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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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되지 않은 글처럼 답답한 것이 없고 정리될 수 없는 파일처럼 막막한 것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분명 거기 있었으나 모든 말이 글이 되지는 않는 법. 망설이고 지우고 다시 쓰고 조각난 말들을 가여이 여기다 이렇게라도 너희에게 자유를 베푸노라. 주먹을 쥐며 결심하는 바, 조각난 것들을 옮긴다. 그렇게 탄생한 자유만 있고 자비라고는 없는 리뷰, 를 가장한 단상(斷想)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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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란 공평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읽지 않는 것과 읽는 것을 택할 수 있고, 신문과 잡지 중 고를 수 있고, 어떤 종류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나눌 수 있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비교적 평등하게 글을 읽을 수 있으니까. 교수든 학생이든 목수이든 농부이든 변호사이든 가수이든 글을 접할 수 있고 애서가가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의지만 가지면 모두가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정말로 (어디까지나 예로서) 교수와 농부가 공평하게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는건가? 사람이 책을 차별하지 않는다하여 책 자신이 자신을 고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가? 새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그건 당연하게도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 덕분이다.  

 

그러니 우선 유니스 피치먼이라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는 모래가 모여 돌이 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운석과 같은 사람이다. 거대하고 고요하다. 감정이 거세 된, 아니 애초에 결여된 것과 같은 여자. 아버지를 질식시켜 죽게 했고 사람들의 약점을 잡거나 협박하는 데는 가히 능하다. 그리고 그녀는 -작가 자신이 첫 문장에서 밝히듯- 문맹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사실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문맹과 살인 사이에 물론 무수한 간극과 그 간극을 채울 자잘한 돌멩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커버데일 가에 온 순간부터 온갖 가구와 식기에 황홀경을 느낄 정도였지만 동시에 엄청난 위협감을 느꼈다. 방을 가득 채운 서재, 늘 책을 달고 사는 막내 아들, 신문과 책을 들고 여기저기 앉은 가족들, 그녀에게 남기는 메모, 서류를 찾아달라는 부탁.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스트레스 이상의 것, 즉 위협이다.

 

만약 그들이 평균 이상의 고학력자들이 아니었다면,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고매한 집안이 아니었다면. 유니스 파치먼은 그 집안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그녀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 또한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을 뿐 아니라 커버데일 일가는 지나치게 읽거나 쓰는 일을 자주 했기 때문에 유니스 파치먼에게 죽임을 당했다, 라고 두 문장으로 표현했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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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에서 가해자, 피해자, 사건과 동기까지 밝혀졌기 때문에 당연히 이 소설은 '어쩌다'로 초점이 맞춰져있다. 어쩌다 그 지경이 됐을까. 그들의 무엇이 그녀를 자극했을까. 무엇 때문에 그녀는 글을 모르고 모르는 것의 어떤 감정 -요컨대 저 문장 만으로는 그녀의 살인의 이유가 복수인지 수치인지 알 수 없기에- 때문에 살인을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파격적인 방법은 상당히 자극적일 뿐 아니라 옳았다. 모든 것이 다 서문에서 밝혀졌기에 맥이 빠지기 쉬운데, 오히려 이 책은 '감정'과 '진행'에 그 의미가 있기에 독자들은 더 면밀하게 책을 읽게 된다. 여기저리 놓인 부비트랩을 발견하고 그 부비트랩의 강도가 커지는 것을 찾아내며, 가해자와 피해자 중 어떤 쪽을 조금이나마 더 비난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작가는 이 점을 이용해 발군의 심리묘사를 선보인다. 들어봐 봐, 이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고 이 여자는 이렇게 살았어. 자 너라면 어떨 것 같아? 네가 이 여자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 거지? 네가 이 사람들이라면 이 여자는 어떻게 보일까? 라고 묻는 것처럼 작가는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책이 보여주는 것보다 많이,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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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씨의 발문처럼 나 역시 『더 리더』의 한나를 떠올렸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했던 여자,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진급을 앞둔 직장을 그만두고 미하엘의 앞에서 자취를 감춘 여자, 더 큰 은폐를 위해 자신의 무고함을 항변하지 않은 여자. 그런데 그녀는 아우슈비츠의 간수였고 자신의 행동이 일조 한 학살의 흔적에 대해서 태연하다. 물론 인간이란 때로는 개인적인 약점을 단체의 또는 공적인 오류보다 더 수치스럽거나 크게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의 단점을 자신이 속한 사회나 단체의 (때로는 더 큰) 단점보다 더 부끄럽게 여기거나 숨기고 싶어하는 경향 말이다. 그렇다손쳐도, 이 여자는 어딘가가 이상했다. 그래서 그때도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정말이지 혹여나 이 여자가 어떤 죄책감이나 일상적인 도덕성을 잃어버린 것과 문맹인 것은 관계가 있을까?

