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
조안나 지음 / 지금이책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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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후 우울증으로 너무 힘들었다. 너무 외로웠던 그 때 '엄마의 꿈방'이라는 카페에서 글쓰기를 했다. 그 곳에서 내게 글쓰기는 글을 쓰기보다 내 마음을 표출하는 자리였다. 글쓰기라지만 남편 욕을 해대는 자리였고 그런 나를 공감해주는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그 때부터였다. 아.. 글을 쓰고 공감을 받는다는 것으로도 이렇게 큰 힘이 있구나..

글쓰기의 힘을 알고부터 많은 글쓰기 책을 읽었다. 모든 책의 글쓰기는 한 가지를 말했다. "매일 써라." "매일 읽어라." 특히 매일 쓰라는 조언은 글쓰기의 진리였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책은 어떻게든 읽겠는데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회사와 육아 이 도돌이표 삶 속에서 특별할 게 없는데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막막했다. 모니터의 흰 화면에서 쓸 소재는 찾기 어려웠고 그 두려움과 부담감에 글쓰기는 내게 멀어졌다.

《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 또한 글쓰기를 적극 권장하는 책이다. 《월요일의 문장들》의 저자로 유명한 조안나씨가 글쓰기의 힘에 대해 쓴 글쓰기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방법을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저자의 그녀 (딸을 '그녀'라고 말한다.) 이야기, 미국 생활, 읽은 책 이야기, 도둑 맞은 이야기 등 주변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글쓰기란 바로 테크닉이 아닌 우리 일상의 일을 기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해주는 책이다.


현재 나에게 좋은 주제는 가까이에 있는 것이고

나쁜 주제는 멀리 있는 것이다.


나는 욕심이 많다. 시간이 없지만 영어 공부도 하고 싶고 책도 읽고 싶다. 운동도 하고 싶다. 하지만 아이를 재운 후 시간은 밤 11시 .. 항상 시간이 고프다. 저자 또한 한 아이의 엄마로 자신의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을 낼 수 없음을 호소한다. 글도 쓰고 요가도 하고 싶지만 모든 걸 다 할 수 없어 안타까운 내 마음을 같은 엄마로서 저자는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 바쁨을 알기에 저자가 내린 처방은 단순하다. 단 3문장부터 매일 쓰라는 것. 처음부터 큰 욕심을 부리기 보다 매일 3문장을 들여 습관을 가지도록 실질적인 조언을 해 준다.

매일 일기를 쓰라는 충고는 이제 식상하다.

그저 매일 세 문장씩 자신의 기분 변화나

일상을 적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글쓰기의 기교가 아닌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책이다. 기교나 방법이 아닌 내 주변의 일상부터 바라보고 쓸 수 있도록 격려해준다. 아마 다른 책처럼 많이 쓰라고 한다면 나는 이미 내 머리 속에 변명했으리라. "쓰고 싶다고요. 하지만 난 쓸 거리가 없다고요!" 라고 외쳤을 것이다. 저자는 바로 우리 일상에서 시작하고 세 문장에서 점차 늘려가 완성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내게 글쓰기란 전혀 어렵지 않음을 가르쳐준다.

그렇다. 《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는 바로 글쓰기란 누구나 할 수 있음을 저자의 일상을 통해 말해주는 책이다.

하지만 결국 글쓰기의 진리란 많이 쓰는 방법 이외 다른 길이 없음을 알고 있다. 저자는 시작하는 방법을 안내해 주는 동시에 열심히 쓰기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다.


"저는 그럴 시간이 없는데요"

라는 핑계를 대기 좋은 분야라고...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마다 24시간 동안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 이야기를 쉽게 허공에 날려버린다.


《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을 읽은 후 나의 일상이 하나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단조로운 내 일상이 관찰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시시한 이야기도 마음껏 쓰라는 저자의 글에 용기를 받는다. "이까짓 것, 나도 한 번 써 볼까?"라는 객기를 부려본다.

