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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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빈주먹만도 못했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15p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펄롱.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비록 미혼모인 엄마에게서 태어났지만 주인 미시즈 윌슨 부인의 친절로 모자는 생계에 대한 큰 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미시즈 윌슨 밑에서 함께 일하는 농장 일꾼 네드 또한 펄롱의 엄마와 펄롱에게 친절했다. 물론 순탄한 건 아니다. 아버지가 없고 남의 집에 거하는 식모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 석탄 야적장을 운영하며 살림꾼 아일린과 어여쁜 다섯 딸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엿한 가장인 펄롱. 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이대로 평범하게 살아가며 딸들이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는 것 뿐이다.

 

사람들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있다. 그 터닝포인트는 기습적으로 찾아온다.

펄롱에게도 그렇다. 그날은 지극히 평범한 날이었다. 단지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을 뿐이었다.

배달 예정 시간보다 빨리 도착한 그는 거래명세서를 전달할 수녀님을 찾기 위해 예배당 문을 열다 뜻밖의 광경을 마주한다. 더럽고 초라한 행색을 한 소녀들이 예배당 바닥을 죽어라고 문지르고 있다.

뜻밖의 불청객처럼 나타난 펄롱을 보고 구세주마냥 다가온 아이는 말한다.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안 된다고 거절하는 그에게 때마침 수녀가 나타나고 일은 마무리되며 허겁지겁 수녀원을 나오는 펄롱. 충격어 너무 커서일까. 그는 익숙한 길이였지만 길을 잃어 길가에 있는 노인에게 길을 묻는다.

 


 

길을 잃은 펄롱에게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노인의 대답은 펄롱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펄롱은 과연 자신이 본 사실을 가지고 어떻게 하길 원하느냐.

 

다른 동네 사람들처럼 이 수녀원의 정체를 애써 무시하며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위험하지만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진실과 싸우느냐.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펄롱은 끊임없이 고민한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 자신의 일상이 평온하고 행복할수록 그 고민은 더욱 깊어져간다.

 

펄롱은 혼자가 아니다.

펄롱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딸들이 있다.

펄롱에게는 그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있다.

펄롱에게는 이 도시의 유일한 명문 여학교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졸업시켜야 할 딸들이 있다.

 

그의 평범한 소원.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무사히 이 난간을 통과해야 하는 그는 과연 어느 길로 가길 원하는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느 길로 가길 원하는가?

 

펄롱의 터닝포인트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하지만 그가 이 불편한 진실 앞에 답을 찾아가게 하기 위해 작가는 펄롱의 성장 과정을 내내 강조한다. 미혼모의 아들, 미시즈 윌슨 자택에서의 추억, 엄마의 죽음 등등...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운이 좋을 수 있었는가?

 

미혼모인 엄마를 내치지 않고 한 가족처럼 대해준 미시즈 윌슨의 친절이 있었다.

자신에게 신발끈을 묶는 걸 가르쳐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준 네드의 친절이 있었다.

현재 자신의 모습까지 오는데 당연한 건 없었다는 걸 펄롱은 알고 있었다.

그 사소한 친절이 쌓여 현재 자신의 모습이 만들어졌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 또 다른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왜 사람들은 이 진실을 용기내지 못하는가?

 

현실에서도 용기를 내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니 진실에 눈감은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당연한 과정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 펄롱의 아내 아일린과 같이 타인의 불행을 타인의 이야기로만 결론짓는 사람들에게는 무모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길.

지금의 일상이 이어질 수 있고 때로는 혹독한 시련이 이어질 수 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용기를 내어 좁은 길로 선택할 수 있는 건 결코 큰 것들이 아니다.

작은 순간을 아는 사람들이 타인의 작은 순간들을 중요시하게 여길 수 있다. 세상에 사소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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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리커버 에디션)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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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에서 매년 진행되는 50인이 뽑은 2023년 올해의 소설은 권여선 작가의 『각각의 계절』이다.

보통 단편소설집의 경우 여러 편의 단편소설 중 대표적인 이야기 제목, 표제작을 골라 책 제목으로 선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소설집 『각각의 계절』은 다르다.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 중 <하늘 높이 아름답게>의 마지막 문장이 책의 제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문장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 한 문장에 사로잡혔다. 봄,여름,가을, 겨울 사계절을 나기 위해서는 각 계절마다 각자의 힘이 든다는 문장에서 고단함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왜 그럴까? 왜 각자의 힘을 필요로 할까 하는 고민 속에 책을 읽어나갔다.