  

한나와 유니스는 비슷하다. 문맹임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만 살인이나 살인 방조에 큰 죄악감은 없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더 큰 희생을 감수하지만 자신들의 행위(유니스는 이미 아버지를 살인한 후 커버데일 가로 오며 한나는 공개 재판에서 그 때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냐고 묻는다)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게다가 유니스 파치먼은 읽고 쓰지 못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 라고 작가 스스로가 맨 처음에 공표했다. 달리 말해 그녀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문맹이기 때문이야, 라고 독자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그녀는 문맹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살인을 했는가? 아니면 문맹이 결과적으로 가져온 도덕적 해이와 결여 때문에 살인을 했는가?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녀들의 오묘한 도덕성 혹은 죄악감의 결여는 우연에 근거한 개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면 문맹이라는 결핍에서 파생된 결과인가? 활자를 읽고 글자를 접하는 것이 지적 능력 뿐 아니라 정서적 능력을 좌우하게 되는 것일까. 단지 활자를 읽을 수 없다는 원인이 인간의 감정 발달을 거세시켜 필연적인 감정을 부여받지를 못하는 걸까. 흥미롭게도 작가인 루스 렌들은 아주 얇은 표피 아래의 어딘가에서 외친다. 유니스가 괴물이 되어버린 건 문맹이기 때문이라고. 문맹인 괴물이 아니라 문맹이기에 괴물이 되었다고. 내 자신이 그 의견에 동의하는가 아닌가는 차치하고 적어도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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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나로 하여금 다른 시대를 동시에 살게 하고 내가 결코 겪지 못했던 않았던 없었던 일들을 경험하게 한다. 타인의 경험과 사고에 빠져들며 그것을 내게로 투영하고 다시 현실로 환치한다.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거나 하지 않으려 했던 생각들을 저절로 때로는 기어코 하게 만든다. 세상에는 무수한 삶과 방식과 고난이 있고 그 순간이 만약 내게 왔다면 나는 어떻게 할지를 예상해보고 결정해보게 한다, 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여태 나는 책이 있어서 영화를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어떤 말로도 행동으로도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없었을 때, 나는 작가들에게 도망쳤다. 상처받은 어린애가 엄마 치맛폭으로 뛰어들듯 달려가 안겼다. 세상의 모든 말이 있었지만 그 모든 말은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에 부족했기에. 현실세계의 말은 너무나 달콤하게 쉽게 부서지는 웨하스 같았기에. 현재를, 십년 전을, 백년 전을 살던 이들. 내가 모르는 고통, 갈등의 세계로 달려갔다. 삶이란 얼마나 가벼운가, 또 얼마나 무거운가.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 곳에 모두 있었고 때로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그래도 그것이 현실보다 나았기에 위기의 순간, 나는 친구들이나 가족이나 연인이 아닌 책이나 영화에게 달렸다.

 

책은 나를 위로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오히려 내 고통의 진위를, 층위를, 면모를 더 자세하게 쪼개고 객관적으로 성찰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어쩌면 더 괴로워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토록 내 고통을 분석하지 못했을텐데. 그래도 책은 나를 위로만 한 것일까. 책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구체적인 위로를 받을 수 없었겠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괴로워할 수 있었던 건 책의 탓은 아니었을까. 책이 아니었다면 구태여 몰랐을 것들, 감정과 전조와 갈등들. 그것들을 배웠고 현실세계에 적용하고 다시 감정을 분석하고 그렇게 더 체계적으로 아파한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그저 '괴롭다' 혹은 '기쁘다' ,'불안하다'처럼 뭉뚱그려 말할 수 있는 감정들을 '나는 지금 무엇때문에 괴롭고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것이 아니라 이것 때문에 힘든 것이다', '지금 나의 행복은 언젠가 이것이 사라진다는 일회성 혹은 소멸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타자화 하는 동시에 방관자로 만들어 더 자학하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책을 읽는 나는 책을 읽지 못하는 나보다 영리해진걸까, 불행해진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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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인 내 생각에 이 책은 영리하고 다의적인 소설이다. 굳이 장르를 구별하자면 추리가 되겠지만 서문에 추리소설의 모든 것을 밝히기 때문에 사실 그보다 더 큰 것을 노렸다고도 할 수 있다. 작가의 뒤를 쫓아가며 범인이 누군지 '맞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알기 때문에 어떤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마 작가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하나는 문맹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그 중에서도 악영향에 대한 것. 또 하나는 가진 자, 배운 자, 더 위에 있는 자들이 과연 가지지 않은 자, 배우지 못한 자, 더 아래 있는 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누군가에는 너무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 일일 때, 당연한 자는 아닌 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게다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의도에서든 혹여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무언가를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 값싼 연민은 이기심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

 

그러나 나는 둘 중의 어느 편에서도 구태여 서고 싶지 않았다. 커버데일 일가는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이기적이지만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그건 위선이 아니라 차라리 기만이었을 테고. 커버데일 일가가 기만행위를 했기에 그들이 유니스 파치먼에게 살해당할 만 하다고 당연히 생각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유니스 파치먼의 폭력적 도덕성이 오롯이 문맹의 결과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다만 이 책은 잘 써진 책이 주는 쾌감이나 단순한 즐거움 이상으로 이 책은 나를 생각하게 하기에 좋은 평점을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즉 우리는 모두 문맹이 아니고 그 중 몇몇은 애서가라는 점이 가장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유니스가 되지 않았고 커버데일 일가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 값싼 동정이나 부끄러운 안도감일지 모른다. 활자는, 아니 활자도 잔인하다.

