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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더링
앤 엔라이트 지음, 민승남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앤 엔라이트의 <개더링>을 읽는 동안 너무나 자주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는 동안 얼마나 힘겨워 했을까?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듯 위태로운 삶을 간신히 지탱하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정말이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끔찍해!
그렇다고 이 소설이 독자들로 하여금 매양 버겁고 고통스러운 책읽기를 강요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품의 흐름에 일정부분 동화되기만 한다면 술술 읽히는 쪽에 가깝습니다.
<개더링>의 내용을 요약하기란 어렵기도 하고, 의외로 간단하기도 합니다. 먼저 간단하게 요약하면, 주인공 베로니카는 두 딸과 남편을 둔 평범한 주부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살 터울인 오빠 리엄이 자살을 하게 되죠. 이 사건으로 베로니카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빠의 죽음 이후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아요. 다만 베로니카는 오빠에 관한 기억을 끄집어내며 괴로워하고, 자책하고, 슬퍼하며 장례식을 치르죠. 단지 그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도드라지는 이야기나 사건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의 내용을 요약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리엄을 위한 장례식을 준비하며 주인공 베로니카는 이런 저런 수많은 기억들을 끄집어냅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모두 그녀의 추측이거나 상상이거나 혹은 엉뚱하게 재구성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기억이란 것이 늘 그렇잖아요. 분명한 것은 하나 뿐입니다. 베로니카는 그 누구보다 리엄을 사랑했으며 리엄의 죽음으로 애써 견디어 온 마음의 상처가 속살을 드러내며 벌어졌다는 겁니다. 베로니카는 정말로 많이 아파합니다.
<개더링>에는 두 가지 풍경이 존재합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기억하는 과거의 풍경과 상처받은 사람의 눈에 비친 현재의 풍경입니다. 과거의 풍경은 베로니카의 내면에 자리한 삶의 흔적이고, 현재의 풍경은 상처받은 자가 읽어내는 고통스러운 현재입니다. 베로니카의 안과 밖의 풍경이죠.
개인적으로 상처받은 베로니카의 눈에 비친 현재에 대한 묘사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는 집요할 정도로 예민하고 위태로운 시선으로 평범한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슬픔과 공허함을 찾아냅니다. 단 한순간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개더링>은 주인공(혹은 작가)의 불안하고 뒤틀린 자의식으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불쾌하거나 거북살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시적 묘사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문장이 한 몫 했겠지요. 그렇지만 무엇보다 자신에게 상처를 안겨준 세상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베로니카는 상처와 고통만을 안겨준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때로는 이죽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숨길 수 없는 따스함이 드러납니다. 그 순간은 베로니카가 두 딸에 대한 사랑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베로니카가 뒤틀림과 냉소의 틈바구니에서 따뜻함을 잃지 않는 이유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베로니카는 어쨌든 살기로 결심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작품을 읽는 것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