다양한 저자의 글쓰기 책을 읽었지만 저자의 일상만으로 글쓰기를 말해주는 이 책이 너무 고맙다. 저자가 아기 엄마여서 더 고맙고 바쁜 일상 속에서 소재를 가져오고 하얀 백지를 채워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 너무 고맙다. 글쓰기가 멈춰있는 내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준다. 글쓰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처럼 소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좋은 글쓰기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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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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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읽게 될 때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많다. 녹록지 않은 삶의 무게가 느껴져서 몇 번씩 숨을 고르고 읽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청소부 매뉴얼》은 세 번의 이혼과 네 아들의 싱글맘, 알코올중독자, 청소부, 병동 사무원 등등 이력을 대충 읽는다 해도 결코 만만치 않은 삶이였음을 짐작케 하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루시아 벌린의 첫 소설집이다.

루시아 벌린은 사후 11년이 지나서야 작품이 빛을 발했는데 작가의 경우 생활을 책임지고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기에 단편 소설 위주로 글을 쓸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저자가 평생 쓴 76편의 작품 중 43편이 수록된 《청소부 매뉴얼》은 청소부로서 지켜야 할 여러 규칙들과 함께 일어나는 여러 에피소드와 함께 자신의 낙태 경험 그리고 싱글맘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고됨을 작품 속에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표제작인 《청소부 매뉴얼》의 경우 저자의 청소부의 경험담이 상세하게 드러난다. 이 집 저 집을 청소하며 각 집마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행동하며 느끼는 삶의 모습, 그리고 그 삶 속에서의 고단함이 느껴지지만 작가는 그 속에서 결코 유머를 잊지 않는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부자들은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절대로 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차를 타고 지나다니면서

늘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본다.

가난한 사람들은 많이 기다린다.

사회보장연금 수령, 실직수당 신청, 빨래방,

공중전화, 응급실, 감옥, 기타 등등.


많이 기다려야만 하는 가난한 삶 속에서 심취해 있다가 "그대여, 인생이란 그런 거라오."라는 글 속에 갑자기 웃픈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마냥 슬퍼하지 않게 저자가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글을 쓰면서 생활했던 저자의 생활 속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청소부 매뉴얼》의 미덕이라면 마냥 감상에 취하지 않게끔 담담하게 전개되는 작가의 이야기의 힘에 있다. 단편 <웃음을 보여줘>에서도 사제 지간으로 법정에 서게 되는 연인의 이야기 또한 구속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현실을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병원 사무원으로서의 일이 기록된 단편 <연애 사건>에서도 자신을 이용해 다른 남자와 만남을 갖는 동료 직원 루스의 이야기 또한 바람이 난 루스를 비방하기보다 이 또한 하나의 삶이라는 듯 이야기하는 작가의 글을 보면서 납득하진 못해도 삶의 여러 모습을 보게 되는 듯하다.

모든 단편이 저자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어떤 단편이든 삶에 찌든 인물이 아닌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삶 자체를 포용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위로 아닌 위로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된다면 저자처럼 마치 남인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남에게 공감을 구하는 것보다, 동정을 얻는 것보다 이런 삶도 살 만하다고 말해 주는 듯한 저자의 소설 <청소부 매뉴얼>에 이어 <내 인생은 열린 책>도 출간되었는데 이 후속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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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시작은 아르테 미스터리 9
오리가미 교야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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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을 접할 때마다 놀라운 건 소재의 독특함이다. 한국소설 또한 소재의 범위가 넓어지고 다양함을 추구하고 있지만 일본소설의 독특한 소재는 매번 읽을 때마다 나를 놀라게 한다. 소설 《세계의 끝과 시작은》 또한 다시 한 번 그들의 소재에 다시 한 번 놀란 작품이다.

《세계의 끝과 시작은》은 22회 <기억술사>로 22회 일본 호러소설대상 독자상을 수상한 오리가미 교야의 소설이다. <기억술사>에서는 기억을 지워 가는 이야기였다면 《세계의 끝과 시작은》은 흡혈종과 인간의 이야기를 그린 미스테리 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은 대학생 하나무라 도노가 9년 전에 집 창문에서 본 여자를 잊지 못해 매일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11살의 나이에 집 창문에서 달빛에 비친 여자를 단 한 번만 보았을 뿐인 첫사랑. 이름도 전화번호도 모르는 그 여자를 기억하기 위해 매일 그림을 그린다. 그림 속에 여인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보고 머리의 변화도 주며 언젠가 나타난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상상하며 첫사랑을 간직해간다. 학교에서 도노와 같은 소속인 오컬트 연구부 친구 사쿠와 후배 지나쓰, 그리고 부장인 아야메는 이런 도노를 비웃지 않고 언젠가는 꼭 이루어줄 것을 응원해준다.