 

 

 

덧) 유니스 파치먼의 공범인 조앤 스미스. 흥미로울 뿐 아니라 중요한 인물인 이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아니, 그런 글을 쓰기에는 다분히 조심스럽다는 이유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고의적으로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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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6-1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수다쟁이님 리뷰 읽고 이 책 리뷰 두 번째. 예전에 기사를 하나 읽었었는데요, 영화도 있다던데요? 소재가 흥미롭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이 패스했는데. 다시 보게 되다니 나도 울집 옆에 도서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ㅜㅜ (지어달라 지어달라!)

문맹이어도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 말고 다른 것들이 발달할 것도 같아요. 예를들어, 말의 예절이나 말하는 방법, 말의 경제성 등이요. 하지만 지금 저는 문맹이 아니라서 행복한 건 맞는 것 같아요. 책읽기 싫을때조차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무플방지댓글인 걸로.(이건 장동건 말투 따라한 걸로)

Shining 2012-06-15 11:37   좋아요 0 | URL
언제나 예쁜 아이리시스 님, 안녕:-)

책 자체보다 책을 읽으면서 하게 되는 생각들이 재밌었어요, 이 책^^ 맞다, 도서관에 새 책 많이 들어온다고 제가 지난 번 페이퍼에 썼잖아요. 진짜 많이 들어왔어요! 세보진 못했지만 한... 이백권 넘게?ㅋㅋ 그래서 저 요즘 엄청 바빠요_-* 빨리 읽고 반납해야해서ㅎㅎ 제가 신청한 책도 여섯 권이나 왔어요>_< 미안해요, 자랑해서;; 자랑할 데가 없어서 하고 싶었어요ㅠ

맞아요, 문맹이라 삶이 불행할 거라고 예상하는 건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시선이지만 아이님 말처럼 내가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인 것 같아요 :-)

근데, 이건? 무슨 말이에요?ㅠ 전 TV, 특히 드라마를 전혀 안 봐서-_ㅠ

2012-06-2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자가 없는 문명, 혹은 현대문명의 체험이 없는 삶을 저는 동경해요.
예전에 이지누 씨 강연을 들었는데, 옛날 문화를 채록하는데 가장 좋은 조건은, 학교를 다니지 않은 시골 공동체의 사람이래요. 거기엔 주로 시골 할머니들이 속한다지요. 이분들의 말에는 오염이 없대요. (한자말, 일본식 말 등등) 그래서 그 공동체의 생동감있는 전통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하지요. 전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이런 걸 좀 느껴요. 초등학교만 나오셨고, 44년생이신데, 어찌나 말의 표현이 재미있고, 또 그 내용이 지혜로운지... 혼자만 듣기 아깝다니까요. 근데 울 어머니 뿐 아니라, 이런 분들이 많지요.

그리고 예전에 없어진 혹은 현재까지 살아남은 토착 문명 중에는 문자 없이 아름답고 지혜롭고 개성적인 문명을 가진 경우가 많지요. 이건, 문자가 없어서 그런 것도 있어요. (현대의 표준어 문화, 글 위주의 문화가 얼마나 많은 토착문화를 죽였는지 말입니다..) 신화에 관한 책에서 읽은 건데요. 문자 없는 어떤 사회에선 진짜 긴 서사시를 통째로 외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있대요. 다 외면 몇박 몇날이 걸릴만큼 긴 서사시를. 근데 이게 외워진다네요. 문자가 없기 땜에 기억력이 상대적으로 더 발달한대요.. 이거 읽고, 아 그럴 수 있겠다, 진짜 신기하다. 그랬었죠. (이 책, 본가에 있는데 제목이 격이 안 나네요.)

어쨌든 이런 지식을 저는 '책'에서 얻었다는 것! 이미 전 문자문명에 찌들고 말았어요! 허허허~

Shining 2012-06-21 11:50   좋아요 0 | URL
아, 섬님 말씀이 어떤 예인지 저도 알 것 같아요.

