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 -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나라는 세계를 만드는 법
정지우 지음 / 마름모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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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좋은 삶으로 가는 여정에 관한 책이다. 



정지우 작가는 자신의 신념을 강의 식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는 자기 계발에 가깝지만 저자의 삶이 깊게 녹여 있기에 에세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내가 정지우 작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의 인스타그램 혹은 페이스북 SNS에서 나오는 그의 글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글쓰기에 관한 책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읽고 부터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분명 글쓰기 책인데 글보다 삶을 더 말하는 부분. 글쓰기로 시작해서 좋은 삶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글쓰기의 방법만을 나열해온 책들과 달랐다. 작가의 신간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 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목적을 말한다. 이 책은 '좋은 삶'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좋은 여정으로 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실패란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여정'뿐이다. 





정지우 작가는 자신이 실패한 것들을 나열한다. 소설가. 학자, 언론사 취업 등등.. 

그의 20대 삶 중에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삶인 소설가가 아닌 에세이 작가, 변호사, 강연 등은 전혀 꿈꿔보지 못했던 모습이였음을 이야기한다. 정지우 작가는 소설가가 되기 위하여 수많은 소설책을 읽었고 언론사에 취업하기 위하여 많은 문제집을 풀며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루지 못한 목표는 과연 헛것인가? 그 시간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그 경험들이 저자의 새로운 출발에 보탬이 되어주었다고 말한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수없이 썼던 문장들은 다른 종류의 작가가 되는 과정이고 언론사에 취업하기 위해 읽었던 칼럼들과 문제들은 지금 하는 강의나 문화평론가에 되어 주었다고 말한다. 하나의 삶에 충실했던 여정이 초기 목표에는 실패했을지라도 다음의 시작점으로 가는 '여정'이 되어주었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니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당장 성공을 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정' 자체를 버거워한다. 왜 그럴까? 그건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넘어 '실패'="끝"이라는 여정을 찾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내가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아이들 출산 후부터였듯 싶다. 

인플루언서를 꿈꾸었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나만의 콘텐츠를 위해 독서모임을 시작했다가 너무 버거워서 한 달 종료 후 다시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또한 서평단을 보며 수없이 많은 책을 읽었지만 정작 머리에 남는 책은 소수의 몇 권이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실패한 것일까? 정지우 작가의 여정에 나를 대입해본다. 닥치고 책읽기는 나의 사고를 폭넓혀주었다. 그리고 인플루언서를 꿈꾸며 수없이 썼던 글들은 지금의 내가 매일 써내는 글들의 글감들이 되어주고 있다. 독서모임에서 남을 능숙하게 이끌지는 못하지만 나만의 글을 쓰는 게 나의 강점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실패'한다는 건 결국 '진짜 나에게 어울리는 과정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작가의 말이 맞다. 


나의 시간을  써서 돈이 아닌 무엇을 쌓아왔는지, 또 쌓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저자의 글은 내게 한 가지 질문을 불러온다. 


"돈이 없어도 내게 남는 것들이 있는가?" 


그 말은 결국 돈을 제외하고 나를 정의할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 생각해본다. 


돈만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들은 돈을 잃는다면 남는 게 없는 공허한 사람으로 남을 뿐이다. 하지만 돈 이외에 가족과의 추억을 쌓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가족'이 남을 것이다. 혹은 '그림'을 그려온 사람이라면 '그림'으로 남을 것이며 그 힘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나는 전문가만큼은 아니지만 '책 읽는 시간'들이 내게 남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심한 우울증과 부부 불화 속에서 내가 나만의 동굴에서 서평 쓰기 위해 읽어 나갔던 시간들. 그 시간들과 글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잇다.그리고 그 책을 읽는 습관들이 내가 실패했던 순간마다 다시 책을 찾는 초심으로 나를 불러들였다. 이 시간들이 고명환씨처럼 혹은 김소영씨처럼 확 뜨게는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실패의 순간들 더 쉽게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여러 괴로움은 '타인들의 가치관'에서 오기도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내게 더 어울리는 가치관에 몰입하면서, 나와 가치관이 맞는 사람들을 계속 찾고 함께 하는 일이다. 219p



 