오컬트 연구부는 곧 있을 축제에 쓰일 기획을 한참 준비중이며 같은 부원인 도케부치를 찾아가던 중 살인 사건을 알게 되고 그 살인 사건이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닌 연쇄 살인 사건이며 경찰에서 이 사건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의 현장에서 9년 동안 오매불망 그리워한 첫사랑 아카리와 다른 동료 아오이를 만나게 된다.

《세계의 끝과 시작은》은 오컬트 연구부원들과 아카리와 아오이의 협력으로 이 살인 사건을 추적해가면서 점점 사건을 급박하게 전개해간다. 갈수록 빨라지는 연쇄 살인 사건을 흡혈종과 그 흡혈종에게 피를 공급하는 인간 계약자, 그리고 그들이 인간과 서로 공생해가며 살아가는 이 지구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초반 많은 설명으로 이해를 돕는다. 작가의 독특한 흡혈종들의 세계, 흡혈종과 계약하여 피를 공급해주고 흡혈종과 비슷한 능력을 받게 되는 인간 계약자들, 미등록 흡혈증들 등 작가가 창조한 흡혈종의 세계는 매우 놀랍기만 하다.

초반 약간 느슨하게 전개되는 듯한 소설은 절친한 친구 사쿠가 죽임을 당하고 난 후 급반전을 맞게 되고 그 이후 저자는 쉴새없이 사건을 몰아 나간다. 반전과 반전을 이어나가며 마지막 강렬한 한 방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소설은 살인 사건의 긴장감 속에 9년 만의 첫사랑을 놓치지 않으려는 도노의 첫사랑 사수 작전이 함께 어울러져 긴장감을 조절해준다. 누가 흡혈종이고 누가 인간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도 오컬트 연구부 소속의 끈끈한 우정과 첫사랑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이 소설을 끝까지 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의아했던 제목 《세계의 끝과 시작은》이 끝부분에 가서야 과연 이게 어떤 의미인지 헤아릴 수 있게 되며 아찔한 감동을 선사해준다.

다시 한 번 작가가 창조해 내는 세계에 감탄하며 책을 읽었다. 과연 흡혈종과 인간이 공생할 수 있을까?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 열린 결말로 막을 내려 독자의 상상력으로 이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유도한다.

어쩌면 저자는 이 후속 이야기를 쓰기 위해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끝맺음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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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박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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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희》는 12년의 기간 동안 513명의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국가와 기관의 합동 말살 정책인 "형제복지원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이다. 유대인을 청소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내몰았던 나치 정책과 같이 국가는 사회를 깨끗하게 하며 걸인들에게 복지를 조성한다는 목표 아래 거리의 걸인, 깡패, 고아, 술 취한 자를 막론하고 실적을 올리기 위해 어느 누구나 잡아 감금하여 폭행과 구타를 일삼았던 최악의 인권 유린 사건이다. 소설 《은희》는 바르 그 중심에 죽음이 조작된 사건의 주인공 , 강간으로 아이 '준'을 낳고 구타로 목숨을 잃은 은희가 있다.


《은희》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어 부모님을 따라 폴란드에서 살고 있는 청년 '준'이 한 통의 편지를 받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입양 서류와 어머니의 검안서,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된 수사 요약 보고서와 그 중심에 있는 형제의집 사건, 그리고 어머니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학생들과 함께 견학을 올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한 통의 편지로부터 알게 된 자신의 출생의 비밀. 축복 받은 탄생이 아닌 강간에 의해 태어난 자신의 출생 사실은 그에게 더욱 큰 혼란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온다는 박물관을 찾고 그 곳에서 미연을 만나게 된다.

미연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재희를 사고로 잃었다. 남편의 요청으로 재희의 생일에 남편 지훈과 함께 딸이 있는 추모관으로 향한다. 매일 메마른 마음으로 살아가던 미연은 올해도 지훈과 함께 추모관에 가 딸의 죽음을 애도한다. 살아간다는 것보다 버티어 간다는 말이 어울리는 미연은 자신이 외면해 온 형제의 집 감금사건이 준이 자신의 엄마 김은희를 아냐는 질문 앞에 애쓰게 봉인해 온 자신의 불행했던 형제의집을 직면한다.