저는 지금 그 장면 생각나네요(이런, 하필 책에서의 장면이에요ㅎㅎ) 에서 겐지이야기를 외우는 후카에리의 모습이요, 구전문학이란 참으로 전달하기 난해하지만 어쩌면 궁극의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핀지랩 사람들이요. 그 섬의 사람들은 전색맹이 대부분이고 그 때문에 낮에는 밝을 나올 수 없고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맹이지만 대신 몇 가지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놀라운 기억력이래요. 물론 이 사람들의 문맹과 기억력에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섬님의 말씀을 들으니 생각나는 이야기에요ㅎㅎ

다만 아이리시스님이 하신 말씀처럼 지금 제가 문맹이 아니라 다행인 건 맞는 것 같아요, 물론 문맹인 삶은 어떤 것인지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갖는 일방적인 시각일수도 있지만^^; 섬님과 저도 문맹이 아닌 덕분에 이렇게 친해지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까요 :-)
 
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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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허영의 시장>을 사랑하는 두 사람이 새커리 스타일의 어울리지 않는 남녀보다 잘 지낼 것이라는 편견, 같은 대상에서 같은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심리적 조화라는 편견, 어떤 책을 이해하는 것이 그 책을 읽은 다른 독자를 이해하는 길이라는 편견 때문에 그의 문학적 반응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으면서도 우리를 환대하는 주인이 읽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파티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 서재를 기웃거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도 그런 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화이트 와인을 홀짝이며 속으로 그들을 어두운 콘래드주의자, 퇴폐적인 피츠제럴드주의자, 삭막한 카버주의자라고 낙인찍곤 한다. - 알랭 드 보통, 키스할 때 우리가 하는 말들

 

  편견이란 편견이기 때문에 허황되고 편견이기 때문에 견고하다. 편견이기에 쉽게 천착되고 편견이기에 쉽게 닳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군인지 말해줄 수 있다. 라고 말하는 당신의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곧잘 취향으로 책으로 음악으로 영화로 역사를 점쳐보지만 정작 자신이 탐험을 당하면 불쾌해한다. 고작 내가 좋아하는 책 몇 권 혹은 영화 몇 편으로 나를 안다고 생각하지 마, 라는 생각한다. 그러니 나 이제 당신을 책으로, 한 권의 책으로서 들여다 볼 것이 자명하다해도 그래서 당신이 속상하다 해도 별 수 없다. 불행하게도 당신은 글이자 책이자 작가이고 나는 독자니까.

 

당신의 표제작인「위험한 독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글이다. 독서치료라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다. 학위, 자격, 상대가 없을 뿐 내가 나에게 늘 하고 있는 것이 실은 그것이니까. 내가 의외라 생각했던 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추천한 책들이 너무 전형적이었기 때문이다. 원조교제를 하는 여학생에게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방화를 하는 소년에게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 여기는 그녀에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사양』을 읽게 하는 것이 옳았을까. 당신은 그 책들이 그들에게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지만 글쎄, 나라면 누군가 내게 작위적으로 어떤 책을 그것도 현재의 나와 유사한 것을 내밀었다면 분노하거나 불쾌하거나 모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을 동시에 담은 어떤 책을 만난 것은 분명 도움이 될지 모르나, 그것을 남으로부터 받았다면, '이것이 네 삶이다' 라고 말한다면, 어떤 수치로 다가오지 않을까. 그들은 어떻게 수치심이나 공격성을 갖지 않고 그의 독서 '치료'를 받아들였을까.

 

당신은 그녀가 작가의 삶을 작품에 대입시키는 점을 지적했다. 작품과 작가는 동일하지 않다, 고 그는 그녀에게 충고한다. 책날개에 의지하지 말고 읽으라고. 나는 다시 웃는다. 다자이 오사무의 이야기를 읽을 때 미수와 성공에 이른(?) 그의 자살을 떠올리지 않고,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읽되 극우주의와 할복을 생각하지 말고, 공산당에서 탈퇴 당하고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을 감행한 쿤데라의 삶을 무시하고, 루 살로메에 대한 릴케의 사랑을 짐작하지 않고. 그럴 수 있을까. 그 사람의 전부를 담은 책이라 해도 그 사람은 아니기에, 어떤 텍스트도 상대방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독자인 우리는 그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 삶의 흔적들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도 강해서 작가의 삶과 작가의 글을 떼어놓는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와 이런 글은 어떻게 나왔는지, 는 비슷하지만 다른, 중요한 의문이 아니던가.

 

당신의 「천년여왕」과 같은 글을 좋아한다. 안과 밖이 없고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않고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섬뜩한 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작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야기. 이 글에 담긴 우화적이면서도 동화적인 요소들이 좋았다. 아내는 정말 사람일까.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책을 읽고 기억할 수 있을까. 아내가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는 왜 이곳에, 영원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묻게 되는 오묘한 상황들. 하지만 어디에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명예의 근거로 삼아야 해요. 라는 말처럼 그런 것은 상관없다. 오히려 이 단편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표절에 대한 두려움, 창작에 대한 고뇌, 수많은 책들에 대한 당신의 열등감 같은 것이었다.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든가 모든 책을 다 읽든가. 가난한 내 독서는 전자를 불가능하게 했고 후자를 난망하게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독서에 열을 올렸다. 익히 들어본 작품들을 독서목록의 우선순위에 올렸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처럼 정작 완독한 적은 없지만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들.

