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미트리오스의 관>을 일반적인 관점의 스파이 소설로 보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피카레스크 소설(악한 소설)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 작품에는 곳곳에 스파이 소설의 요소가 내재되어있습니다. 주인공인 디미트리오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스파이처럼 여러 개의 신분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국가기밀을 빼내거나 국가 원수를 암살하는 계획에 관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사업의 일환일 뿐입니다. 치졸하고 가증스러운 악당 디미트리오스는 이런 저런 일에 가담하면서 유럽 전역에 악명을 떨칩니다. 이 작품은 이런 파란만장한 이력을 남긴 악당의 행적을 쫓는 추리소설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듯 그 와중에 불세출의 악당 디미트리오스의 숨은 비밀이 하나 둘 드러나죠. 먼저 일러두자면 <디미트리오스의 관>에는 치밀하게 전개되는 두뇌싸움은 없습니다. 스파이 세계의 비정함도 없고, 긴박감 넘치는 추격전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파이 소설과는 확실히 다르죠. 이걸 원한다면 좀더 후대에 발표된 본격 스파이 소설이 어울릴 겁니다.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현대 스파이 소설의 원류를 더듬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1900년대 초 유럽의 역사적 상황과 사회상을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말랑말랑한 장르를 통해 엿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에릭 앰블러가 비록 미스터리 스파이 소설로 이름을 남겼지만 매우 지적이며 사회적 역사적인 관심이 뚜렷한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라티머처럼 말입니다.(라티머는 미스터리 소설 작가이지만 동시에 경제학을 연구하던 박사로 등장합니다.) 1차 세계 대전 전후로 유럽의 각국은 저마다 정치적 사회적 질곡을 겪습니다. 난세에 영웅이 등장한다는 말이 있죠? 그런데 난세에는 영웅뿐만 아니라 악당들도 대거 출몰합니다. 혼란을 틈타 한 몫 단단히 잡으려는 간악한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권력이든 돈이든 말이에요. 작품의 주인공 디미트리오스는 이런 부류의 악당입니다. 앰블러는 디미트리오스의 활약상(?)을 묘사하며 당시 유럽 사회가 겪었던 역사적 비극과 혼란을 요령껏 드러내고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유럽 역사에 대한 문외한이지만, 앰블러가 그린 사회상은 단순한 픽션이 아닌 역사적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중심으로 벌어진 비극의 뿌리는 참으로 길고 오래된 것이더군요.) 거꾸로, 20세기 초 유럽의 역사적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독자라면 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미스터리 소설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