 작품을 읽을 때보다 이렇게 영향을 받은 작품을 읽을 때 종종 그 존재감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황새>는 매우 익숙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주인공은 의문에 둘러싸인 살인사건을 접하게 되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사건의 이면을 추적하게 됩니다. 늘 그렇듯이 주인공을 위험으로 이끄는 ‘알 수 없는 힘’은 호기심입니다. <디미트리오스의 관>의 주인공도 그러했죠. 하지만 <황새>에는 또 다른 한 가지가 덧붙여집니다. 도망칠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 작품이 어떤 결말로 귀결될지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늘 그렇듯 ‘반전’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책읽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뻔한 결말일지라도 그 결말로 달려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독자로선 현명한 태도입니다. 이 정도만 기대한다면 <황새>는 매우 즐거운 책읽기를 보장합니다. 빠르고 간결한 묘사로 들려주는 주인공의 모험담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합니다. 게다가 때론 으스스하고, 때론 감상적이고 로맨틱하기도 합니다. 유머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고, 몇 차례 과도한 고어(gore) 장면을 너그럽게 받아드릴 수만 있다면 꽤 신나는 모험담을 즐길 수 있습니다.
사족. 지난해 개봉한 영화 <X파일 : 나는 믿고 싶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X파일>의 팬이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6년 만에 찾아온 시리즈의 극장판을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만, 솔직히 멀더와 스컬리, 스키너 부국장을 다시 만난 것 빼고는 한마디로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연쇄살인사건을 둘러싼 설정이 <황새>와 너무나 흡사해요. <황새>의 결말을 쉽게 파악한 것은 순전히 영화 <X파일>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감독이자 각본가 크리스 카터가 <황새>에서 아이디어를 도용하지 않았을까?하는 공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