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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1
심재관 지음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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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불교 신자도 아니고, 전문적인 불교 서적을 읽은 경험은 없지만,  불교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들어가지 전에 기존 불교학이 어떤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는지 알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읽기는 쉽지 않지만, 끝가지 읽어가면 외래적인 근대성과 상투적인 전통주의를 극복한 주체적이고 탈식민시대를 지향하고 있는 현재 우리에게 가치있는 불교학에 대한 저자의 치열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불교가 교실로 들어오면서 그리고 근대라는 교과서 속으로 들어오면서 전통의 참다운 모습은 빛을 잃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문헌 연구를 통해 이 모든 것을 과거의 승려들보다 더 정확하고 명백히 아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p.9)

  저자의 문제의식은 서구와 일본을 통해 수입한 근대 불교학이 가지고 있는 성과와 더불어 많은 한계들이 오늘과 우리가 주체성을 가지고 불교를 이해하도록 어렵게 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여 참다운 우리의 불교학을 추구해야 함을 얘기하고 있다.  

  이는 단지 불교학의 문제가 아니라, 동양학 전반에 관한 고민으로, 서양철학의 방법론만이 보편적이기에 우리의 동양학도 서양철학의 방법론으로만 이해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의구심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한창유행했던 20세기말부터 생겨왔다. 특히 우리의 전통을 서구의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이를 보편화 객관화하는 태도는 아직도 우리가 근대성에 집착하고 있음을 말해주다. 하지만 저자와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기존의 근대성이면에는 식민성도 함께 있음을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해결을 위해 변증법적인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전통적인 불교가 정이라면 근대적인 불교학은 이에 대한 반이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저자의 지적데로 전통을 제대로 보는 노력이 없으니, 종합하려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보편화된 문제의식이며, 이와 더불어 저자가 우리에게 수입된 유럽과 일본의 불교학의 태생과 변천에 대해서 불교학이 유럽 19세기 중엽에 불경의 문헌 분석을 통해 시작되었기에 문헌학과 언어학을 중심으로 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종이 위의 불교학을 펼친 서구의 불교학의 인식태도와 인식방법에 대해서 저자는 고고학적인 고찰을 하고 있다.

이 비교언어학과 문헌학의 관계를 고려해보자.~~
미셜 푸코 Michel Foucault는 이 19세기 언어학의 탄생에서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발견하는데, 그에 따르면 비교언어학의 탄생은 고전주의와 근대를 가르는 사건으로서 인식의 영역에서 갖는 기존의 투명하고 명백한 자연적 재현기능을 멈추고, 인식의 형태로 기능했던 언어가 오히려 자신의 법칙과 역사를 갖는 인식의 '객체'로 되는 시기를 말한다. 비교언어학적 언어연구는 기존의 문헌학에서 이루어졌던 의미와 소리-사상과 결합될 수 있는 단위들의 비교가 아니라 동사의 곡용과 같은 언어의 형식적인 구성 요소의 비교, 즉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분석적 요소가 연구 대상이 된 것이다. 따라서 푸코의 해석에 따르면 사상의 투명한 재현으로서의 고전적 언어관이 19세기 들어 전격적으로 후퇴하게 된 것은 서양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이지만, 이러한 사실은 거의 인식되지 못한 채 서양의 의식 속에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 (pp.56-57)

일차적으로 그들(19세기의 사학적 전통속에서 교육을 받은 학자들)은 불교사상의 발전 과정을 도식화하기 위한 사실과 사료들을 얻고자 했으며, 이러한 방법은 서양의 문명 속에서 역사가 차지하는 것만큼 인도의 정신적 삶에서 역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으므로 성공할 수 없었다. 서양의 불교학자들이 문헌에 집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문헌 속에서 내재된 언어적 층위를 분석하고 그를 통해서 특정한 과거의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먼저 초기 불교학의 연구 목표가 되었던 '정확한 문헌해독'의 풍토가 어디서 기원했는지 살펴보자. ~~해석학 전통에서 영항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산트크리스트 연구 풍토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문헌적이며 상호문화적 이해를 포괄하는 모든 영억에서 전제로 하고 있었다. ~ 다시 이 해석학적 전통을 설명하면,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해석학은 해석의 목적이 되는 하나의 참다운 의미를 주장하며 이 의미는 결국 저자의 의도와 동일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해석자의 임무는 "자신의 문화적, 역사적 그리고 개인적인 경향성을 배제하고 저자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이 객관적인 의미를 회복하는 일이다."(pp.58-59)
언어가 곧 자연의 모사라는 고전주의의 명제에다 문헌학은 곧 엄밀한 자연과학이라는 초기 비교언어학의 선언을 덧붙인다면 그 이유는 이제 너무나 자명해진다.(p.61)
실재로 문헌학은 그들에게 자연과학과 같이 객관적이고 자명하며 투명한 학문이지만 이러한 투명성과 객관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투명한 학문의 창문 너머로 이들이 남긴 식민지 연구 역시 객관적이고 투명한 것인가.(p.61)