 

내가 쓰고자 했던 것은 이미 누군가 다 한 것이더군, 라고 말한 사람 누구였던가. 나 역시 가난한 독서력을 가진 자로서 모두 읽은 자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읽지 않은 자가 되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이미 너무 늦었다. 당신은 아마 작가이기에 창작자이자 독자일 수 밖에 없기에. 이 말은 꼭 당신 자신의 갈애나 괴리감처럼 느껴졌다.

 

두 편의 단편으로 나는 당신을 독서한다. 그가 그녀를, 그의 환자들을 책처럼 읽어냈듯이. 나 역시 당신을 읽는다. 아마도 당신은 작위적인 것을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버틸만큼 강하지 못하다. 거짓말에 능숙하진 않지만 순간적으로 둘러댈 수 있을 정도의 재치는 갖고 있다. 남들은 자신을 이성적인 사람이라 여기지만 스스로는 감성적인 때론 감상적인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두 편의 단편에서는 당신의 낭만성이나 고뇌를 일부 들여다보았다 넘겨짚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허황된 로맨티스트인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핍진성에 근거한 리얼리스트일지도 모른다.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은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와 닮은 면이 있다.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은 현실의 견고함에 바탕을 두지만 우화와 풍자를 끌어들였고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역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다루며 있을법하기에 더 섬짓한 통각을 예민하게 다루었다. 「게임의 규칙」은「황홀한 사춘기」와 닮았다. 이미 지나가버린 어떤 시대를 현재의 어떤 시절에서 바라본다는 것. 과거는 참혹하거나 영광이거나 오류이나 어쨌든 그것들 모두가 현재와는 관련없다는 것. 나는 당신의 조언을 무시하고 당신의 나이를 떠올렸고 당신이 떠올렸을 이십대를 짐작해본다. 책날개를 무시하라고 당신은 말했지만 건방진 독자인 나는 역시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신이 지금 내 나이였다면 내 부모님의 나이였다면 이 책과는 다른 내용이었을거라 짐작하는 것. 그것 역시 자만이자 오류일까. 나는 당신의「공중관람차 타는 여자」는「고독을 빌려드립니다」에서도 비슷한 향수를 느꼈다. 여유로움을 빌리는 자, 과거를 그리워하는 자.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이 그랬듯 "나 돌아갈래"라고 외칠법하다고. 여유로움을 갖기 위해 고독을 없애기 위해 많은 길을 걸었는데 정작 이제와 가장 고독하고 여유로웠던 그러나 그것이 있는줄도 몰랐던 시절을 떠올리는 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명징함이 주는 달콤쌉싸래한 사실의 맛. 거기에「공중관람차 타는 여자」는 향수 위에 사랑을 얹었다.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 나는 엉뚱하게도 거절의 방식과 사랑의 운명에 대해 회의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당신을 다 읽었다. 겨우 한 권의 책을 읽은 것 아니냐,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당신이 읽는 책이 당신의 전부는 아닌 것처럼, 당신이 쓴 책도 당신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책이라는 매개체 내지는 대체물을 읽으면서 타인을 짐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읽은 독자는 다시 또 그 책의 역사를 갖게 된다. 책은 인생의 자서전이 되고 역사의 침전물이 된다. 역시 독서는 위험하다.「위험한 독서」의 그는 그녀에게 책을 쥐어줌으로써 그녀의 고통을 일소시키는데 도움을 줬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독립한다. 나는, 당신을 읽으며 김경욱이라는 책의 앞뒤가 궁금해졌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더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당신이 쓴 책을 기다리게 된다. 그렇게 당신은 내게 책이 되고 책은 내게 당신이 된다.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당신이라는 책, 그리고 당신이 쓴 책을.

 

 

  

 

 

 

* 문학동네 카페와 동시 게재하는 글로, 그림은 구스타프 아돌프 헤니히, <책 읽는 소녀> (1828) 입니다.

전체적인 형식은 『위험한 독서』의 표제작에서 빌리려..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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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26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읽기 전에 추천을 누르고 스크롤을 올렸는데,
글을 모두 읽고나서 놀란 나머지 깜빡잊고 또다시 추천을 눌렀습니다, 그려 ㅎㅎ
<위험한 독서>라는 표제부터 작가에 리뷰까지도 아주 매혹적인 작품인것 같습니다.
저는 언젠가 리뷰를 쓸 때 수많은 책의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은 무척이나 존경해야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오늘로서 샤이닝님을, 아니 언제나 그래왔지만 존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려 ㅎㅎ

Shining 2012-02-27 11:11   좋아요 0 | URL
음? 읽기도 전에 추천을_- 그러면 아니되옵니다ㅋ 읽고 나서 마음에 와닿는 글만 해주시면 됩니다요^^
그런데 저 오늘 소이진님 말이 이해가 잘 안가요ㅠ 수많은 책이 거론되는 사람...아, 제 이해력은
이정도입니다ㅠ 저를 이해시켜주쎄요! 흑ㅠ 그나저나 존경이라니, 쑥스럽습니다 그려ㅋㅋ

아이리시스 2012-03-03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이닝님, 안녕.

