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손톱끝만큼도 없고, 배려라고는 먹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해도 없어서 못쓸것 같은 시절이 있었다.(지금도 뭐.. 썩 철이 많이 들었거나,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도 술만 취했다 하면 "너 그때..."하면서 꼬장을 부리거나, 나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이야기를 재탕에 삼탕까지 하는 걸 보면 그 당시 나의 철없음에 상처 입은 사람은 제법 많은 모양이다. 요새들어 잦은 결혼식에다가 가끔 얼굴을 보이는 모임에서 들은 그들의 상처담을 모아보니, 나오는것은 한숨이라, 남은것은 후회더라. 하지만 뱉은말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사근사근하고 나긋하게 진심을 담은 사과를 할 성격도 못 되다 보니, 결론적으로 듣는것은 나쁜X 소리.. 나쁜X소리 듣는건 자업자득이라 쳐도, 10년도 넘은 몇마디 말로 가슴에 아직도 대못을 품고 사는 그들에게 그동안 전하지 못한 심심한 사과를 여기서나마 전한다. (보거나 말거나 나는 사과를 했을뿐이고.)
사건1.
남녀 공학이였던 중학교 시절, 여자화장실이 만원이면 나는 가끔 남자 화장실을 이용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그들의 "물건"과 마주친적이 없었는데,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보이지 않게 볼일 보는 법'을 잘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단한번 K군의 물건과 마주친 적이 있다. K군은 쌍시옷과 쌍기억이 들어간 욕설을 내뱉으며 돌아섰다. 그의 등에 대고 내가 한 말은 "뭐야.. 남자들은 키 클때 그건 같이 안 커?" (참고로 K군의 키는 중3때 이미 180을 육박했다) 물론, 당연히,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원래 사람은 놀랄만큼 큰건 기억해도, 있으나 마나 한것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는 법이니까...
사건2.
역시 중학교 시절 도서부에는 하얀 얼굴에 금빛 안경테에 기다란 손가락에 피아노를 잘 치는 남자 선배가 있었다. 우리학교는 학기말에 매번 학생음악회 같은걸 했는데, 선배는 피아노 독주를, 나는 단체 합창을 했었다. 다들 자기 순서를 준비하고,악보를 챙기고 정신없는 무대뒤.. 강당뒤쪽의 조그마한 공강의 문을 벌컥 열었을때 선배는 연회복 비스무리한걸 갈아입느라고 웃통을 막 벗고 있었다. 나는 문을 닫고 준비실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섰다. 선배는 반 나체의 몸을 가리지도 못한채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하얀 도자기 같았던 선배의 등을 쓸어내렸다. "억울하면 선배도 만지시던가요" 나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아무일도 없었던것 마냥 유유히 그곳을 벗어났다. 차후에 들은 일이지만 선배는 그 곳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고...
사건3.
이또한 중학교 시절, 같은 도서부 후배중 H군이 나에게 수줍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나같이 이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대꾸도 안했다. H군은 호기를 부려 다시 말했다. "누나는 천사같아요" 보던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내가 말했다.
"본적있어?"
"네?"
"천사 본적 있냐고"
"없..... 죠...."
"그럼 오늘 보게 해줄게. 청소함에서 빗자루 가지고와 "
H군은 이날 나한테 좀 맞았다는데 나는 기억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 더 말하자면 이십대 초반에 십대후반의 후배의 고백에도 비슷한 대처를 했었더랬다. 뒤늦긴 했지만,H군과C군에게 이야기 해주자면, 누나는 연하취향이 아니다. 미소년보다 미중년이 좋고, 겉절이보다 신김치가 좋다. 풋풋함보다 농익임이 좋다. 연하를 남자로 안보는것, 살짝 무시하는것.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 취향일뿐 니들이 못마땅해서는 아니다. 사실.. 썩 멋있게 자란 너희가 므흣할때도 있다.
사건4.
고등학교 시절. 남자 중학교를 다니던 녀석들이 처음으로 공학을 다니게 되면, 그들의 환상은 때론 도가 지나칠 때가 있다. D군의 이상형이 바로 그 도가 지나친 환상에 속했는데, "발목까지 올것 같은 기다란 목도리를 두르고, 긴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면서, 햇볓 한번 못봤을법한 하얀 피부와, 바람불면 넘어갈것 같은 가는 팔다리를 가진 여자로, 잘 웃고, 약간 백치미 있는 여자"를 찾아서 연애 하고 싶다는 바램을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이야기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런 여자를 찾아 주기로 했다.
"그런 여자는 동네마다 한명씩 있지 않나?"
"정말? 그럼 우리 동네도 있어?"
"있을걸.. 어느 동네나 미친X 한명씩은 꼭 있잖아. "
D군은 지금 팔다리 튼실하고 짦은 단발을 고수하는 태권도를 전공한 여자와 목하 열애 중이다.
사건5.
대학교 시절. 과대표 투표를 할때 엎어져서 한잠 자고 났더니, 과대가 되어 있었다. 생각치도 않은 감투였고, 맡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끊임없는 잡일과 말이라고는 안들어 쳐먹는 동기들은 안그래도 작은 인내심의 그릇을 바닥까지 핥아 먹고 있었다. 국가고시에 필요한 돈을 한달째 안내던 여자가 학사주점에서 술을 사는 모습을 봤을때 나의 인내심의 그릇은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최종 시험명단에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지운채로 접수 시켰다. 나중에 길길이 뛰는 그녀에게 내가 한말은 "시험보고 떨어지는것 보단, 안보는게 낫지 않나?" 따로 서류를 준비하여 개인적으로 접수를 했지만, 그녀는 결국 시험에 낙방했다. 좌절한 그녀에게 다시 내가 한말 "내년에는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접수하지마. 그럼 그냥 떨어진게 아니고, 안본거라고 변명이라도 하지" 그녀의 손바닥이 나의 빰을 향해 날아 들었고, 나는 주먹을 그녀의 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었다.
사건6
이 밖에도 아빠와 뒷골땡기게 한마디씩 주고 받은 사건과, 새언니가 애기 낳고 몸풀자 마자 우유배달을 했던 사건, 한남자가 한강에서 잠실까지 걸어가야만 했던 사건들이 줄줄이 남아있으나, 이쯤에서 줄이는 이유는... 슬슬 내 이미지가 걱정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