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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한 젊은 역사가의 사색 노트
이영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푸코의 책은 ‘흐릿한 경계’와 ‘결말을 알 수 없음’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학교 1학년때 멋도 모르고 성의 역사를 읽다가 고생한 기억이 있다. 오생근씨가 번역한 “감시와 처벌”은 그나마 읽기가 수월했던 것다. 그런데, 무슨 철학자가 역사적인 얘기를 이렇게 많이 하는지… 그래도 사변적인 다른 철학서들보다는 생생한 실증적 사실들이 있었기에 역사학을 공부하는 나로써는 즐거운 추억이었다. 몇 개의 강의와 일부 서적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실증적으로 쓰여진 그의 주장들은 빙산의 일각이고, 수면아래 가려져 있으면서 그의 주장들을 떠받혀 주는 것은 광범위한 서양 근현대 철학과, 사회과학과 의학지식에 대한 이해와 의심과 불만이다. 한국사도 이렇게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당시에는 푸코를 철학이 아닌 역사학으로 소화하기에는 좀 어려웠던 것 같다. 어느덧 10여년이 흘러, 이제 한국에도 저자와 같은 역사학자가 푸코를 통해 한국사를 접근한다고 하니, 한국사가 더욱 풍부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난해한 푸코의 주장을 저자는 쉽고 진실되게 풀어쓴 점을 높게 평가하고 쉽다. 물론 푸코의 모든 사유를 다 언급했거나, 푸코 철학의 한계와 대안 등을 제시한 책은 아니지만, 푸코의 삶의 궤적을 한국의 역사학자가 따라가다 보니, 푸코의 개인적인 모습과 프랑스의 근현대사를 엿볼수 있고, 나아가 저저가 꿈꾸는 삶의 지향성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푸코의 문제의식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약간 아쉬운 점은 5장에서 푸코의 문법을 한국 근대화에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시론으로써 많은 역사적 실증과 기존 역사학의 성과에 대한 재해석과 차이짓기를 통해서 좀더 미시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단지 그의 문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방식들을 배우려고 노력한 점이 느껴진다. 아래에 저자가 푸코를 평가한 데로 그도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실천을 해야 되는지 고민한 흔적을 이책의 제5장, 제6장에서 느낄 수 있다.
푸코는 삶과 사유와 글이 일치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사유의 고행과 자기훈련’은 그에게 애초부터 내면 단련을 넘어 글로 표현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까지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p.39)
저자는 임상역사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실천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이 괘종시계처럼 고장나면 건전지 갈고, 폭잡한 기계장치를 드라이버로 뜯어서 부품을 고치는 그런 존재와 다른 마음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써, 역사학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을 치유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나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영웅과 거대서사(grand narative)에 매물된 역사접근 방법은 연구자와 국가권력이나 사회집단에게는 의미가 있을 지 모르지만, 하루하루를 자신의 삶속에서 의미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역사를 처음에는 호기심을 갖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다가 어느덧 과학적으로 재구성된 역사적 진리 앞에서 독자자신이 역사로부터 타자화되고 결국, 역사를 멀리하게 되어, 자기에 대한 성찰의 수단으로써 역사학을 이용하지 않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러다 보니 일반 독자는 역사를 떠받치는 존재가 되어 버렸고, 역사학자는 일반독자 혹은 민중들이 떠받쳐야 되는 역사적 사실, 나아가 개인이 보이지는 않는 역사적 덩어리 단위들의 진리들을 안내해주는 선지자들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음을 지울수 없다.
독자의 고민 : 역사는 재미가 없고, 나 삶과 관계가 너무 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
저자의 고민 : 역사를 통해 내가 진리를 발견했는데, 독자들은 왜 내 마음을 모르지….