가끔씩 남편은 내게 말한다. 그깟 '소설책' 읽어서 뭐하냐고. 돈이 되는 책을 읽으라고 말한다. 재테크와 경제 관련 서적 이외 소설 읽기를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남편의 가치관과 주위 온통 성공하기 위한 열풍을 보면서 나는 과연 이 시간들이 시간 낭비인 것인가 생각할 때가 많다. 타인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의 행위는 시간 낭비처럼 보이고 쓸모없는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역시 분위기에 이끌려 여러 모임을 들어가지만 결국 나를 나답게 해 주는 건 내가 좋아하는 행위들을 할 때임을 깨닫는다. 남이 시켜서가 아닌 내가 자발적으로 읽고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쓸 때 온전히 나 다움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위에는 나를 방해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므로 정지우 작가는 '동료'를 찾아 나설 것을 요구한다. 소수의 동료들이더라도 자신의 것들을 함께 지켜나갈 때 그 세계가 비로소 조금씩 확장될 수 있다고 말한다.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를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처음 말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자문해본다. 그건 바로 온전한 '나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이였다. 돈이나 주위에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취향이나 태도를 쌓아 나만의 삶, 나만의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내가 선택한 삶을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람, 그 여정 자체를 즐겁게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법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내 취향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면 자신이 가진 것을 더 소중하게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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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최고의 화두는 '폭염'이다. 말복을 지나 8월 말이 다가와도 가을이 찾아오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일기예보에서는 연일 '폭염 특보'를 나타내는 빨간색을 보여주고 뉴스 속보에는 고온 현상으로 물고기와 동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기사들이 보여진다.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단 1분도 견디기 힘든 이 폭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기후 위기'를 체감한다. 
















'폭염'우려에 그치지 않고 '폭염'으로 인한 죽음이 보편화되어갈 사회에 대한 경고장을 던지는 학자가 잇다. <폭염 살인>의 저자 기후 저널리스트 제프 구델이다. 그는 기후 최전선에서 기후 재난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폭염'의 정의를 명확히 한다. 


더위는 적극적인 힘, 철로를 휘게 한다거나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아챌 새도 없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그런 힘이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도 섬뜩한데 예고 없이 죽일 수도 있다니 소름이 돋는다. 


왜 그는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는 힘이라고 했을까? 


저자는 폭염의 현장을 찾아 세계 여러곳을 방문한다. 빙하가 녹고 있는 남극은 물론 여러 농장들을 방문하며 농부들의 하소연을 듣는다. 한 때 옥수수를 심었던 곳이 더위로 인해 알로에 농장으로 바뀌고 이제 알로에마저 포기해야 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햇다 . 눙부들은 제프 구델에게 말합니다


"더는 심을 작물이 없다." 


매년 최고 온도를 찍고 있는 현재, 많은 과학자들이 더위에 강한 품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농부들은 가장 중요한 본질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결국 물리학과 생물학의 법칙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지면 무엇이든 죽지요. 그게 이 세상의 순리예요." 

아무리 인간의 과학 기술이 발달해도 결국 자연을 거슬릴 수 없다는 사실. 
무엇이든 죽게 된다는 이 사실이 바로 『폭염 살인』 의 핵심 메세지이다. 

『폭염 살인』 은 과학자답게 여러 과학적인 데이터를 제공해준다. 

 그런데 문득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우리가 혹시 이런 비극에 이미 전염된 게 아닐까? 

둥둥 떠있는 얼음조각에서 갈 길을 잃은 북극곰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탄식했다. 안타까움과 함께 각성의 목소리가 함께 '북극곰'은 환경보호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위기에 처한 북극곰을 봐도 그다지 슬퍼하지 않지 않는다.  이제 북극곰의 비극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기후변화'를 넘어 '기후위기'로 단어가 바뀌어도 우리들의 행동은 바뀌지 않는다. 『폭염 살인』과 같은 과학적 진실은 우리에게 현실을 안겨주는 동시에 이미 늦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염세론에 빠지게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대니얼 셰럴의 『뜨거운 미래에 보내는 편지』에 주목하게 된다. 












대니얼 셰럴은 1990년생 기후변화 활동가이다. 미국 환경단체 NY 리뉴스 연합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MZ세대 기후활동가인 그는 과연 누구에게 편지를 쓰는 걸까? . 

바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자기 아이에게이다. 

그런데 왜 결혼도 하지 않은 대니얼 셰럴은 아이에게 편지를 쓸까? 

이 편지의 목적은  '사람들을 실재하는 존재로 만들기' 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사람들,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또는 앞으로 결코 존재할 일이 없는  사람들까지 모두. 
우리가 만난 사람들, 만나지 못한 사람들 또는 아마 만날 일이 없을 사람들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기후 위기를 눈감는 사람들, 경제 운운하며 아직 괜찮다고 말하는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행위는 실재하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기후 위기의 주범임을 대니얼 셰럴은 명백히 밝힌다. . 