《은희》는 은희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의 회고와 함께 사건을 재구성해가지만 작가는 사실이 존재했던 과거가 아닌 이 생존자들이 살고 있는 현재에 더 집중한다. 진상규명위원회인 병호는 형제의집 생존자 중 가장 반듯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미연에게 증언해 줄 것을 부탁하며 질문을 던진다.


형제의집에서 나온 사람들, 다 어렵고 불행하게 살아요.

배우지 못했고 괜찮은 직업 가진 사람도 없고요,

매일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죠.

당신을 제외하면요.


병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명문 한국외고 영어교사이자 결혼까지 한 미연이 버젓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미연은 이 형제의집 사건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이 가장 버젓하게 살고 있다던 미연의 삶이 결코 1987년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미연 뿐만 아닌 다른 피해자들 모두 그들의 삶이 형제의집 감금 시절에서 멈춰 있음을 강조한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세월은 그들에게 다른 벌을 주었다.

한 사람에게는 잊어가는 벌은, 또 한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벌을.


형제의집 원장이자 이 사건의 원흉인 방인곤 원장은 치매 질환으로 자신의 과거를 잊어간다. 미연과 다른 인물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고통을 선사했다면 방인곤 원장은 자신의 기억을 지워나가는 축복을 선사받았다. 자신의 악업도, 자신에게 가해진 비난도, 손가락질도 모두 지워지는 걸 저자는 세월이 주는 벌이라고 하지만 이 책에서는 신이 이 죄인 방인곤 원장에게 준 하나의 축복처럼 느껴지며 남겨진 자들의 비참함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제 가해자인 방인곤의 치매 앞에 그에게 지난 잘못을 사죄하라고 외칠 수도 없는 이 현실은 영화 <밀양>을 떠올리게 한다.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은 여주인공에게 살인범은 자신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의 구원을 말하며 평온한 얼굴을 짓는 살인범의 표정 앞에 여주인공은 소리친다. 피해자인 자신이 용서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냐고 외치는 영화 속 모습과 치매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원장의 모습과 과거의 고통으로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미연의 절규의 모습이 겹쳐진다.


인간이 아닌 바퀴벌레보다 못한 취급 속에서 강간에 의한 임신은 결코 상상할 수 없이 비참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점점 중심에 다가갈수록 한 생명을 품고 그 강간의 흔적인 한 생명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아이를 품은 은희를 보여준다. 인간이 인간일 수 없는 곳, 희망도, 왜라는 질문도 없는 곳, 살아남기만을 바라는 곳, 그 곳에서 어린 나이에 성폭행을 당한 흔적을 어떻게 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엄마인 나이지만 은희의 결정은 놀라웠다.

하지만 작가는 은희의 죽음을 통해 그 이유를 말해주는 듯하다. 사랑이 없는,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는 형제의집에서 자신에게 찾아온 아이를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 살아남고자 했던 하나의 몸부림이였음이 느껴졌다. 절망과 원망보다는 끝까지 보호하고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그 의지로 구타 속에서도 아이를 지켜냈고 아이가 입양되는 날까지 젖을 물리며 사랑을 주었다.


이 소설 속에서 자신이 성폭행범에 의해 태어난 존재라는 걸 안 '준'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소설 마지막 끝까지 사랑하기를 선택한 은희의 기억으로 '준'이 예전처럼 마음의 벽을 쌓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양부모님과의 거리나 타인과의 거리가 갑자기 좁혀지지 않겠지만 자신의 존재가 끝까지 희망을 선택한 엄마의 존재라면 준 또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마지막에 살기를 선택한 미연과 같이...