첫 번째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에서 준희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 정원의 20주년 기념식에 참가한다. 대학 신입생 하숙 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함께 어울렀던 준희, 경애, 부영, 정원. 이 네 명 중 정원은 이미 세상에 없고 그들과 함께 했던 경애와 부영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한 때 서로 의지하며 술친구가 되어주었던 친구들. 파릇파릇한 신입생 시절 만나 절친했던 4인방이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생각하던 중 준희는 그들 사이가 금이 가기 전 마지막 여행을 떠올린다.

경애의 생일 축하 겸 떠난 여행. 그 곳에서 정원은 방 청소를 하다가 사슴벌레를 발견한다.

어떻게 들어왔지 생각하며 집주인에게 묻는다.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어디로든 들어와."


집주인의 대답을 생각하며 이들은 사슴벌레식 문답이라 생각하며 다른 문답을 만들어간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사상의 암흑기에 우애는 친구의 배신에 한 친구의 가정이 무너지고 자연스레 무너져버린 이 관게 속에 주인공이 떠올린 '사슴벌레식 문답'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으며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음으로 관계의 진실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소설 또한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워낙 티를 내지 않았던 파독 간호사 출신 마리아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부고 앞에 성당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삶을 회고한다. 남의 가정 집안일을 해주며 사모님이라고 존대하며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나갔던 마리아. 아이도 낳았지만 입양 보내야 했고 독일에서 한국으로 다시 쫓겨 들어와야 했으며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마리아를 안타깝게 여긴다. 태극기를 팔러 나가며 끝까지 쉽지 않은 생을 살았던 마리아. 그녀를 위해 뭐라도 하자고 사람들은 다짐하지만 결국 소설은 말한다. 이들의 결심은 곧 잊힐 거라고. 마리아의 죽음이 기억 속에 희미해지면 이 순간 서로 말했던 도움의 순간은 서로 잊힐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살아가면서 각각의 계절을 나기 위해서 각각 다른 힘을 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떻게든 끝나게 되어 있는 관계, 각자가 스스로 각각의 힘을 낼 수 밖에 없는 관계만을 말할까? 그렇다면 이 소설집은 씁쓸한 맛으로 끝날 것이다.


모녀 반희와 채운의 여행을 그린 <실버들 천만사> 에서는 딸에게 노년에 생기는 요실금 현상을 쑥스럽게 고백하는 반희의 모습이 나온다. 이혼 후 비정규직 청소 용역으로 일하며 홀로 살고 있는 반희는 딸이 자신을 닮지 않기를 바란다.

여행지에서 TV를 보던 중 살기 위해 머리를 젤리화하며 변형하는 물고기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알지 못했던 딸의 두려웠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 반희는 생각한다.



 


《각각의 계절》에서 가장 우울한 내용을 꼽으라면 첫 번쨰로 수록된 <사슴벌레식 문답>을 꼽을 수 있다. 어떻게든 꺠어질 수 밖에 없었던 관계, 어떻게든 배신할 수 밖에 없었던 관계.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인가라는 씁쓸함을 안긴다.


하지만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기억의 왈츠」는 사슴벌레식 문답 같은 현실 속에서 희망을 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힘들었던 대학원 1학년 시절, 자신의 힘든 상황에 매몰되어 친구 경서의 추억을 잊고 살았던 그 때를 기억해낸다. 힘들었던 자신에게 다가와 주었고 자신을 알아주길 바랬던 경서의 바램을 전혀 알지 못해서 친구를 허무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그 때를 기억하면 미안함으로 친구를 기억하게 될 수 도 있다.

하지만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약하며 끝까지 희망을 다짐한다. 자신이 인생의 암흑기를 지나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듯, 친구와의 끊어졌던 관계도 다시 아물고 회복할 날이 있을 거라고 희망한다. 그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며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나는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1월 23일의 음력 날짜를 꼬박 꼬박 확인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각각의 계절> 기억의 왈츠 - 241p

 

사슴벌레식 문답 같은 세상에서는 각각의 계절을 나기 위해서 각각의 힘을 내야 한다.