이산화탄소 배출의 가장 큰 주범인 미국이 아프리카의 기후난민의 존재를 부정한다. 허리케인 피해자 숫자를 통계로 두리뭉실 최소화하며 숫자를 지운다.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그들을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이 빈번하게 저지르는 행위이다. 

기후위기를 위해 싸우는 저자는 지구의 폭염을 '그 문제'라고 말합니다. 
갈수록 커져가는 이 문제를 더욱 부각시키려는 움직임. 
그리고 이 문제를 두리뭉실하게 축소화시키려는 정치권에 대해 수시로 좌절합니다. 때로는 주지사 사무실로 가서 언론의 관심을 끌고 행진을 하기도 하며 연방정부 국회의원을 만나 법안에 부쳐줄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은 온 몸을 다해 '그 문제'와 싸우는데 대다수 시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현실에 지치기도 합니다. 

천천히 기후 변화에 대처해가야 한다고 자꾸만 느슨해지는 정치가들을 향해 대니얼 셰럴은 말합니다. 

당신들도 연구 결과를 읽었잖아요.
근데 왜 절박해하지 않아요? 왜 위기감을 못 느껴요? 
절벽을 피할 때는 핸들을 40도 각도로 꺾는 걸로는 충분치 않다고요. 
180도 꺾어야지. 

이 현실들을 보다 보면 결국 우리의 미래는 답이 없는 것일까 깊은 회의감에 잠깁니다. 그렇지만 대니얼 셰럴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린 괜찮아"나 "우린 망했어"는 답이 아니야. 
우리 스스로 '그 문제'를 직시하지 않기 위해 세운 벽일 뿐.
언젠가는 '그 문제'와 너 나름의 관계를 정립해야 하고, 결국에는 너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껴야 될거야.

『뜨거운 미래에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이제 기후 위기를 대하는 우리의 서사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과학적 진실은 우리에게 진실을 들려주지만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게 한다.  부정적인 감정이 압도적이게 되면 우리는 '그 문제'와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지 못하고 '이젠 끝났다'고 포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대니얼 셰럴처럼 우리가 하나씩 해 나갈 수 있는 걸 끝까지 해 나가는 것.  폭염의 비극 속에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기보다 진실을 직면하되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새로운 서사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그 '새로운 서사'를 최진영 작가의 소설집 <쓰게 될 것>에서 본다. 

<썸머의 마술과학>처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을 하며 나아가는 것.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새롭게 써야 할 '기후위기'의 서사라고 생각한다. 


올해 여름의 '폭염'이 지구 종말의 상징이 아닌 우리가 새롭게 써나가야 할 서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보다 희망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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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A. 패리스 지음, 박설영 옮김 / 모모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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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찌는 여름, 스릴러의 계절이 다가왔다. 

올 여름,  나의 Pick을 받은 스릴러 소설은 B.A 패리스의 스릴러 소설 『게스트』이다. 

B.A. 패리스를 국내에 처음 알린 소설 데뷔작 <비하인드 도어>는 사이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주인공의 사투를 그린 소설이었다. 다중인격을 가진 남편의 광기가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를 보여주었던 데뷔작 《비하인드 도어》는 읽는 내내 그 광기에 소름이 돋았던 강렬한 작품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우리 집에 누군가 살고 있었다.


책 띠표지에 장식된 한 문장은 어떻게 이 책의 시작이 알리는가를 나타내는 단정적인 문장이다. 

그 집에 누군가 살고 있었다라는 문장. 누가 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걸 나타낸다. 

하지만 속지 마시길. 이 한 문장은 가장 중요한 단서이면서 독자를 속이는 속임수이다. 


그렇다면 하나씩 추리해보자. 

여행에서 돌아 온 이들은 누구인가. 가브리엘과 아이리스 부부이다. 이 부부는 가브리엘의 휴직 후 휴가를 다녀왔지만 행복하지 못했다. 의사인 가브리엘이 딸 베스보다 한 살 아래인 찰리 잉그램의 사고를 목격하고 최후를 지켜본 여파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기 떄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의사다. 많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보았을 의사가 과연 아무리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도 죽음에 이렇게 우울증을 앓을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는 이 죽음에 대해 뭔가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 아이리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 그 비밀로 인해 가브리엘과 아이리스 사이 또한 뭔가 점점 틀어지고 있다. 


