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읽다가 책마을 사람들에 김원영 변호사이자 무용수의 인터뷰를 보았다.

김원영 변호사가 누군가?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자 변호사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및 김초엽 소설가와 함께 <사이보그가 되다>를 쓴 저자가 아니였던가?

그런데 그 때만 해도 변호사가 본업이었는데 신문 지면에는 무용수라고 그를 소개한다.

휠체어로 생활하는 김원영 무용수가 춤을 추기 시작하며 가지는 고민과 경험을 함께 풀어낸 책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 소개가 되어 있다.












마침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그의 책을 구매해서 반가운 마음에 기사를 읽었다.



장애인으로서 무용을 시작하면서 춤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한다.

"좋은 춤"

"잘 추는 춤"

이 두가지가 비슷하지 않을까?

잘 추는 춤이 좋은 춤이 아닐까?

하지만 두 가지는 분명히 다르다고 말한다.

잘 추는 춤은 말 그대로 잘 추는 춤이다. 아름답다고 규정한 특정한 몸, 기술이 들어간 춤이 잘 추는 춤일 것이다.

좋은 춤은 시대의 가치관, 분명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관객에게 닿을 수 있는 선명한 춤이라고 말한다.

가치관, 문제의식을 가지고 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나는 며칠 전에 읽은 황석희 번역가의 책 『번역 : 황석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황석희 번역가는 책에서 '좋은 번역' 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의미를 털어놓는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좋은 번역'이란 어색함이 없는 문장이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옮겨 쓴 문장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글.

마치 원작가가 그대로 썼다고 느껴질만큼 번역자느 뒤에서 꽁꽁 숨겨져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황석희 번역가는 의외의 반론을 제기한다.


진정 훌륭한 번역은

번역문에서 인간적인 흠결이 보일 정도로

번역자의 인성이 느껴져야 한다는 뜻이다.


원문을 바꾸라는 게 아니다.

다만 기계적인 번역 떄문에 번역가 자체의 인성과 특성마저 묻혀버리면 안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번역가의 '연륜'과 '인성'을 느낄 수 있어야 좋은 번역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잘 번역한 글은 될 수 있지만 좋은 번역은 될 수 없다는 점.

잘 하는 것과 좋은 것.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까?

잘 하는 춤과 번역만 집중하다보면 좋은 춤과 번역을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좋은 춤을 추려고 하고 좋은 번역을 하다 보면 잘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이 아닐까?


하지만 황석희 번역가와 김원영 무용수가 말하는 글을 읽으며 나는 '잘 쓰는' 글이 아닌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좋은 글이란 김원영 무용수의 말대로 '나의 가치관과 생각과 문제의식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글'일 것이다.

좋은 글이란 황석희 번역가의 말대로 '나의 연륜과 인성이 배어 있는 글'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잘 쓰는 글이 아닌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걸 목표로 한다.

잘 쓰는 글보다 좋은 글을 많이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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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낭콩
채도운 지음 / 삶의직조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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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과 후 당신은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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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낭콩
채도운 지음 / 삶의직조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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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집 『강낭콩』은 강력한 첫 마디로 시작한다. 


나는 강낭콩을 낳은 적이 있다.



아이도 아니고 강낭콩이라니.. 소설 속의 주인공 역시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나는 강낭콩을 낳았다. 분명 배 아파 낳았다. 그렇다면 이 강낭콩은 애써 키워야 할 자식인가? 아니면 강낭콩은 단지 배변작용에 의해 나온 한낱 식물일 뿐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비웃음을 살 게 뻔하다. 아니, 질문의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 것이다. 강낭콩은 결코 생명이 될 수 없으니까. 생명이라고 존중받기 위한 조건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당연한 해답을 소설집 『강낭콩』에서는 이 책의 두 가지 단편에서 끝까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번째 소설, <강낭콩>에서는 회사의 유망주 김솔아 인턴사원의 임신으로 맞게 되는 상황을 통해, 두번째 소설 <식물뿌리>에서는 7년째 혼수 상태로 식물인간 상태인 아빠 진석을 돌보는 상황을 통해서이다.


첫 번째 단편, 강낭콩도 생명인가라는 질문에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강낭콩을 자식이라 인정한다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강낭콩이 땅에서 태어나면 가치가 있고 사람에게서 태어나면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인간에게서 태어났다는 비정상적인 강낭콩은 폐기물 취급도 못 받는 존재로 될 수 있는 기준은 과연 누구를 위한 기준인가? 


두 번째 소설 「식물뿌리」에서는 더 직집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고로 7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는 아빠 진석으로 삶에서 미래를 기대하기 힘든 지영은 결국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엄마 미선 또한 갈등하지만 딸 지영의 미래를 위해 힘들게 동의한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 선택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식물인간'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질문앞에 2021년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했던 이유를 돌이켜보았다. 

내가 연명치료를 거부하겠다는 이 의향서를 작성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런 의식 없이 의료기기에 의지하여 하루 더 살아서 주변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설의 질문은 내게 질문을 던진다. 


돌봄을 받기만 하고 

되돌려줄 수 없는 삶은 살아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되돌려줄 수 없는 삶은 소설 속 지영과 미선처럼 죽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내가 '인간답게 살 수 있을 때까지 살고 싶다'라는 내 생각의 기준은 쓸모에 의해서만 결정한 것이란 말인가? 