이 책 재밌죠? 저도 역시 표제작이 짱 ^_____^ 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널리 알려진 책들을 소개하는데 그중에도 못 읽어본 게 상당해서 저 막 책장 뒤져서 다 꺼내온 기억이 나요.

소이진님 말은 샤이닝님이 글 쓰실 때 이것과 연관된 다른 책들을 많이 거론한다는 애기 같은데(그럼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고) 저도 동의해요. 못 들어본 것도, 들어봤지만 읽지 못한 것도 참 많이 나와요. 샤이닝님 리뷰나 페이퍼에는요. 살짝 질투^^

Shining 2012-03-03 20:12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안녕^^

표제작은 흥미로웠고 <천년여왕>은 재밌었어요. 저 이런 소설 좋아하거든요ㅋ 맞아요, 반가운 책들이 꽤 많이 나오더라구요. 특히 <금각사>는 저도 참 좋아하는 소설!

제가 얼버무린 말도 철썩같이 알아들으시고! 소이진님 말씀까지! 역시 아이리시스님^^b 저도 다른 분들 글 읽으면서 몰래 폭풍질투와 좌절해요, 당연히 아이리시스님도ㅋㅋ 다 똑같군요, 후훗:-)

맥거핀 2012-03-05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글을 읽었어요. 김경욱 작가..새 소설집이 나오면 무엇에라도 홀린 듯 사기는 하는데, 뭐랄까요. 성실한 작가라는 인상이 일단 있구요(뭐 외모 탓일수도 있고).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으나(이런 말을 미리 붙일수록 적절하지 않은 때가 많지만), 남을 웃길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배워서 성실하게 하는 유머들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유머가 웃겨야 하는데, 웃기기 보다는 웃기기위해 애쓰는 모습 그 자체가 더 보인달까요. 얘기도 매우 흥미로운 경우도 많고,문장도 꽤 감탄하게 하지만, 너무 꽉 채우려드는 느낌이 조금은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이 작품보고 꽤나 감탄하기는 했어요.^^)

Shining 2012-03-05 16:57   좋아요 0 | URL
아, 왠지 맥거핀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요. 맞아요, 성실. 김연수 작가의 외적인
성실함하고는 다른 뭔가 문장에서 느껴지는 조심스러움이랄까 섬세함이랄까. 그런데 가끔은
지나치게 성실하다는 느낌도 있고요^^ 오호, 그 책 아직 읽지 못했는데 읽어봐야겠군요+_+

<휴고>가 CGV 단독개봉도 모자라 제가 사는 곳에선 3D는 물론 2D도 제대로 상영을 안 하더군요.
이 영화가 이렇게 규모가 작은 영화였나요?ㅠ 당혹과 당황과 황당의 쓰리콤보입니다ㅠ 속상한 마음에
많이 늦었지만 <범죄와의 전쟁>을 봤습니다.

(저는 맥거핀님을 보면 책 얘기 하다가도 저절로 영화 얘기로 넘어가게 되네요^^;)

맥거핀 2012-03-06 12:50   좋아요 0 | URL
아..그런가요. <휴고>가 예술영화로 분류될 쪽은 아니라고 보는데,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들이 대중적이지 않던 때가 있었나요. 그의 영화들이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오히려 그 극반대죠), 가장 대중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특유의 감각이 충만한 영화들이었는데..아무튼 우리나라의 영화상영 기준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역으로 작은 개봉을 해야할 영화들이, 거대개봉을 하다가 그대로 골로가는 경우들도 있고요. 댓글을 읽다보니 왠지 걱정이 되는게 빨리 달려가서 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에 어..어..하다가 놓친 영화들이 부지기수라.

Shining 2012-03-07 12:45   좋아요 0 | URL
제 말이요! 마틴 스콜세지인데다, 티저 예고편을 보면 판타지와 <올리버 트위스트>의 결합같다고
생각해서 당연히 -나름- 대작인줄 알았거든요ㅠ 스콜세지 옹의 근래작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만큼은 꼭! 그것도 (아바타 이후로 처음으로) 3D에 대한 열의를 태웠는데...