생산과 소비가 나누어지는 것은 인문학적이지 못하다. 그가 말한데로 우리 모두 임상역사학자이 다. 개인과 가족 혹은 자신에게 의미있는 공동체의 역사를 반추해 본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좀더 명징하고 객관화 시키기 위해서 여러 전문 역사가들이 쓴 역사책에서 주장하는 진리들을 이용한다면, 비록 남을 위해 글을 쓰는 경우는 없겠지만 내 삶을 치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제6장 실존적 역사쓰기를 읽는 동안 내 개인과 관련된 소소한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1장과 2장을 통해 우리는 한 인간으로써 푸코의 내면을 만날 수 있었다. 거대한 사상가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노력해도 어찌할수 없는 개인의 성품과 개성을 운명처럼 안고 삶아가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안스럽게 그리고 내 자신 혹은 우리 모두 각각 그러한 운명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삶에도 불구하고 푸코의 실존적 삶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무의식은 생애를 거치며 반복되건만 늘 낮설기만 한 것으로 구조회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좀처럼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한 어설프고 불우한 영혼의 외로움이, 마리화나에 취했을 때의 몽롱함이, 내면의 것을 타인에게 주고자 하나 주지 못하는 자의 고독함이, 엘리트로서 책임져야 할 것을 이제 그만 벗어버리고 싶어 할 때의 답답함이, 동생애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문명 사회라고 토로할 때의 쓸쓸함이, “에이즈에 걸린 것 같습니다”하고 나지막이 스승에게 말할 때의 허무함이 있었다. (p.54)
푸코는 의사의 외침이 아니라 그 밑에세 침묵하고 있던 광기에 주목했다. 의사의 외침을 가능하게 한 광기의 침묵에 주목한 것이었다. 광인은 이성적 존재인 의사 뒤에 가려져서 이성적 담론의 질서인 의학의 표면 아래에세 침묵하는 존재였다.(p.72)
그리고 3장과 4장을 통해서 자신의 노력과 전략으로 철학자로 성공의 길을 챙취한 후, 그가 보여준 사회적 실천은 개인의 삶과 사회적 실천이 어떻게 적용되는 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해야 되는지 잘 보여지고, 그속에서 그의 사상이 단련되고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17~18세기에는 계몽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새로운 가치가 대두되었는데,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일반화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토대로 한 발전을 추구했고, 계몽주의는 이성의 자율성,
종교적 독단 거부, 관용, 자유, 평등, 진보와 같은 가치를 추구했다. 역사에게 칸트, 로크, 루소 등은 계몽주의 사상가로 화려하게 기억된다. 이들 사상가에 비하면 구빈원의 관리들은 역사의 주변주에 산재한 지식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실무를 담당하며 부르주아적 가치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므로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한 일이다.(p.79)
푸코는 고통스런 타자였지만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사회에 책임을 지려고 한 교사였다.(p.120)
권련이란 실체나 속성이 아니며, 나아가 무엇의 범주에 속하지도 누가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권력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서로 관계 맺게 한는 어떤 힘의 기능인 것이다. 또는 전략적 위치의 집단적인 효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푸코에게 권력이란 다른 것에 의해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무엇을 생산한는 동인이다.(p.143)
푸코는 개인을 자유의 근거가 아닌 일상적 사회 수호 권력의 근거이자 서식처로 봤다. 이것은 마치 노동 가치론의 관점에세 선 마르크스가 개인(노동자)의 노동력을 노동 가치의 서식처로 분석한 것과 유사하다.(pp.146-147)
그런데 왜 타인은 타인을 지켜보고 국가는 개인을 간섭하는가? 그것은 마치 자본가가 왜 노동자를 고용하고 해고하는 것을 반복하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노동자의 노동력은 노동 가치의 근거이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서는 자본 축적의 서식처가 될 뿐이다. 일상적 사회 수호 권력도 크게 다르지 않다. ~ 끊임없이 비정상적 타자로 분류되면서 사회 수호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p.148)
우리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을 재고해야 한다. 사회 수호권력은 개인을 타자화하면서 세련되게 자기 증식을 거듭했다. 그것은 독재자, 정치가, 자본가, 관료들의 정치, 경제 권력이 아닌 합리성의 영역에세 일상화되는 권력이기 때문에 사회 각 방면에 다양한 정부를 수립했다. 문제는 민주성의 결핍을 합리성과 전문성으로 채운다는 점이다.
~행복과 인간다움의 요체는 정치 사회적 제도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전문적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성 척도에 있다. 개인의 주체성은 표준적인 정상을 향한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 계몽 권력이 표준을 정해 개인의 삶을 그에 봉착시키려고 할 때 개인은 자신이 표준과 어떻게 다른지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문화를 꽃피우려고 한다. 문화는 모든 인간은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말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합리성과 전문성으로 강화되는 그런 류의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을 잠시 내려놓고 개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청해야 한다. 푸코의 정항도 그런 맥락에서 짚어 볼 필요가 있다.(p.153)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경찰을 없애야 한다!(p.155)
진리란 유일무이한 어떤 것이어서 누가 그것을 잘 만들어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자기 자신의 영역에세 말하는 것일 뿐이다.(p.160)
철학의 문제는 현재의 문제이며, 현재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오늘날의 철학이 전적으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철학은 역사에 내재하는 정치이며, 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역사이다.-미셸 푸코,<<말해진 것과 쓰여진 것>>(p.179)
그렇게 되면 비로소 개인의 역사를 ‘저항의 수단으로써의 이데올로기’로만 국한하지 않고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는 맥락에세 제기되는 이데올로기’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p.182)
푸코의 역사는 ‘역사학과의 역사’에서 ‘인간학의 역사’로 울타리를 넓힐 때 가능한 것이다. ‘권력-전문 지식의 운영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이는 근대 사회’라는 역사상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한 행복한 실증주의자가 고고학적 사료 접근을 통해 인간학의 역사를 추구했기 때문이 아닐까?
(p.224)
생각날 때 다시 읽어 보기 위해 의미있는 귀절들을 이렇게 옮겨 본다. 주체-타자화-임상역사가-프랑스 과학사에 흐르는 실증적형이상학의 전통-불연속적 연사인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