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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낭콩
채도운 지음 / 삶의직조 / 2024년 7월
평점 :
단편소설집 『강낭콩』은 강력한 첫 마디로 시작한다.
아이도 아니고 강낭콩이라니.. 소설 속의 주인공 역시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나는 강낭콩을 낳았다. 분명 배 아파 낳았다. 그렇다면 이 강낭콩은 애써 키워야 할 자식인가? 아니면 강낭콩은 단지 배변작용에 의해 나온 한낱 식물일 뿐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비웃음을 살 게 뻔하다. 아니, 질문의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 것이다. 강낭콩은 결코 생명이 될 수 없으니까. 생명이라고 존중받기 위한 조건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당연한 해답을 소설집 『강낭콩』에서는 이 책의 두 가지 단편에서 끝까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번째 소설, <강낭콩>에서는 회사의 유망주 김솔아 인턴사원의 임신으로 맞게 되는 상황을 통해, 두번째 소설 <식물뿌리>에서는 7년째 혼수 상태로 식물인간 상태인 아빠 진석을 돌보는 상황을 통해서이다.
첫 번째 단편, 강낭콩도 생명인가라는 질문에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강낭콩을 자식이라 인정한다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강낭콩이 땅에서 태어나면 가치가 있고 사람에게서 태어나면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인간에게서 태어났다는 비정상적인 강낭콩은 폐기물 취급도 못 받는 존재로 될 수 있는 기준은 과연 누구를 위한 기준인가?
두 번째 소설 「식물뿌리」에서는 더 직집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고로 7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는 아빠 진석으로 삶에서 미래를 기대하기 힘든 지영은 결국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엄마 미선 또한 갈등하지만 딸 지영의 미래를 위해 힘들게 동의한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 선택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식물인간'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질문앞에 2021년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했던 이유를 돌이켜보았다.
내가 연명치료를 거부하겠다는 이 의향서를 작성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런 의식 없이 의료기기에 의지하여 하루 더 살아서 주변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설의 질문은 내게 질문을 던진다.
돌봄을 받기만 하고
되돌려줄 수 없는 삶은 살아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되돌려줄 수 없는 삶은 소설 속 지영과 미선처럼 죽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내가 '인간답게 살 수 있을 때까지 살고 싶다'라는 내 생각의 기준은 쓸모에 의해서만 결정한 것이란 말인가?
소설 『강낭콩』은 이제까지 굳게 믿어왔던 내 신념의 근간을 건드린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생명에 대한 인식을 식물에 비교하며 진지하게 묻는다.
이 강낭콩은 생명입니까 쓰레기입니까?
이 생명은 살고 있는 상태입니까? 죽어 있는 상태입니까?
이 소설을 읽었다고 해서 나는 나의 사전연명치료 거부 의향서를 철회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소설 『강낭콩』을 읽기 전처럼 자신 있지 못하고 주저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존재한다는 것.
존재할 수 있는 기준은 쓸모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인가?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누가 이 질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증정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