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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리커버 에디션)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절판
교보문고에서 매년 진행되는 50인이 뽑은 2023년 올해의 소설은 권여선 작가의 『각각의 계절』이다.
보통 단편소설집의 경우 여러 편의 단편소설 중 대표적인 이야기 제목, 표제작을 골라 책 제목으로 선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소설집 『각각의 계절』은 다르다.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 중 <하늘 높이 아름답게>의 마지막 문장이 책의 제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문장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 한 문장에 사로잡혔다. 봄,여름,가을, 겨울 사계절을 나기 위해서는 각 계절마다 각자의 힘이 든다는 문장에서 고단함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왜 그럴까? 왜 각자의 힘을 필요로 할까 하는 고민 속에 책을 읽어나갔다.
첫 번째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에서 준희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 정원의 20주년 기념식에 참가한다. 대학 신입생 하숙 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함께 어울렀던 준희, 경애, 부영, 정원. 이 네 명 중 정원은 이미 세상에 없고 그들과 함께 했던 경애와 부영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한 때 서로 의지하며 술친구가 되어주었던 친구들. 파릇파릇한 신입생 시절 만나 절친했던 4인방이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생각하던 중 준희는 그들 사이가 금이 가기 전 마지막 여행을 떠올린다.
경애의 생일 축하 겸 떠난 여행. 그 곳에서 정원은 방 청소를 하다가 사슴벌레를 발견한다.
어떻게 들어왔지 생각하며 집주인에게 묻는다.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어디로든 들어와."
집주인의 대답을 생각하며 이들은 사슴벌레식 문답이라 생각하며 다른 문답을 만들어간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사상의 암흑기에 우애는 친구의 배신에 한 친구의 가정이 무너지고 자연스레 무너져버린 이 관게 속에 주인공이 떠올린 '사슴벌레식 문답'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으며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음으로 관계의 진실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소설 또한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워낙 티를 내지 않았던 파독 간호사 출신 마리아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부고 앞에 성당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삶을 회고한다. 남의 가정 집안일을 해주며 사모님이라고 존대하며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나갔던 마리아. 아이도 낳았지만 입양 보내야 했고 독일에서 한국으로 다시 쫓겨 들어와야 했으며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마리아를 안타깝게 여긴다. 태극기를 팔러 나가며 끝까지 쉽지 않은 생을 살았던 마리아. 그녀를 위해 뭐라도 하자고 사람들은 다짐하지만 결국 소설은 말한다. 이들의 결심은 곧 잊힐 거라고. 마리아의 죽음이 기억 속에 희미해지면 이 순간 서로 말했던 도움의 순간은 서로 잊힐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살아가면서 각각의 계절을 나기 위해서 각각 다른 힘을 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떻게든 끝나게 되어 있는 관계, 각자가 스스로 각각의 힘을 낼 수 밖에 없는 관계만을 말할까? 그렇다면 이 소설집은 씁쓸한 맛으로 끝날 것이다.
모녀 반희와 채운의 여행을 그린 <실버들 천만사> 에서는 딸에게 노년에 생기는 요실금 현상을 쑥스럽게 고백하는 반희의 모습이 나온다. 이혼 후 비정규직 청소 용역으로 일하며 홀로 살고 있는 반희는 딸이 자신을 닮지 않기를 바란다.
여행지에서 TV를 보던 중 살기 위해 머리를 젤리화하며 변형하는 물고기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알지 못했던 딸의 두려웠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 반희는 생각한다.
《각각의 계절》에서 가장 우울한 내용을 꼽으라면 첫 번쨰로 수록된 <사슴벌레식 문답>을 꼽을 수 있다. 어떻게든 꺠어질 수 밖에 없었던 관계, 어떻게든 배신할 수 밖에 없었던 관계.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인가라는 씁쓸함을 안긴다.
하지만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기억의 왈츠」는 사슴벌레식 문답 같은 현실 속에서 희망을 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힘들었던 대학원 1학년 시절, 자신의 힘든 상황에 매몰되어 친구 경서의 추억을 잊고 살았던 그 때를 기억해낸다. 힘들었던 자신에게 다가와 주었고 자신을 알아주길 바랬던 경서의 바램을 전혀 알지 못해서 친구를 허무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그 때를 기억하면 미안함으로 친구를 기억하게 될 수 도 있다.
하지만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약하며 끝까지 희망을 다짐한다. 자신이 인생의 암흑기를 지나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듯, 친구와의 끊어졌던 관계도 다시 아물고 회복할 날이 있을 거라고 희망한다. 그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며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나는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1월 23일의 음력 날짜를 꼬박 꼬박 확인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각각의 계절> 기억의 왈츠 - 241p
사슴벌레식 문답 같은 세상에서는 각각의 계절을 나기 위해서 각각의 힘을 내야 한다.
하지만 각각의 힘을 내게 하는 건 결국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왈츠의 날을 추게 될 날이 언제일지 몰라도 끝까지 희망해야 한다. 설령 끊어진 관계의 끈이 다시 이어지지 않는다해도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으니 그날을 기다리며 견뎌야한다. 자신을 배신하고 간 친구일지언정 끝까지 기다리는 모습처럼,우리가 살기 위해 뇌를 젤리화하는 기형의 모습을 띠더라도 꿈을 꾸기를 포기하지 말아야한다.
《각각의 계절》은 인생의 떠오르는 슬픈 기억 속에서 머무르지 않게 한다.
지난 날들을 기억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씁쓸해하지만 마지막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설 <기억의 왈츠>로 끝나는 건 그래도 이러한 슬픈 기억 속에서도 끝까지 꿈을 꾸며 살아가자는 작가의 다짐이라고 생각이 된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든다.
어떻게 힘을 내야 하는가?
그래도 끝까지 꿈꿔야 한다. 그래도 끝까지 희망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힘이 날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