하지만 각각의 힘을 내게 하는 건 결국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왈츠의 날을 추게 될 날이 언제일지 몰라도 끝까지 희망해야 한다. 설령 끊어진 관계의 끈이 다시 이어지지 않는다해도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으니 그날을 기다리며 견뎌야한다. 자신을 배신하고 간 친구일지언정 끝까지 기다리는 모습처럼,우리가 살기 위해 뇌를 젤리화하는 기형의 모습을 띠더라도 꿈을 꾸기를 포기하지 말아야한다.

 

《각각의 계절》은 인생의 떠오르는 슬픈 기억 속에서 머무르지 않게 한다.

지난 날들을 기억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씁쓸해하지만 마지막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설 <기억의 왈츠>로 끝나는 건 그래도 이러한 슬픈 기억 속에서도 끝까지 꿈을 꾸며 살아가자는 작가의 다짐이라고 생각이 된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든다.

어떻게 힘을 내야 하는가?

그래도 끝까지 꿈꿔야 한다. 그래도 끝까지 희망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힘이 날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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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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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가장 신에게 질문을 많이 했던 때가 있었다.

바로 내가 늦은 나이에 쌍둥이를 임신했을 떄와 엄마의 파킨슨병 확진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매번 신을 원망했다.

 

"왜 제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주셨나요?"

"아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쌍둥이를 주시지 도움 받을 구석도 없는 제게 하나도 아닌 둘을 주셨나요?"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던 엄마의 파킨슨병 소식을 들었을 때의 질문은 단 한 가지였다.

 

왜 하필 우리엄마인가?

 

더구나 요양보호사로 일하시면서 이 무서운 병을 두려워하는 엄마에게 왜 하필 이 병이 찾아왔단 말인가. 이게 평생 하나님을 믿으면서 헌신한 엄마의 믿음에 대한 대가란 말인가?

텔레비젼에서 7,80대 노인 연예인들도 건강하게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많은데 왜 엄마는 이제 50대에 이런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소설 『단 한 사람』 은 내가 힘들 때마다 신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했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고 질문하며 이유를 찾는 이야기.

물론 앞서 내가 말했듯 왜 내게 이런 아이들을 주셨느냐보다 더욱 심오하고 깊은 질문들이다.

 

소설 속에서 나오는 장미수와 신일복 부부에게서 태어난 다섯 남매가 나온다.

 

일화, 월화, 금화 그리고 남녀쌍둥이 목화와 목수.

 

불행은 예고가 없이 찾아오듯, 이 가정에도 갑작스런 불행이 이들을 방문한다.

셋째 금화가 목화와 목수를 데리고 산에 가던 중 금화가 나무에 깔려 쓰러진 것.

어린 목화는 목수에게 어른들을 데리고 올 테니 언니를 잘 지키고 있으라고 말한다. 허겁지겁 어른들을 모시고 왔지만 이게 웬일인가. 금화 언니는 사라지고 멀쩡했던 목수가 나무에 깔려 쓰려져있다.

 

금화는 어떻게 된 것인가.

금화는 사라진 것일까?

금화는 죽은 것일까?

 

현장에 같이 있었던 목수는 이 사건을 끝내 기억하지 못하고 목화는 언니를 지키지 못했다며 자책한다. 십년이 지나도록 알 수 없는 금화의 실종. 누군가의 실종은 항상 불완전한 가정에 머물게 한다.

 

엎친 데 덮친 격. 또 다른 운명이 찾아온다.

 

쌍둥이 목화에게 어느 날 꿈속에서 사람들이 죽는 꿈이 펼쳐진다.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 한 사람을 구하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엉겹결에 단 한 사람을 구한다.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 목화는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이 할머니 임천자, 엄마 장미수 그리고 자기에게 걸쳐 이루어진 운명임을 알게 된다.

 

이 믿을 수 없는 운명 앞에 목화는 당연히 질문한다.

 

왜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운명이 자신에게 왔는가?

죽어가는 사람이 많은데 왜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는가?

그 단 한 사람이 악인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신은 있기는 한 것인가?