소설 『강낭콩』은 이제까지 굳게 믿어왔던 내 신념의 근간을 건드린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생명에 대한 인식을 식물에 비교하며 진지하게 묻는다.


이 강낭콩은 생명입니까 쓰레기입니까? 

이 생명은 살고 있는 상태입니까? 죽어 있는 상태입니까? 


이 소설을 읽었다고 해서 나는 나의 사전연명치료 거부 의향서를 철회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소설 『강낭콩』을 읽기 전처럼 자신 있지 못하고 주저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존재한다는 것. 

존재할 수 있는 기준은 쓸모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인가?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누가 이 질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증정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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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황석희 -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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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황석희씨는 '번역'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번역가거든요.

상대의 말은 물론, 표정과 기분을 읽어내 각자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도 번역이고 콧속에 들어온 차끈한 아침 공기로 겨울이 오고 있음을 깨닫는 것도 일종의 번

사람들은 황석희를 영어영화의 번역가로 소개한다. 
하지만 황석희는 번역에는 자신의 업인 '영화 번역'의 영역과 '삶에서의 번역' 두 가지를 말한다. 
삶의 번역은 무엇인가? 바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분위기를 살피는 것.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고 이해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과 마음을 직역하기도 하고 오역하기도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의 에세이  ?『번역 : 황석희 』에서는 그의 영화 번역 이야기가 빠질 수 없지만 이 책은 에세이인만큼 그의 일상에서의 번역을 다룬다. 그의 가족, 일, 삶 등을 그가 어떤 식으로 번역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황석희. 먼저 그가 수많은 영화 표현을 보면서, 다양한 영어 표현을 옮기면서 보는 세상에 대한 그의 번역이 궁금해진다. 
그는 10년 넘게 언어를 다루면서 세상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있을까? 

 

'언어는 세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수많은 영화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황석희 번역가는 점점 더 과격해져가는 세상을 보게 된다. 
모욕, 부정, 부정적인 표현은 점점 구체적이고 직접인 반면, 긍정, 희망, 사랑의 언어는 제자리인 상태. 부정적인 표현은 넘쳐나는 반면 긍정의 언어는 빈곤하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새롭게 생겨나는 신조어들 또한 온갖 부정적인 언어들 투성이다. 
'88세대', '헬조선' '흙수저'. '금수저', '은수저' 등 부정적인 신조어들이 넘쳐난다. 그만큼 어려운 세상을 반영하는 것만큼 우리들의 세상들이 잔인해지고 과격해지고 있음을 알게 해 주어 씁쓸해진다. 


그렇다고 그의 해석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그가 지향하는 일상, 혹은 세상의 번역은 어느 것일까? 
그가 바라는 일상의 번역은 '윤여정'씨의 오스카 여우조연상 시상식 기사를 그가 지적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윤여정 배우의 소감 중 'I dont' admire Hollywood.'를  '할리우드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로  번역한 것에 대해 황석희 번역가는 '존경'이 아닌 '동경'으로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언어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고 인종차별적인 모욕감을 느껴질 수 있는 여러 표현들이 쉽게 벌어질 수 있는 번역에 대해 황석희 번역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 언어, 타인, 일상, 세상을 번역하는 것 모두 쉽게 되는 건 없다. 
지식만으로 번역이 향상되지 않는다. 지식보다 필요한 건 바로 우리가 타인을 더 넓은 시각으로 읽으려는 노력이다. 
한 편의 문장을 읽을 때 언어만 알아야 하는 게 아닌 배경지식과 문화를 알고 있어야 올바른 번역이 가능하듯,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도 상대방을 더 넓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그는 말한다. 우리가 타인과 생기는 오역을 줄이기 위해서 바로 우리가 먼저 타인에게 문을 여는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당신과 나 사이엔 적게 잡아도 봄철 황사 먼지 수보다 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 많은 차이점을 무시하고 모두가 당신과 같은 경험을 하리라 단정하는 건 오만이다.



세상의 오역을 줄이는 건 결국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타인의 언어를 넓은 시각으로 읽으려는 노력, 그 첫걸음이 바로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시작이다. 


『번역: 황석희』 , 번역가 황석희가 바라보는 일상의 번역을 통해 나는 과연 어느 식으로 타인을 번역하나를 오히려 돌아보게 한다. 그의 번역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에는 결국 타인을 더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일상의 번역이 좀 더 풍성해지기 위해 , 타인을 오역하지 않기 위해 나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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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훌륭한 번역은 번역문에서 인간적인 흠결이 보일 정도로번역자의 인성이 느껴져야 한다는 뜻이다.  - P100

이런 예를 제외한다면 자막의 어휘 수준은 캐릭터를 기준으로삼는 것이 온당하다. 
위에 언급한 예처럼 캐릭터는 현학적인 어투를 쓰는데 무조건 술술 읽히도록 쉬운 어투로 윤색해버리면 캐릭터도 사라지고 연출자와 작가의 의도도 사라진다. 
영화번역가는 관객의 편의를 위해 작업하는 사람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전달자다. 기계적으로 쉽게 윤색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고,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러 온 관객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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