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알라딘에는 <침대와 책>이 없나보다.  검색이 되지 않는다.  엉뚱한 책들만 올라와서 할수없이 정혜윤의 책 아무거나 선택해서 서평제목으로 삼는다.

 

 

침대와 책
정혜윤
웅진지식하우스 / 237

 


나는 침대에서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러나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수사에 끌렸다.
정혜윤이라는 이름은 독자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나보다. 

그만큼 내 책읽기의 스펙트럼이 얇거나 독서분량 자체가 태부족한 때문이기도 한

것이겠지.  그래서 올 초에 정혜윤의 책 두권을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책

<침대와 책>을  손에 든지 얼마 안되어  후회가 한가득 몰려왔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건지.


이제까지 읽어왔던 책과는 너무나 확연히 다른 문체,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화법,

구어체와 문어체가 뒤섞이고 주체와 객체가 불분명한 서술. 그랬다. 이 책은 머리로 읽는

책이 아니었다. 가슴으로 읽어야하는 책이었다. 되도록 천천히, 커피를 마시든 침대에

눕든 글귀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인용된 문장을 머릿속에 상상하면서 저자와 대화하듯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은 작가와 주변세상의 관계에 대한 문학적 풀이로서의

미셀러니?


문학을 가까이했던 때가 언제던가. 10대후반에서 20대 초반. 그리고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더 멀어져간 문학. 이 책은 개인 신상수필에 가깝지만 정혜윤의 문학적 소양은 소설가나 평론가라 해도 따라잡기 힘들만큼 대단하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순간순간에

섬세한 관찰력과 심상으로 문득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맞춰 수없이 인용하는 작가와

작품들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인간이 컴퓨터란 말인가.


그런데 왜 나는 이 책이 이해가 안되고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지를 못하는걸까.
내가 이토록 문학외적인 인간이었나. 그렇게 상상력이 없었나. 섬세하게 세상을 관찰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가. 그런데 왜 저자는 유명하고 그의 책들은 베스트셀러란 말인가.

자조했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음이 틀림없다. 소통이 안되거나 독선에 빠지거나  나 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중인가보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문학이란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인데 인간보다는 우주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인지.   
아님 마음이 상당히 메말라있던지...


이 정혜윤작가는 문학에 치우친 독서만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니체나 벤야민, 다치바나

다카시 같은 철학자나 평론가의 책들도 인용하고 무엇보다 영화와 팝송도 전문가수준인

듯 했다.  본 영화도 없고 들어본 노래도 없으니...


책날개에 붙은 정혜윤의 자기소개는 이렇다.  “엄마는 나의 검은 피부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갈색 피부를 좋아했으며, 엄마는 나의 헝클어진 머리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부스스한

 머리를 좋아했다. 엄마는 레슬링과 가요와 관광버스를 좋아했으며 나는 레슬링과

관광버스를 싫어했다. 우리는 많은 부분 통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엄마는 내가 책을

읽을때면 항상 자기를 닮아서 애가 이렇게 책을 좋아한다고 칭찬하고 인정해줬다.

칭찬받을 일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 뒤로도 쭉 책읽는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사랑받았다. ......”


책속에는 자신의 명함을 트레이싱지로 만들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다른 명함을 읽을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름과 직책을 적는 대신 꼭 알아줬으면 싶은 내용을 적어넣는

상상을 한다고 써있다. 이를테면, 아마추어 여행작가, 고기요리를 싫어함, 귀를 뚫지

않았음, 스타킹수집가, 증명사진 싫어함, 옆얼굴에 더 자신있음, 자고나서 푸석푸석할 때

가장 예쁨, 출신대학과 직책을 말하는 것을 싫어함, 어쩔수 없다 라는 말을 싫어함, ....

너무 재밌지 않은가.  나 역시 적을게 많아서 명함을 책받침만큼 크게 만들어야 겠다는

상상은 해본적 있지만 이런 유쾌하고 명확한 자기소개 명함은 전혀 생각해본적 없다.

문학적 상상력이다.


책의 맨 마지막 챕터는 베트남여성이 결혼해서 한국에 왔다가 전과6범인 남편에게 맞아서 늑골 18개가 부러져 죽은채 발견됐다는 신문기사에 대한 단상을 쓴 것이다.  내가 여태

읽어온 책들이나 나라면, 이 문제에 대해 원인을 분석하고 대한민국의 현 상황에 분개하고

 마땅히 해야할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데 더욱 분노하거나 대책을 촉구하면서 글을 마무리

할 것이다.  나라면 덧붙여, 죽은 베트남 새댁의 영혼에 슬퍼하고 베트남 사람에 미안해

하고 악을 증오할 것이다.  그러나 정혜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백가흠의 소설을 인용한다.
“백가흠소설속의 하잘것 없고 우스꽝스러운 주인공들이 우리 곁에 온다면 우리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단박에 알게될 것이며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만 사랑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편리한 경향인지 알게될 것이다. 어쩌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란 말을 실천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은 그 이웃이 좀 떨어져있을

때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그녀는 시 몇편을 인용하고 조용히 글을 마무리한다.


정혜윤은 정혜윤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한다.  육중한 이미지나 이마에 내 천

자를 그린 표정도 아니다. 그럴필요도 없다.  어차피 세상에 자기는 한 명뿐이니까.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잘 읽어나가지 못한 것도 작가나 다른 독자완 상관없는 일이다.

침대에서 책을 읽지 않아도 이책을 재미있게 볼수 있고 침대에서 책을 읽어도 공감을

못할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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