이 수많은 죽음과 생 속에서 죽음과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매번 반복되는 수많은 죽음 속에서 삶은 한없이 작아보이고 부질없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질문을 하는 자가 답을 찾는다고 했던가.

 

똑같은 운명에 체념한 할머니, 저항했던 엄마와 달리 끝까지 목적을 찾는 목화는 정반대에서 길을 찾는다. 바로 자신이 살린 단 한 사람을 통해서. 자신은 왜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냐 했지만 단 한 사람은 결코 작은 게 아니라는 걸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겪는 세상의 수많은 질문과 분노와 좌절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이야기한다.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


 

이해할 수 없는 불행 앞에 슬퍼하고 두려운 미래 앞에 두려워하기보다

내가 살아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

'오늘'을 살아가는 일에는 끝내 인정하지 못한 사라진 금화 언니의 마지막을 인정하는 것과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며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을 한없이 사랑하고 '오늘' 자신이 살릴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구하면서 비로소 삶을 즐긴다.

생의 마지막은 언제 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까지 마음껏 그리워하고 슬퍼하며 기뻐하기로 한다.

그걸 누릴 수 있는 자는 오직 영원한 '오늘' '지금'을 사는 자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소설 『단 한 사람』 을 읽으며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떠올린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에는 참아라.

기쁜 날은 반드시 올 터이니

 

마음은 미래에 사니

현재는 항상 어두운 법

모든 것 한순간에 사라지나

지나간 것 모두 소중하리니

 

속이고 슬퍼하고 우울함 속에서 우리가 참아내고 살아가야 하는 건 결국 모두가 사라진다는 것.

우리가 미래만을 바라보니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어둡게 살아가는 것.

결국 푸시킨의 시와 최진영의 소설 소설의 『단 한 사람』 은 서로 닿아있다.

 

똑같은 운명 앞에 분노하고 저항한 삶을 살았던 엄마와 체념하듯 살았덨 할머니와 엄마는 현재를 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을 받아들인 신목화는 '단 한 사람'을 인해서 감사하며 오늘을 기뻐하고 사랑하며 슬퍼한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나는 생각해본다.

나는 내 삶의 가장 질문을 했던 그 순간들에 대해서 답을 찾았는가?

나는 알고 있다. 답은 없다. 답은 살아지면서 아는 것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늘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니까.

 

며칠 전 쌍둥이 아이 하나가 우리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가 쌍둥이가 아니라 한 명만 있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

 

힘들었을 때 한참을 했던 질문과 상상들. 하지만 이제는 부질없는 질문인 걸 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오늘은 쌍둥이므로 그런 상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엄마의 병 또한 마찬가지다. 신이 왜 엄마에게 큰 병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까. 그 질문 또한 의미가 없다.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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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정아은 지음 / 사이드웨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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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전두환을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전두환의 대사가 있다.

 

왜 나만 갖고 그래!

 

자신이 한 일을 부정하며 모르쇠로 일관했던 전두환. 그는 왜 끝까지 자신의 악행을 부인하는가.

소설가 정아은 소설가는 그 점에 의문을 갖는다.

왜 그는 무릎 꿇지 않았는가.

왜 그는 자기가 한 일을 끝까지 부정하는가.

인간이라면 조금이라도 있을 일말의 죄책감이 왜 그에게는 작동하지 않았는가.

그 사실을 알기 위해 정아은 소설가는 전두환의 회고록, <전두환의 육성기록> 등을 비롯해 그 당시 활동했던 많은 이들의 기록들을 추적하며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한다.

 

전두환이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던 것에 정아은 작가는 중요한 키워드를 제공한다.

그 중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정통성'이다.

정통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통성'의 뜻을 살펴보면 " 그 사회의 정치체제, 정치권력, 전통 등을 올바르다고 인정하는 일반적 관념" 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치, 대통령의 정통성은 무엇인가? 바로 국가의 체제에 맞게 국민들의 손에 선출된 사람이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 《서울의 봄》에서 보았다시피 전두환의 시작은 12.12. 쿠테타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한 사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그가 파괴한 정통성은 끝내 그를 그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업적이 물거품이 될 수 있기에 그는 자신의 죄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전두환에게 발견할 수 있는 키워드는' 가벼움'이다.

