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는 책들이 많다. 방의 3면이 책으로 가득 차 있다. 슬픈 사실은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이다. 내 방 안의 책장을 볼 때면 친정엄마는 내게 말씀하신다.

"이제 나이 들어서 뭔 책이냐. 학창시절에 공부를 그렇게나 하지."  

남편 또한 말한다.

"네가 좋아하는 책만 읽지 말고 아이들을 위한 육아책을 좀 읽어."

그런데 제일 슬펐던 건 시어머니의 혼잣말이었다. 예전 아이가 어렸을 때 책장이 거실에 있었다. 그 때 당시 나는 정치와 외교 분야 종류의 책들에 관심이 많았다. 한 때 정치를 비판하던 책들은 물론이고 국제정세와 같은 책들도 보곤 했다. 

쌍둥이 육아를 도와주러 오신 어머니는 못마땅한 눈길로 보시며 혼잣말을 하시던 걸 기억한다. 

"이제와서 무슨 쓸데없는 책들을 본다고..." 

내게 직접대고 하신 말씀도 아니고 또 시기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건 그 때 시어머니의 못마땅한 눈빛과 그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 때의 속상한 기분. 어머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에 뭐라고 말 할 수 없어 속으로 삭혀야 했다.  꼭 두고두고 잊지 않아서 어머님께 보여주고 말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이젠 사력을 다해야 기억이 나곤 한다.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에 나오는 단편 [그녀를 지키다]에서도 '절대 잊지 않는 건' 감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절대 잊지 않습니다' 라고 다짐하지만 세월은 가만히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잊지 않는 건 감정이라고 말한다. 

나도 절대 잊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떤 것은 잊게 되었다. 
내가 잃어버린 동지들의 모습이, 마음에 불로 새겨진 줄 알았던 그 소중한 이름들이 세월 속에 희마하게 바래다가 사라졌다. 
절대 잊지 않는 건 그 순간순간의 감정이었다. 
기억도 논리도 이성도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이 다 사라져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감정이다. 

정보라 / 그녀를 만나다 중에서  
그렇다. 내게도 그 시절 다른 디테일은 사라졌지만 잊히지 않는 건 억울한 감정이었다. 엄마가 되었다고, 이제 다 큰 성인이 되었다고 이런 책을 읽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한참 책을 읽던 나를 보는 친정엄마, 남편, 시어머니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하지만 세 명이 말한 의미는 똑같았다. 

"이제 책을 읽고 공부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러니 아이들 육아에나 충실해라." 

물론 지금으로선 생각할 수 없는 말이다. 현실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고 이제는 평생공부시대니까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시대이니까. 하지만 어르신들의 눈에는, 그리고 남편의 눈에는 아직도 미래를 꿈꾸고 있는 내가 못마땅했으리라. 

이제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사실.  세 사람의 공통적인 시각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책을 읽고 쓴다. 그러면 남편은 놀린다. 아직도 읽고 쓰기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정말 나는 미래가 없는 것일까? 
이제 꿈 같은 건 아직 살아갈 시기가 많은 아이들에게 넘겨야 하는 것일까? 

이주란 작가의 단편소설 <겨울정원>을 읽는다. 예순이 넘은 혜숙씨는 오인환씨와 만남을 가진다. 혜숙씨는 <샹그리라>라는 시를 들려준다. 

이주란 작가의 단편소설 <겨울정원>을 읽는다. 예순이 넘은 혜숙씨는 오인환씨와 만남을 가진다. 혜숙씨는 <샹그리라>라는 시를 들려준다. 

가지 않은 곳은 모두 미래다
그날 만나지 못했던 그 사람도
읽지 않은 그 책의 몇 페이지도 옛날이 아니다. 

가지 않은 곳, 만나지 못했던 사람, 읽지 못했던 책의 페이지들 모두 '미래'라고 말한다. 이 시에 의하면 '미래'는 사방에 넘쳐난다.  그렇다면 내 방 가득 채우고 있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도 모두 미래인 것이다. 나는 끝난 게 아닌 미래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보다 더 빠른 나를 칭찬해야하려나^^. 

소설 속에 수록된 이 시를 통해 내가 아직 이루지 못했던 것에 슬퍼하기보다 기뻐하는 걸 택하기로 한다. 아직 이루지 못해 끝난 게 아닌 내게 또 하나의 미래가 되었으니까. 나에게는 아직 살아가야 할 미래가 많이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메모>에서 정혜윤 피디는 친구의 친구였던 서울대공원에서 만난 장애를 가진 새 콘도르를 이야기한다. 

 목이 계속 기울어져 있어 날지 못하는 새.  새의 운명대로 살지 못하고 땅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이 새의 이름은 '꼽추'였다.  늘 서울대공원에서 새 꼽추를 찾으며 지냈던 작가는 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꼽추를 애도하고 기억한다. 

어떻게 애도하냐고? 새에 대한 기록을 찾는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유범주 의 <새> 등 새가 어떻게 나는지를 쓴 책들을 찾아 기록하며 상상한다. 이 세상에서는 장애로 날지 못했지만 사후 세계에서는 한없이 날아오르기를 상상하고 기원하는 것. 그것이 저자가 콘도르 꼽추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저자의 애도는 또 다른  다짐으로 변한다.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다 살아보기로. 

우리는 아직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가능성을 알지도 못하고 바스러진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린다.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스러짐을 슬퍼한다.
수많은 것들이 우리가 해낼 수도 있었을 일을 아쉬워한다. 

정혜윤 / 아무튼 메모 

정혜윤 피디 또한 <겨울정원>에서 나온 '미래'의 개념과 맥락이 닿아 있다. 

우리가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은 모두 가능성들이고 미래다. 
이 세상은 아직도 우리가 가 보지 못하고 해내지 못한 미래의 가능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 그러므로 우리의 아직 살아가지 못한 오늘조차도 현재가 아니라 또 하나의 미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는 한 '미래'를 동시에 살아내고 있고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책 좀 그만 읽으라고 말하던 남편에게, 친정엄마에게, 시어머니에게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제 미래는 끝났다고요? 
아니요. 아직도 제 미래는 무궁무진하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내가 해내지 못한 일이 있는 한 제 미래는 언제나 넘쳐난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바로 미래를 살아내고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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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eung 2026-01-2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원합니다. 꿈꾸는자 꿈이 이루어 질 것이다.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