문제는 근대적 이성의 실험대 위에 전통이 올려질 때, 거기에서 전통의 본질을 찾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첫번째 이유는 전통이란 이방인에 대해 일차적으로 낯설고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며, 그것을 이해하고자 할 때 첫번째 작업은 귀납적 탐구로 귀착된다는 데 있다. 그런데 객관적 관찰의 렌즈 안으로 들어오는 일차적 자료의 총합은 전통의 정체성을 말해주지 않는다.(pp.108-109)

이러한 근대 불교학의 역사적 관점은 불교의 전통적이고 추상적인 개념까지 해체한다는 점이다. 객관적인 연구는 그것들이 대체로 근세에 만들어진 가상물임을 밝혀낸다. '민족'이라든가 '한국 불교'라든가 하는 집단 자의식이 문헌을 통해 실증되어야 하는, 그러한 집단적 개념은 사실 근대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문헌의 증거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근대 문헌학 또는 근대 불교학이 그러한 심리적이고 집단적이며 추상적인 개념의 연구에 적합한 방법인가. '민족'이나 '한국 불교'라는 개념은 지금도 그렇듯이 글에 의해서 명료히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적인 범주(그러나 실재하는 범주)이다.(p.124)

그들의 자료 중심주의는 아직도 18세기 유럽식의 역사적 방법에서 벗어난 것 같지 않으며, 제국주의의 문화적 표상의 관습들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엄밀한 의미의 문헌 연구는 역사학적 차원, 객관적으로 전통을 구축하고자 하는 일정, 고고학보다도 더 정확히 역사적 층위를 파헤쳐 '본래의 말씀'이 우엇이었는가를 확인하고픈 무의식적 충동이 그 배면에 깔려 있다. 현대의 초기 불교학자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관점을 빗대어 스스로 '기원의 형이상학자'라고 부를 정도였다.(p.131)

불교학의 주체화나 전통의 부할은 한국 내에서 전승되고 있었던 전통적인 연구방법의 재고와 재해석을 의미하고, 그것이 한국의 지형적 특수성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 현재 불교학의 연구에 이러한 주체적 목소리가 필요함을 주장하는 학자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상당수의 학자는 서양의 근대적인 학문적 방법과 엄청난 양의 연구서를 소화하기에도 급급한 실정이다. 설사 주체적인 학문을 주장해도, 그 주장은 과거 대항 식민주의에서 길들여진 경직된 학문이거나, 그것이 다시 군부정권하에서 체제 이데올로기로 강화된 병태적 민족주의의 어조를 갖고 있다.(p.133)
   

그의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나 약간 근대성에 대한 불편함이 너무 과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그는 서구의 불교학에 의해 더칠해진 현재의 불교 연구에서 벗어난 우리 전통 불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이한정의 글쓰기를 지지하고 있다. 기회되면 저자가 추천한 이한정 님이 쓴 <경험스님 '능엄경' 역안의 연구>를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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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동과 오늘의 민중신학 - 죽재 서남동 서거 25주기 추모 논문집
죽재서남동기념사업회 엮음 / 동연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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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써 민중신학에 관심이 있다. 안병무교수님의 책을 몇권 구해서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서남동 선생님의 글은 그동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남동 교수님이 주장하신 여러 견해들은 사실 내 자신도 기독교 신항 생활을 할때마다 고민하는 것들과 관련된 주제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기독교라는 외래종교가 어떻게 한국사회에 토착화 되어야 할지나, 로마제국주의하에서 정치권력에 저항했던 예수를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사회속에서 어떻게 다시 기념하고 생각해 봐야 할 지 말이다. 서남동 교수님은 한국사회의 역사적 현실속에서 신앙의 실존적 고민을 통해 민중신학을 내어놓았던 1세대이다. 그리고 갈수록 기독교 본리의 정신이 사라지고 희석화되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속에서 나는 이책을 접하게 되었다.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서남동목사님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책이었다.  