수도권 안 사는 설움은 이럴때 봇물 터지듯 나옵니다ㅠ 제 몫(?)까지 즐거이 보고 오세요,
맥거핀님ㅠ
 
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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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때 그 곳을 기억하니. 황량하다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초라하지만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작업실. 너는 겨울동안 그림에 매진해있었기 때문에 말끔한 손은 언제나 물감이 묻어있기 일쑤였고 그것을 발견하는 건 이상하게도 늘 나였어. 그래서 나는 여분의 손수건을 두어개씩 챙겼던 것을 기억해. 너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그림을 그리는 네 등 뒤에 있는 소파에서 책을 읽었지. 방해가 될까봐 자세도 바꾸지 못한 채 숨죽여 있었지만 너는 그 모습을 보고 놀리듯이 웃었어. 네가 타준 코코아를 홀짝이며 먼지 낀 나무창틈으로 들어오는 아이보리색 햇살에 의지해 책을 읽다 지쳐 잠이 들면 언제나 너의 코트가 덮여 있었어. 물감과 목탄과 종이냄새, 네가 쓰는 향수가 섞인 뭐라 하기 어려운 네 냄새. 날 깨우는 건 시간이나 잠의 양이 아닌 그 냄새였어. 

 

그곳도 기억하겠지. 내가 굳이 우겨서 갔던 처음 가 본 겨울의 바다. 그 해 가장 추웠던 날, 하필 바다를 고른 나는 울상이 되었지만 누구도 한마디 책망이 없었지. w만이 가끔 이죽거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을 뿐이었어. 결국 독감에 걸려 돌아왔지만, 소금기조차 사라진 듯한 그 바다냄새는 지금도 기억해, 놀랍게도 말야. 우리 중 누구도 그날, 아니 여러 날에도 사진을 찍지 않았어. 묘하게도 하나같이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그보다는 아마 우리는 현재를 기록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 거야. 사진을 담는 것은 과거가 될 때를 대비하는 거라고, 우리는 서로의 현재이자 역사가 될 터이니 굳이 과거를 남길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오만하게 말이지. 그래서 w가 외국에서 사진을 잔뜩 찍어 보냈을 때 나는 많이 놀랐고 아주 조금 배신감 비슷한 걸 느꼈어. 색채가 두드러진 과일이 잔뜩 실린 시장과 등(燈)이 예쁜 야경, 그리고 끊임없이 펼쳐진 수평선에 걸친 해를 본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더라. 그리고 다시 그 사진을 보지 않았어.

 

 

며칠 전 한 소설을 읽었어. 누군가의 병실을 지키는 자리에서였어. 그는 이미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웠기에 나는 마치 스스로가 식인상어이거나 저승사자가 된 것 같았어. 조금만 애를 쓰면 나도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몸이었어. 꺼끌꺼끌한 숨이 붙어서 가슴은 가쁘게 움직이고, 눈에는 총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는데 식사 시간과 겨우 몇 분을 제외하고는 그마저도 늘 감은 채 잠들어있었어.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밥을 먹었고 때로는 잠이 부족해 졸기도 했어. 갈퀴 같은 손을 붙잡고 억새풀 같은 머리카락을 넘기기도 하고. 건강한 내 몸이 다행스럽고도 부끄러웠어. 그래, 건강했으니까 그 덥고 두툼한 공기를 견디지 못해 잠시 휴게실로 나왔지. 고작 오 분여 남짓이었을 거야. 그런데 그 사이에 환자가 깨어나서 움직이면서 팔에서 링거가 빠졌던 모양이야. 병실로 돌아갔을 때는 검붉은 피가 눈물처럼 떨어지고 있었어, 이미 바닥이 흥건했지. 급하게 간호사를 불렀고 그녀가 링거와 바닥을 정리해주고 돌아갔어. 환자는 다시 잠이 들었고 환자의 발에 묻은 핏자국을 닦다 보니 내 손도, 신발도 피투성이라는 것을 알았어. 물티슈를 이용해 조심스레 닦아내는데 나는 울고 있더라. 놀라서, 무서워서였을까. 그래, 어쩌면. 하지만 두려워서는 아니었을까.

 

그 병실에서 나는 이 책을 읽었어. 거친 숨과 지나치게 따뜻한 난방, 핏자국을 닦은 라디에이터와 분홍색이 되어버린 물티슈 사이에 앉아서 책을 읽었어. 왜 하필 이 책을 가져왔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곳에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에 그냥 읽기로 했어. 아주 천천히 잠이 들 것처럼 읽었는데도 환자는 여전히 깨지 않았어. 책을 덮고 눈두덩을 만지며 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내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겠니. 너의 기억과 책과 병실의 이야기 사이에 대체 어떤 것들이 빠져 있거나 더해졌는지. 실은 나는 잘 모르겠어. 어떤 것이 어느 것을 불러일으켰는지, 무엇이 무엇을 가르켰는지. 그저 ‘그리고’ 너에게 편지를 써야한다는 생각뿐이었어. 너는 무엇이든 빨리 이해하고, 언제나 논리적이었으니 어쩌면 나도 모르는 인과를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병실에 있었고 책을 읽었고 너를 생각하다 편지를 쓰고 있어.