이들 부부 집에 누군가 살고 있는 건 누구일까? 처음 이 소설을 읽기 전 나는 '누군가'가 베일에 감쳐졌다가 마지막 결말에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은 처음부터 시원하게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밝힌다. 그 '누군가'는 가브리엘-아이리스 부부가 결혼 기념일 1주년 여행때 여행지에서 만났던 피에르와 로르 부부였다. 이들 부부는 그 때 신혼여행이었으며 첫 만남이후 잘 통해서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서로 편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부부가 함께 왔어야 하는데 남편인 피에르는 안 오고 로르만 와 있었다. 

알고 보니 딩크 족인 이 부부가 피에르에게 숨겨 놓은 자식이 있었다는 것. 그에 충격받아 로르는 훌쩍 집을 떠나 가브리엘과 아이리스 부부의 집에 함께 거하게 된 것이다. 


좋은 말도 한 두 번 듣다보면 질리게 되듯 친한 관계 또한 선이 없으면 뒤틀리기 쉽다. 

아무리 손님으로 온 로르와 20년 가까이 친하게 지냈다고 해도 맨날 똑같은 원망을 되풀이하는 원망을 늘어놓으면 그 소리가 듣기 좋을 리 없다. 그 순간 환영객은 불청객이 되어버린다. 

로르의 남편 피에르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피에르는 감감무소식이고 로르는 어느 새 이 부부에게 짐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게스트』 에는 많은 잿밥이 뿌려져 있다. 

먼저 가브리엘이 어린 찰리 잉그램의 죽음에서 말 하지 못했던 비밀이 무엇인가가 의문이다. 

로르의 남편 피에르는 왜 무책임하게 연락을 받지 않는가. 




『게스트』 소설에서는 시간이 전개되며 모든 인물들의 허물이 드러난다는 점이 속속 드러난다. 

즉 깨끗한 인물이 없다. 심지어 최근 알게 된 새로운 이웃 에스메와 휴, 그리고 조지프 또한 결함이 드러난다. 그들의 어둠이 드러나며 의심을 품는다. 


대체 깨끗한 사람이 있긴 한 걸까? 

그리고 소설 마지막에 비로소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어둠이 실제 범인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다는 걸 알게 된다.


소설은 끝까지 범인이 꽁꽁 감추어져 있다가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진짜 범인이 밝혀진다. 

그런데 이 소설의 반전은 다른 소설들처럼 범인의 정체가 아니다. 오히려 범인은 예측할 수 있다. 

이 소설의 강력한 한 방은 범행의 동기, 즉 원인의 시작점에 있다. 그 시작점에 놀라지 않는 독자가 없으리라 장담한다. 최근 보았던 스릴러 소설 중 가장 묵직한 한 방을 날린 소설이 있을까. 

다만 아쉬운 건 그 한 방을 날리기까지 내용은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비하인드 도어》 보다는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점도 아쉬웠다. 하지만 소설의 반전은 B.A. 패리스의 이름값을 다시 증명해 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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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삶과 운명 1~3 세트 - 전3권 창비세계문학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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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꿋꿋이 살아간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결국 희망이라는 걸 보여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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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삶과 운명 1~3 세트 - 전3권 창비세계문학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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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소설 《삶과 운명 1~3》 은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스딸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한 현대문학 시리즈이다. 이 소설의 배경인 스딸린그라드 전투가 낯설어 역사를 찾아보았다. 이 스딸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과 독일의 전투로 독소 전쟁 중 가장 거대했던 전투 중 하나이자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라고 말한다. 비록 소련이 이긴 전쟁이라고 하지만 소련군측 사상자가 100만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피해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삶과 운명 1~3》 시리즈는 읽기가 쉽지 않다. 우선 이 소설의 가장 큰 방해물은 이 시리즈 소설의 시작이 이 시리즈의 출발점인 1권이 아닌 바실리 그로스만의 전편 소설을 읽었다고 전제하고 있기 떄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작품 역주에서 바실리 그로스만의 전편에 나온 배경이라는 설명이 나올 때마다 당황하게 된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이 미출간된 작품의 연장선이라니 이걸 어떻게 읽으란 소린가라는 당황점과 여러 인물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지 않아 초반은 집중하기 어렵다. 


매순간 생명의 기로에 서 있는 전쟁을 통과하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저자는 '시간의 의붓자식' 신세라고 말한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사람. 시대를 잘 타고 났으면 행복했을 사람들이 하필 전쟁 중에 태어나고 자라서 온갖 삶의 폭풍을 맞아야만 되는 시대 사람들. 그 사람들을 향해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가장 힘든 것은 시간의 의붓자식 신세다. 