우리는 죽재 선생이 던지고 간 민중신학담론의 중요한 주제들, '현존적 그리스도','성령론적 공시적 해석','두 이야기의 합류','한의 사제','민중의 자기초월과 구원','민중의 인식론적 특권','민담의 사회변혁적 동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해석학적 전회','이단신학자들의 정당한 복권','기독교의 제3형태로서 과학문명' 등은 갈릴리의 생명적 복음으로써 박제화되고 교리화되고 권력화된 역사적 중교로서의 기독교를 개혁하자는 열정이었다. (P.314)

죽재 선생의 비판적 신학지성을 통해 우리가 배운 '그리스도인의 자유혼'에 의하여, 우리는 오늘의 자본주의적 보편적 세계질서로서의 잘못된 세계화란 극복되어야 할 반복음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반민중적이고, 반생명적 문명형태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새롭게 등장한 21세기 경제적 제국주의는 미국, 유럽공동체, 일본의 금융자본과 기술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경제, 문화제국주의이다. 이에 맞서서 또 다른 신제국주의적 세력의 단합 특히 중국, 러시아, 중동국가들의 단합이 지구촌을 무기경쟁과 지역분쟁의 갈등으로 몰고 갈 조짐을 우리는 직시한다. 그 결과 한국을 비롯한 작은 나라들과 개발도상의 국가들은, 세계금융자산의 지배를 받게 되고, 군사적 경쟁과 무기구입을 강요받으며, 경제적인 빈부의 양극화를 강요받게 된다.(P.315) 

21세기 대한민국은 많은 경제적 우여곡절 끝에 거의 1세계 사람들과 동일한 경제적 혜택을 볼수있는 계층들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한국의 민중신학은 1세계를 쫓는 사람들에게 자꾸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는 독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본의 증식을 목적으로 시작된 세계화의 확산속에서 우리는 국가주의를 넘어서 세계시민으로써 우리들의 물질적 풍요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다른 나라의 시민들을 생각해 본다. 현재의 모습이 적어도 기독교인으로써 민중의 왕이 셨던 예수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가 아님을 우리는 민중신학의 눈으로 바라볼수 있게 해주었다.  

적어도 우리가 세계시민으로써 기독교를 갖고자 한다면, 비록 민중신학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민중신학을 통해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민중의 아품을 알고 그에대한 치유를 성토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어쩌면 민중은 인기가 시든 이름인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개성을 강조하는 시민이라는 말이 민주화 이후 많이 쓰이고 있다. 사실, 시민과 민중은 지향하는 바가 조금 다르다. 시민은 중상층을 강조하고 있으면, 개인의 능력과 자유를 중시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시민에 대한 이해의 확산속에는 결국 민중과 만나게 된다. 시민으로써의 자유를 꿈꾸는 나는 이책을 통해. 내 자신이 외면할 수 없는 민중신학을 만나고, 민중들의 한이 풀리는 하나님 나라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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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예수 -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
길희성 지음 / 현암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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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예수"라는 책제목에서 보듯 기독교와 불교 사상을 종합해 보려는 시도이다. 저자가 기획강연회를 통해 발표했던 내용들을 책으로 것인데, 쉽게 읽힐 있는 대중서는 아니지만, 어려운 종교적 이야기와 사상들을 평이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모든 종교의 껍데기를 벗어던지면, 본질은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읽을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 ,  여러 사상들이 공존하고 소통해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그런데 서구로부터 전래된 천주교 기독교 사상은 전래된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한국화가 덜 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특히, 동양종교로 대표되는 불교와 서양종교로 대표되는 기독교가 각각 가지고 있는 관심과 목적들이 다른 선상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되고 앞으로도 계속 평행선을 달릴 것처럼 동양종교들과 서양종교들간의 소통이 한국사회에는 없다특히 근대사회에서 종교는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보니, 굳 비합리적인   신념체제에 대한 교류를 사상적으로 고찰해 보는 시간이 적었던 것도 있었고, 어차피 종교는 종교집단을 통해서 유지되고 계승되기에 서로 인간의 유한성이나 존재의 근거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데 서로 협력해댜 한다는 생각보다는 경쟁에서 이겨야 겠다는 생각만이 남무하는 것 같아 안타갑다.  

