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 Mystery Best 2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최운권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환상의 여인>이 동시대에 출간된 장르소설 중 단연 돋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뛰어난 플롯과 작품에서 묻어나는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몽환적 분위기란 문학적 향기를 이야기하는데, 추리 소설의 황금기였던 그 시대에 윌리엄 아이리시만큼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한 작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솔직히 당대를 주름잡던 유명 추리작가들은 앞서 이야기한 문학적 향기에는 큰 관심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장르 소설에 어울리는 기발한 플롯과 완전 범죄를 둘러싼 아이디어에서만 심혈을 기울였을 테니까요. 

<환상의 여인>의 핵심 아이디어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흥미가 전혀 반감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줄 수 있는 여인이 한 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행적은 유령처럼 모호하기만 합니다. 과연 그녀는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일까요? 혹시 주인공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여인이 아닐까요? 사형집행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어느 날, 주인공의 무죄를 입증해줄 ‘환상의 여인’을 찾기 위해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가 나섭니다.

아이디어만 놓고 봐도 <환상의 여인>은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게다가 인상적인 반전까지 작품 말미에 포진되어있죠. 결국 딴 생각 없이 사건 전개만 줄줄 쫓아가도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추리소설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작품을 읽는데 무려 한달 여나 걸렸으니까요.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아무리 펄프픽션용 장르 소설을 쓴다고 해도 자기 본성을 버리기 힘드나봅니다. 순문학을 전공했다는 작가의 우아하고 고상한 천성이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나더군요. 인물의 심리를 장황하다싶을 정도로 길고 꼼꼼하게 묘사하는 한편, 인물들을 둘러싼 분위기도 매우 극적입니다. <환상의 여인>은 대략 20여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장은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각 장에서 나름의 극적 상승과 하강이 뚜렷하게 엿보입니다. 그러니까 첫 장부터 마지막 장 모두 작가의 지울 수 없는 문학적 고상함과 완벽주의자로서의 ‘피곤함’이 엿보입니다.

작가의 이런 태도는 독자들에게는 축복이겠죠. 책장을 덮는 순간 플롯과 아이디어만 머리 속에 남는 작품들과 달리 곰곰이 뜯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일 테니까요. 그런데 종종 이런 작품이 좋지 못한 번역으로 소개되었을 때 비극이 시작됩니다. 문학적 향기가 강하다보니 당연히 번역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순수 문학과 달리 장르 문학은 번역에 신경을 덜 쓰는 경향이 있잖아요. <환상의 여인>이 이런 경우였고, 읽는 내내 여간 고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냄에서 펴낸 <환상의 여인>의 문장 하나하나를 읽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우리말임에는 분명한데 이상하게 그 뜻이 쉬 머리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사뿐히 문장을 훑으며 읽어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른바 ‘사선으로 눈을 움직이며’ 읽는 것이 불가능한 작품이란 건 이 작품의 첫 장만 읽어도 분명히 알 수 있었으니까요. 하마터면 이 좋은 작품을 도중에 포기할 뻔했습니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서 맛본 좌절이 떠올랐습니다. 동시에 이 작품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처럼 모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선정되어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출간되는 행운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원어로 된 원작을 읽어볼 능력이 없기에 아쉬움이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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