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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읽게 될 때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많다. 녹록지 않은 삶의 무게가 느껴져서 몇 번씩 숨을 고르고 읽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청소부 매뉴얼》은 세 번의 이혼과 네 아들의 싱글맘, 알코올중독자, 청소부, 병동 사무원 등등 이력을 대충 읽는다 해도 결코 만만치 않은 삶이였음을 짐작케 하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루시아 벌린의 첫 소설집이다.
루시아 벌린은 사후 11년이 지나서야 작품이 빛을 발했는데 작가의 경우 생활을 책임지고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기에 단편 소설 위주로 글을 쓸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저자가 평생 쓴 76편의 작품 중 43편이 수록된 《청소부 매뉴얼》은 청소부로서 지켜야 할 여러 규칙들과 함께 일어나는 여러 에피소드와 함께 자신의 낙태 경험 그리고 싱글맘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고됨을 작품 속에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표제작인 《청소부 매뉴얼》의 경우 저자의 청소부의 경험담이 상세하게 드러난다. 이 집 저 집을 청소하며 각 집마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행동하며 느끼는 삶의 모습, 그리고 그 삶 속에서의 고단함이 느껴지지만 작가는 그 속에서 결코 유머를 잊지 않는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부자들은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절대로 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차를 타고 지나다니면서
늘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본다.
가난한 사람들은 많이 기다린다.
사회보장연금 수령, 실직수당 신청, 빨래방,
공중전화, 응급실, 감옥, 기타 등등.
많이 기다려야만 하는 가난한 삶 속에서 심취해 있다가 "그대여, 인생이란 그런 거라오."라는 글 속에 갑자기 웃픈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마냥 슬퍼하지 않게 저자가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글을 쓰면서 생활했던 저자의 생활 속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청소부 매뉴얼》의 미덕이라면 마냥 감상에 취하지 않게끔 담담하게 전개되는 작가의 이야기의 힘에 있다. 단편 <웃음을 보여줘>에서도 사제 지간으로 법정에 서게 되는 연인의 이야기 또한 구속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현실을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병원 사무원으로서의 일이 기록된 단편 <연애 사건>에서도 자신을 이용해 다른 남자와 만남을 갖는 동료 직원 루스의 이야기 또한 바람이 난 루스를 비방하기보다 이 또한 하나의 삶이라는 듯 이야기하는 작가의 글을 보면서 납득하진 못해도 삶의 여러 모습을 보게 되는 듯하다.
모든 단편이 저자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어떤 단편이든 삶에 찌든 인물이 아닌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삶 자체를 포용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위로 아닌 위로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된다면 저자처럼 마치 남인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남에게 공감을 구하는 것보다, 동정을 얻는 것보다 이런 삶도 살 만하다고 말해 주는 듯한 저자의 소설 <청소부 매뉴얼>에 이어 <내 인생은 열린 책>도 출간되었는데 이 후속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