고통스러운 이름 《은희》는 그렇게 고통의 존재에서 희망의 존재로 느껴졌다. 인간임을 잊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처럼 남겨졌다. 그리고 이 형제의집 사건이 피해자들의 시계 단추를 여전히 멈추고 있는 한 이 일이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은희》를 통해 더욱 드러낸다. 소설 속 미연에게 부모님이 다 지나간 거라고, 다 잊을 거라고 말하며 봉인해 버리지만 이 봉인 된 시간 속에 여전히 고통이 진행 중임을 미연과 준의 삶을 통해 작가는 말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쉽게 읽어나갈 수 없었다. 문장마다 이 인물들의 고통과 감정이 물이 스폰지에 흡수되듯 내게도 그들의 고통이 내게 전염되는 듯했다. 이 형제의집 사건의 피해자들의 현재 속에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노고가 문장에서 느껴져 몇 번이나 곱씹듯 천천히 읽어야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고통받는 이 끔찍한 사건들이 더 이상 없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도 음지에서 힘들어 할 많은 은희들에게 나 또한 작가의 마음처럼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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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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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미스터리 소설은 사건 전개와 함께 그 사건을 추적해 간다. 이 추적에서 여러 떡밥을 던져놓고 독자들을 혼란케 한 후 이야기 말미에서야 반전과 함께 범인을 드러낸다.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이 모든 상식을 뒤엎는 듯하다. 살인마의 정체를 밝힌다. 허무하게. 하지만 또 다른 반전을 선사한다. 여자 주인공인이자 증인인 헨리에타가 바로 조울증으로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 헨은 경찰과 남편에게 진실을 밝히지만 아무도 증인인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의 저자 피터 스완슨은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소설로 이미 국내에 유명한 추리 소설 작가이다. 그는 이번 신작에서는 더 기발한 이야기로 찾아왔다. 이 책의 주인공 부부는 헨과 로이드 그리고 매슈와 미라 부부이다. 헨에게는 대학 시절 다른 친구를 스토킹한 전력이 있다. 조증환자인 그녀는 약을 먹어야 하고 로이드와의 사이에서 약으로 인해 아이를 포기했다. 새로 이사한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아이가 없는 부부인 옆집 매슈와 미라 부부를 알게 되고 매슈의 집에서 저녁 초대를 받게 된다.

집안 구경을 하던 중 헨은 서재에서 펜싱 트로피를 알게 되고 이 트로피가 전에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더스틴 밀러와 관련 있음을 직감한다. 이 직감을 매슈 또한 알아차리고 헨은 매슈가 또 다른 살인을 할 것을 예감하던 중 매슈가 동료 교사 미셸의 남자 친구인 스콧을 죽이는 걸 목격하게 된다. 경찰에게 매슈가 범인임을 알리지만 증거 부족과 헨의 과거 전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헨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매슈로부터 접근 금지 신청을 받게 된다. 범인이 증인의 말보다 더 신빙성있게 되는 이 현실 속에서 매슈는 자신에게 유리함을 알고 헨에게 접근하며 특벽한 관계를 제시한다.

증인의 말을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이 범인밖에 없다.

신뢰성 없는 증인에게 범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 놓고 털어놓는다.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서부터 매슈의 동생 리처드가 나오고 그들의 충격적인 과거사가 나온다. 헨과 매슈의 심리 싸움에서 리처드가 개입되면서 저자 피터 스완슨은 이 이야기를 반전에 반전을 가져다 준다.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매슈가 자신의 살인 이유를 밝히는 부분은 섬뜩하지만 공감을 일으킨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나쁜 인간들은 변하지 않으므로 이 사회에 없애주는 게 더 훌륭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당당히 밝히는 매슈. 그리고 헨의 작품 세계와 자신의 살인을 비교하는 이 담대함은 정말 허를 찌른다.

살인으로 나쁜 자들을 처단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음을 어느 누구보다 많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가정사와 함께 드러나는 동생 리처드의 이야기 속에 작가의 반전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놀라움을 선사한다. 뒤통수를 맞는 듯한 이 반전은 앞의 매슈와 헨의 심리 싸움 대신 오싹한 공포를 느끼게 해 준다. 자신은 절대 여자를 죽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매슈와 여자를 창녀 취급하며 하대하는 동생 리처드, 같은 가정환경에서 극명하게 다른 이 두 인물의 성격으로 인해 피터 스완슨은 인물들을 극한의 상황까지 밀어붙인다.

폭력, 살인, 광기, 데이트 폭력, 여성 표현 등 소재들이 불편하게 하는 면도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폭력을 응징하는 방법과 과연 제대로 처벌받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를 자문하게 된다. 처음부터 매슈가 범인이라는 걸 밝힌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이미 답을 내린 만큼 더 담대한 작전을 펼쳐간다. 독자를 설득하는 게 아닌 증인의 말을 믿지 않는 책의 인물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범인이 바로 매슈입니다를 알려야 한다. 이 어려운 작업을 피터 스완슨은 해낸다. 440페이지의 두꺼운 분량도 쉽게 넘기게 하는 가독성과 전혀 군더더기 없는 사건의 전개는 읽는 내내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한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이 때, 추리소설의 시작을 이 책으로 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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