  하지만 이것은 시대의 한계일뿐, 기독교와 불교가 담지하고 있는 진리 자체의 한계는 아닐 것이다. 종교를 제례의식이나 문화로써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이고 철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책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의 종교를 대표하는 종교의 비교 분석을 보다보면, 새로운 종교적 지평을 가질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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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학의 미소 - 동시대인 총서 11
김진호 지음 / 삼인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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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년 전에 쓰여진 책이다. IMF이후 우리사회가 혼란에 빠져나오려고 갖은 얘를 쓰고 있을 때 이책은 나왔다. 그리고 나는 미국발 금융위기속에서 한국사회가 IMF와 버금가는 위기에 빠져있는 순간 이책을 읽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 인이다. 하지만 나는 교회사람하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기독교인으로써 경계설정은 이미 제도와 목사의 지도와 보살핌(?)속에서 이미 나뉘어 졌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 자신의 문제나 사회적 고민을 기독교 적으로 풀수가 없다. 나는 신앙의 주체가 아니라 언제나 고객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께. 그러다 보니 나는 두개의 페르소나를 갖게  되었다. 종교적 열망과 담론속에서 고민하는 나와 사회적, 생활적 문제를 고민하는 일반 비기독교인과 다를바 없는 담론으로 나의 얼굴에 가면을 바꿔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인으로써의 고민과 종교인으로써 고민을 종합할 수 있는 권리나 종합해야 한다는 의무의 주체가 내가 아니고 교회와 목사다 보니 다는 자연스레 두개의 세계를 분리하는 것이 내 자신에게 정직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변화속에서 그 실천적인 맥락에서 벗어나려는 주류 기독교의 시선때문일 것이다. 이책은 민중신학을 바탕으로 우리사회의 고민과 성경이라는 2천여년전의 텍스트와의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민중신학이란 약자의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낮은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 현실의 부조리와 한계를 질타하고 사회적 약자까지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적, 신앙적 실존 양식"을 찾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제1부의 가벼운 에세이들은 아마 저자가 자신이 목회활동을 하는 한백교회에 한 설교들을 바탕으로 쓰여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신학을 말하고 있다. 본론으로 가지 전에 가벼운 에피타이져라고 나 할까. 본론은 제2부와 제3부이다. 특히 제 3부의 민중신학에 대한 고찰은 나에게 신앙은 절때 현실과 유리되어서는 안된다는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다. 제4부는 성적태레니즘이라는 장인데 나가 평소 관심을 가지 못해서 별로 주목을 하지 않았지만, 이 책에세 디져트 같은 부분이다.

도발적인 책 제목처럼 오늘날 진정한 신학이라면 교회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는 다른 교회의 목회자이다. 하지만 그 교회는 주류적 교회와는 다른 기능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도의 전복이 단지 무제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악인 제도내에서 안주하다 보니, 신앙의 진실성 및 시대적 역할이 자꾸 제도의 안락함속에서 자꾸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 주소이고 이에 대해서 저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던 지난 날의 민중운동속에 분명 예수의 아우라가 느껴질 수 있다.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보다 말이다. 우리는 교회를 감으로해서 너무 쉽게 마음의 안식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아프면 감기약을 사먹으면 별 수고없이 몸이 낳듯이 마음의 갈증이 그렇게 쉽게 치료되지는 않을 것이다.  좀 수고스럽겠지만, 예수님은 만나고 내 자신의 실존양식을 찾기위해서는 내 자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종과 순종만을 강요하고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만을 강조하는 교회권력에서 좀 멀어져야하는 불편과 약간의 용기, 그리고 고독을 즐길수 있는 신념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 책의 저자처럼 말이다.  교회밖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그리 쓸쓸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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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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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출판된 책을 읽게 되었다. 그때는 불교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단지 지금 현재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가 무엇이라는 물음을 계속 가지고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 고민하다보니 다른 종교들과의 차이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불교에 대해서 단편적인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런 책이 나에게 필요했다. 너무 학구적이거나 혹인 종교인들이 쓰거나 단지 예전의 해석을 되풀이하여 시대의 적절성에 벗어난 책보다는 나같이 속인이면서 현실사회의 희노애락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쓴 불교서적을 찾다보니 으례 저자의 책을 찾게 되었다.  

저자의 다른 책과 같이 자기만의 특색이 잘 들어난 책이다. 그래서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는 반갑다. 한국, 대만, 일본, 미국 에서 배워온 자기의 지식을 통해서 금감경을 소화해 내서 잉태한  그만의 금강경에 독특한 색깔을 느낄 수 있다. 종교의 말씀이라는 것도 하나의 텍스트이고 이것은 각 시대의 환경에 따라서 다시 읽혀져야 한다. 그의 프레임을 통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현대인에게 금감경은 한자로 쓰여진 경원의 대상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쪼록 이책을 발판으로 다른 불교서적을 읽어보고 싶다. 신앙으로써 불경을 접하기 보다는 실존으로 불교를 접하고 싶은 것이 현재 나의 생각이다. 

각자의 종교들은 자기만의 차별성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되로 오히려 시각을 멀리 조망해 보면 공통점이 너무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나에게 넓은 종교적 시야을 갖도록 격려해 주는 것 같다. 

"젊었을 때, 교회 가고 절에 가고 설교 많이 듣고, 하나의 신앙체계에 고착되는 것 보다는 아상, 인상을 없애는 '虛基心"의 공부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도교-불교-기독교 를 비교하면서 결국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의 경험이 우리에게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한번밖에 읽지 않아서 금감경의 내용이 체화되지는 않았지만, 부록으로 수록된 한글 금강경을 갈헌적으로 계속 읽게 될 것같다.  특히 여러 판본들을 통하고 불교의 석학이라는 콘즈의 책까지 비교해 가면서 꼼꼼히 주석을 붙이다 보니 신뢰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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