잘못된 시간을 사는 운명보다 

더 무거운 것은 없다. 

시간은 자기가 낳은 이들만을, 

자기의 자식들, 자기의 영웅들, 자기의 일꾼들만을 사랑한다. 



《삶과 운명 1~3》 의 저자 바실리 그로스만은 2차 세계대전을 살아가는 이들의 운명을 시간의 의붓자세 신세라고 말한다. 의붓자식의 신세. 시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삶과 운명이 평탄할 리 없다. 고통스럽고 치열해야 한다. 홀로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이 의붓자식 신세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과 운명은 힘겹기만 하다. 


전쟁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날것으로 마주한다. 매순간이 생명의 기로에 서 있는 전쟁 현장에서 종군기자로 그 참상을 목격한 저자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표시할까? 


바실리 그로스만의 이 소설에서는 독일군이 운영하는 독일 수용소와 정치범으로 잡혀 동족인 소련 당국에 의해 운영되는 소련 정치수용소가 나온다. 독일 수용소는 당연히 2차 세계대전인만큼 유대인들의 수용소가 소개되고 소련 당국이 국민들을 수용하는 장치이다. 적군에 의해 고통받는 것과 같은 동족에게 고통받는 것. 어느 쪽이 더 치열할까? 


유대인 수용소 게토로 끌려간 빅토르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보내는 그 당시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짐승 우리에서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어. 

그건 주위에 온통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이야. 

게토에서는 말처럼 차도로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악의에 찬 시선도 없었기 때문이야. 




동일한 운명을 가진 게토 수용소의 유대인 사람들. 이들 모두는 언제 독일군에게 학살을 당할지 모르는 신세이다. 바깥에서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차별과 특권 등 온갖 불공평을 감당해야 했지만 이 수용소에서는 모두 똑같은 신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에서 오히려 홀가분해졌다고 말한다. 


반면 소련인이면서 소련 당국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린 수용소에 갇힌 아바르추끄는 동족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이 수용소에서 불평등을 한탄한다. 같은 죄수임에도 누군가는 줄을 잘 서 물건을 감춰도 처벌을 피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누군가는 열심히 일을 해도 핍박을 받는다. 같은 동족이가 같은 수감인이면서 다른 이 불공평을 두며 이들은 한탄한다. 



인간의 본성이 모두가 절망 상태인 상황보다 같은 위치이지만 그 사이에서 느끼는 불공평이 인간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바실리 그로스만은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문학 현대소설 《삶과 운명 1~3》 에서 저자는 이 불행 앞에 직면한 인간의 본성을 '굴종'이라고 표현한다.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의 행렬에 굴종한 유대인들의 모습, 스탈린의 독재 앞에 아무런 소리하지 못하고 오직 당의 신임을 얻기 위해 온갖 수모를 순수히 감당하는 인간의 모습.. 

더욱 끔찍한 건 우리가 전쟁 속에서 인간이 아닌 비열한 짐승이 되기까지는 단 몇 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불행 속에 인간의 운명은 희망이 없는가? 

이러한 굴종과 복종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점점 전쟁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그저 좌절해야 하는가? 


바실리 그로스만은 이 상황 속에서 빛을 본다. 



불행 속에서 굴종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본성적 갈망 또한 인간의 본성임을 강조한다. 자유를 향한 갈망이 굴종하는 사람들 속에서 바르샤바 게토, 소비보르 대규모 봉기, 히틀러 저항 운동, 베를린 봉기 등을 만들어냈고 역사를 이루어냈음을 강조한다. 그 갈망이 결국 지금의 자유를 만들어냈고 미래의 빛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시대의 의붓자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은 고달프다. 모든 생명이 고귀한 가치를 지녀야 하지만 전쟁 속에서 일부의 특권층을 제외하고 모두가 무거운 운명을 짊어져야 한다. 이 현실에는 과학자도, 소련 당국의 신임을 받던 당 서기도 별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 시대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갔던 한 명 한 명의 삶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일제 치하 또는 6.25 한국 전쟁의 불행 속에서 살아갔던 우리의 역사가 떠오른다. 우리의 역사가 유명한 독립군이나 강대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 처럼 보여도 결국 이 시대를 묵묵히 이겨내며 살아간 평민들의 삶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이 《삶과 운명 1~3》 소설 또한 그 사람들을 그린다. 시간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꿋꿋이 살아간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결국 희망이라는 걸 보여준 소설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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