 

누군가는 '가벼움'이란 단어가 전두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아은 작가는 전두환의 특질이야말로 '가벼움'이라고 시종일관 강조한다.

그렇다면 전두환은 어떤 가벼움을 장착했는가?

정아은 작가는 '광주'를 예로 든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를 죽이면 그 죽인 사람의 자녀, 혹은 부모들을 찾아가지 못한다.

그들의 원한이 무섭고 복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한 일이 부메랑이 될까 무서워한다.

하지만 전두환은 어떤가.

전두환은 광주 5.18 민주화 운동 때 한 지역을 차단한 채 죽이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 사태 이후 광주를 4,5차례 방문해 '광주 시민들을 아낀다고 말하며 광주를 돕겠다고 말한다. 정상인 사람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정아은 작가는 '가벼움'을 붙인다.


 

미자믹으로 정아은 작가는 전두환이 집권할 수 있었던 키워드로 '선을 지키지 않았던 시대 인물들'을 꼽는다.

먼저 정아은 작가는 자신의 권력 유지의 목적을 위해 전두환을 사면한 김대중 전대통령과 김영삼의 야당합당 역시 선을 지키지 않았음을 비판한다.

그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일방적인 사면은 국민들의 민심에 역행하는 조치였다.

김영삼 또한 대통령에 대한 욕심으로 여당과 합당함으로 정권교체가 물거품이 되게 했으며 전두환을 심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전 대통령이 선을 지키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영화 《서울의 봄》에서 소신있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 수경관 이태신, 참모총장 정상호,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등까지 선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전두환의 만행을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음에도 전두환의 꾀에 속아 잔치집 초대에 응하고 끝내 조직을 장악하지 못해 당해야 했던 그들이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최규하 대통령, 국방장관, 참모총장 및 조직 군인들, 전직 대통령 등 모두가 선을 지키지 않았기에 전두환은 끝내 단죄받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 당시에는 영화에서 보다시피 이미 군인 조직이 하나회에 장악된 상황이었다. 조직의 상하조직이 안 된 상황. 그리고 정아은 작가도 알다시피 그는 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실세였으며 정보라인을 이미 장악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권한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전두환을 제압하고 조직을 잘 관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부분에서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의 특질을 '가벼움'이라고 단정짓기에는 과연 이걸로 충분한가라는 강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은 전두환 시대를 정통성의 결여에 중점을 두며 그가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펼쳤던 그의 정책등을 자세하게 파헤친다. 가령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보여주었던 88올림픽, 해외여행 자유화 등이 어떤 배경으로 시작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아우러 그가 눈을 돌리기 위해 펼쳤던 감각적 자유가 어떻게 역사적인 1987년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 호황'의 전성기가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 그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아주며 우리가 전두환을 바로 알아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자세하게 말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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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너 1 베어타운 3부작 3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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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너 1》은 『오베라는 남자』을 쓴 프레드릭 베크만 작가의 연작 시리즈이다.

 

먼저 《위너 1》을 알기 위해서는 이 시리즈의 앞의 두 작품을 읽어야 한다.

 

아이스하키로 똘똘뭉친 쇠락해가는 변두리 지방 베어타운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베어타운』

『베어타운』에서는 마을을 살릴 영웅으로 여겨지던 아이스하키 선수 케빈이 하키 단장의 딸 마야를 성폭행하며 공동체가 분열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두 번째 시리즈 『우리와 당신들』 에서는 완전히 봉합되지 않은 베어타운 마을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함으로 서로 등지는 공동체의 또다른 위기를 그려낸다.

그리고 이제 이 시리즈의 마지막 완결판인 《위너》가 총 2권으로 3년간의 침묵 끝에 출간되었다.

 

《위너 1》은 전작에서 그려진 『베어타운』과 『우리와 당신들』에서처럼 공동체의 갈등을 그린다.

 

첫번째 이야기 『베어타운』 에서는 에이스 선수 케빈의 성폭행이 기점이었고

『우리와 당신들』에서는 벤의 성정체성이 드러나며 갈등이 조장되었다면

마지막 이야기 《위너 1》 에서는 마을을 휩쓴 폭풍이 도화선이 되며 마을의 갈등을 불려온다.

