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베이비시터
원장경 지음 / 팩토리나인 / 2025년 4월
평점 :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베이비시터, 각각 다른 세 가지 결말, “새로운 정형”의 소설인가?
“우리 아이 좀 돌봐줄래요”로 시작된 사건, 원장경 작가의 장편소설 <베이비시터>에서 시험적으로 보여주는 세 가지 결말, 그 끝을 따라가 보면, 등장인물이 같은 옴니버스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엔솔로지?, 아무튼, 딱 들어맞는 표현을 찾기 힘들다. 작가의 10년 동안의 활동- 대학 강사, 시트콤, 영화, 드리마, 애니메이션 각본을 맡아왔다-, 먹고 살기 위한 글쓰기라고 하지만, 이 작품은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다. 스토리의 탄탄함은 별론으로 하고,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유영철의 어린 시절이 이랬을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간다.
주요 등장인물, 주해는 어릴 적 부모가 불의로 사고로 죽자, 캐나다에서 귀국해 옆집에 사는 리암의 가족과 함께 살게된다. 어느날 주해에게 닥친 시련, 리암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 주해에게 묻지마 폭력을 행사한 거한에게 죽기 살기로 덤벼들다 그에게 맞아 죽었다. 그 후, 그의 부모는 캐나다로 떠났다. 주해는 아르바이트해가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격투기 체육관에서 일하면서 호신술도 배웠다. 하지만 혼자 먹고살아야 하는 명문대 고학생의 삶은 늘 힘들기만 하다. 교회에서 밥을 주기에 믿음보다는 한 끼 해결을 위해 교회를 찾고,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 리암을 떠올리게 하는 8살배기 천재 소년‘ 혁우’와 그의 부모 소범수와 진이경, 그들은 교회신도들에게 점심 뷔페를 기부하는데, 목사는 이 부부에게 주해를 소개한다.
주해에게 이들은 아이 혁우의 ‘베이비시터’를 해달라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는 조건으로 이틀 동안에 벌어지는 일,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호스티지>(2005)처럼 최악의 인질극이 벌어지는데, 아이들을 구하는 브루스의 영화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 혁우네 집안 구조다. 뒤틀린 집처럼, 이는 SF영화<닥터 스트레인지>의 공간이동처럼 여러 트릭장치가... 이 용도가 무엇일까?
이 소설은 세상의 도덕률에 따르지도 않고 그저 본능을 따르면서 애초 인간이 지녔을 법한 원시 감정, 동물적 본능을 더 민감하게 하려는 부모, 그들은 왜 그랬는지, 또 왜 그래야 했는지, 그들이 아들 혁우에게서 뭘 본 것인지, 뭘 실험하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서는 단 하나, 살아있는 생명을 서서히 죽여가면서 느끼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서 소범수와 진이경은 그들의 아이 혁우가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느끼는 공감이나 사랑의 감정, 즉 사회화 과정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사랑스런 아이 혁우를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죽이는 약육강식의 본능에 충실하게 만들려 했던 것인가, 왜, 무엇 때문에, 사회질서란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현실 세계에서 이런 제약을 없애버리기 위해, 사냥감, 아니 살아있는 놀잇거리, 그래서 천천히 죽여가는 재미,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하고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애초 혁우 부모 역시 사이코패스였을지도, 그들에게 장애가 됐던 환경을 혁우에게는 자유롭게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자는 대리만족도 있었는지 모른다.
사냥감이 된 주해는 과연 이틀 동안의 생사기로에서 어떻게 됐을까, 결론은 세 갈래다. 현실 세계에서는 TV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서 하영은 결국 악마에게 잡아 먹히는 지경에 이르기도, 이 소설의 결말의 한 갈래가 그렇다.
소설의 세 갈래 결말은 독자와 함께 쓰는 소설이랄까, 안방극장 역할을 톡톡히 해주던 일일드라마, 혹은 주말드라마는 시청자의 바람에 따라 등장인물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크게 두드러지기도 하고 축출되기도 한다. 당시에는 시청자가 드라마의 결말을 좌지우지한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별짓 다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쌍방향 드라마였던 게 아니었을까, 대리만족과 권선징악, 사랑받는 팥쥐가 유리구두를 신고 왕자님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그런 해피엔딩을...
이 소설의 결말은 작가의 스토리대로 결말은, 다른 한 갈래는 주해가 혁우에게 처절한 복수를, 다른 또 하나는 비질란테가 되는 과정을... 우리에게 선과 악의 경계는 있는 것일까?, 혁우의 부모는 그의 아이에게서 뭘 본 것일까? 부모 자신들이 사회적 질서에 억눌렀던 숨겨진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이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지켜보고 싶었던 것일까,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 아니 인간본능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드러내보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혁우처럼 이중적일까,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광기(혁우)를 밖으로 끄집어내, 뒤틀린 사회, 부정의한 사회를 향한 외침일까?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혁우라는 8살배기 고도의 사이코패스의 본능을 최대한 끌어올리려는 비뚤어진 부모의 사랑?, 주해는 묻지마 폭행을 당하는 과정에서 리암의 도움으로 살아났지만, 현실 세계는 또 다른 지옥임을, 특히 명문대생이 출세를 포기하고 자기파멸이 따르는 복수의 길을 선택했던 설정, 마지막 한 갈래는 반전이다. 사이코패스는 세상에 잣대로는 용서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 법의 잣대로 풀려나면 곧 그 세상이 지옥이라고, 그래서 이들을 처단하자고, 주해와 혁우는 함께 이 길을 선택하는데...
당신은 어느 쪽 결말에 흥미를 느끼시는지 물어보는 듯하다. 단순하게 끝날 스토리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