앞의 두 이야기가 주로 베어타운 한 마을의 갈등이 중심이었다면

《위너 1》 에서는 베어타운과 베어타운의 이웃마을이자 경쟁 마을이기도 한 '헤드' 마을 간의 묵은 원한이 배경이다.

 

그건 폭풍에서 시작됐지.

 

먼저 나는 묻고 싶다.

 

인간은 자연재해와 같은 불행 앞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악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불행 앞에 돕고 살아가는 걸 꿈꾸지만 과연 그럴까?

프레드릭 베크만은 《위너 1》 에서 분명히 말한다. 불행은 인간을 선하게 만들지 않는다.

불행 앞에서 인간은 더 악해지고 미워하고 증오한다. 특히 그 분열이 한쪽이 훨씬 우월하다면?

그렇다면 더욱 미워하기 쉽다. 왜 저들은 잘 나가는데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왜 저들은 평화로운데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억울해진다.

불행 앞에 자신의 처지는 확대경으로 커지게 되는 반면 타인의 불행은 축소경으로 작게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아야 한다.

어떤 불행들이 보이는가.

 

 

가장 크게는 베어타운과 헤드 마을의 갈등이다.

늘어나는 후원자금과 하키팀의 승리 기세로 승승장구하는 베어타운. vs 자금이 딸리고 하키 링크의 지붕이 붕괴되어도 고칠 생각도 안 할 만큼 소외된 헤드의 아이스하키팀.

 

가난한 집에서 탈출하여 외국으로 갔지만 주검이 되어 돌아온 누나,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보는 상황에 대한 소년 마테오 vs 자신 빼고 모두 행복한 듯 보이는 마을 사람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질문해야 한다.

 

왜 이 사람들의 갈등은 1,2권에 이르기까지 봉합되지 않고 더 커지는가.

 


 

자신의 불행 앞에서 자책하며 타인을 미워하는 것 만큼 쉬운 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 자책하며 후회하는 것. 그건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래서 《위너 1》 에서는 원망하고 싶은 상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해 더욱 똘똘 뭉친다.

자선으로 포장하면서 타인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자신의 공동체를 위한답시고 자작극을 꾸미며 모함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위해서 타인을 공격하는 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이건 우리 마을을 위해서야.

이건 저들이 먼저 시작했어.

이건 우리 때문이 아니야.

 

그래서 한 때 잘나가던 베어타운의 떠오르는 에이스 아맛 선수가 《위너 1》 에서 갑작스럽게 몰락되었던 계기 또한 동네 부량배 레브의 갈등을 부추기는 이간질 때문이었음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신경 쓰지 마.

네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들은 부족하다고만 할 테니까.

이건 저들의 경기, 저들의 판이고

너는 절대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없어.

너나 나 같은 사람은 우리만의 판을 만들어야 하는 거야.

 

너와 나,

우리와 저들,

이 갈등 앞에 한 명의 유망주가 무너지는 건 매우 빠르고 간단하다.

 

《위너 1》 에서는 이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다. 다음에 이어질 대망의 마무리 《위너 2》를 남겨놓은 채 .

갈등의 정점에 이른 마을 사람들. 이들의 분열은 과연 봉합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른다.

 

소설 속 가상마을 베어타운과 헤드 마을의 갈등을 보아야만 하는가?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봐야 한다.

 

왜? 이건 바로 우리의 이야기니까.

 

지금의 우리 사회는 더한 갈등을 달리고 있으니까.

 

보수와 진보,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반페미니즘 운동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들, 노키즈존, 노실버존, 장애인 차별철폐를 위해 시위하는 장애인들을 향한 시선들...

 

지금의 이 모습이야말로 갈등의 최고조가 아닌가?

 

그러므로 베어타운의 갈등은 소설 속의 이야기만이 아닌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도 이 상황 앞에서 쉽게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기 떄문이다.

 

갈등이 조성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가해자가 될 리 없다고 쉽게 자신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가능하면 이 소설 시리즈 모두를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프레드릭 베크만의 많은 전작들은 읽지 않더라도, 이 시리즈는 꼭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다.

정리되는 내 책장에서 끝끝내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싶다.

 

"신이시여, 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없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싶을 만큼.

 

분열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꼭 생각해보고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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