 

 

내가 읽은 책은 한강의 소설이었어. 『희랍어 시간』이라는 제목이야. 한강의 신간이 나왔다고, 그런데 제목이 희랍어 시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눈을 가늘게 떴어. 뭐라고 할까, 제목에서부터 벌써 고된 느낌이 들었어. 형형한 풍경 그러나 헛헛한 종소리 같은 것이 들렸어. 대외적으로 풀어보면 말을 잃은 여자와 빛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야. 아니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었어. 다만 만나게 되지. 빛을 잃어가는 와중에, 말을 잃어버린 후에. 그냥 그 상태로 거기 있는 상대를 발견해. 격정적인 멜로나 신파 같은 건 아니야. 갑작스럽게 말을 잃은 이의 서툰 독순술(讀脣術)같은, 서서히 빛을 잃은 이의 더듬거림 없는 익숙한 손길 같은 소설이지. 그러니까, 너도 짐작했다시피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글이야.

 

어쩌면 말야. 작가는 어쩌면 이 이야기를 소설이 아닌, 그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누구를 위해서든 무엇을 통해서든 뭔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데, 그것이 자신에게 천착되어 버릴까봐 소설의 형태를 빌린 자기 기록이 아닐까.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 문장과 감정은 또렷하고 선명한데 내용은 흐릿하고 불분명했거든. 그리고 많이 아파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혹은 그 감정의 극단을 짐작하는 사람만이 할 법한 표현과 생각이 있었거든.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소설의 형태를 빌린 일기라고 생각했어.

 

가끔 너무 괴로운 사람들을 소설에서 만날 때, 그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어. 유려한 문장과 첨예한 감각에 감명 받기는 했지만 대체 그녀들은 왜 이리 괴로운가, 생각하곤 했지. 하지만 이제는 그녀들의 아픔이 엄살도 투정도 아님을 알았어. 괴로운 기억을 안고 어쩔 수 없이 그 기억을 공유하며 사는 사람들, 인생이 사실은 불가해한 일 투성이라는 것을 깨지고 넘어지고 다쳐서 알게 된 사람들. 정말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거 말이야. 이 책을 봐봐, 남자는 빛을 잃었고 여자는 말을 잃었어. 하지만 그것만이 둘의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을까? 남자의 성격과 현재를 설명하는 것이 꼭 빛이어야 하고, 여자의 실언을 증명하는 것이 여자의 상황이어야 하는걸까? 아니, 그건 아닐거야.

 

삶에는 뭉툭한 부분과 날카로운 부분이 있고, 옴폭 패인 부분과 오목하게 올라온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이 어떤 단면인지 모르고 그저 묵묵히 걷지. 아픔을, 닿는 순간에에 느낄 수도 있지만, 평평한 길을 걸을 때야 비로소 문득 아, 내가 날카로운 부분에서 발을 베였구나 느낄 때도 있잖아. 깨닫고 나서 지나온 길을 보니 옴폭 패인 곳에 넘어졌던 것 같다고 기억하기도 하고. 이 책에 나오는 남녀가 그런 사람들인 것 같아. 우둘투둘한 길을 걸어오며 피를 흘리는 발, 접지른 발을 갖고도 무심하게 걸어. 자신의 발에서 피가 나는지, 그것이 흐르고 고여 이미 작은 웅덩이를 이루는지도 모른 채 혹은 일부러 보지 않은 채 절룩절룩 그렇게.

 

 

나는 빛을 잃은 적도, 말을 잃은 적도 아마 없겠지만 불현듯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버렸어. 이상하지 않니. 이해한다는 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덧없는 착각인 줄 알면서도 이 둘의 마음을 안다고 느끼는 것이. 나는 사람이 얼마나 좁은 존재인줄 알아. 아아, 그래. 연민은 소모적이고 회한은 소멸되지. 남의 슬픔은 내 것이 될 수 없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지. 어떤 절망의 늪도 타인과 함께 빠지지는 않고, 그 늪을 빠져나온 사람이 반드시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 사람은 적어도 거기에 늪이 있다는 것을 알지. 그런데도. 그냥, 보였어. 행간에서 느껴지는 쉼표와 마침표 사이에 있는, 마침표와 다음 첫글자 사이에 놓인 침묵과 망설임과 두려움 같은 것이. 남자의 비애와 여자의 통탄과 두 사람의 후회와 분노와 절망 같은 것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해버렸어.

 

우습지 않니. 빛을 잃어버린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의 이야기를 읽고 빛 속에서 애써 말로써 감상을 표현한다는 것이, 서글프고 우습지 않니. 좋은 책은 실은 아무 말도 필요가 없지, 그리고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기에 다시 어떤 말이든 하고 싶어지지. 말이란 얼마나 무용한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몰두할 때는 말은 무의미해지지,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지. 말이 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균열이 생기게 될 때야, 점점 커가는 간극을 좁히려 그 간극에 자꾸만 말을 채우게 되지. 

 

그렇다면, 빛을 잃은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빛을 잃은 남자는 말로써 이해시키고 말을 잃은 여자는 빛을 비추어야할까. 남자에게 여자는 빛이 되어주고, 여자에게 남자는 말이 되어줘야 하는 건가. 본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현혹일 수 있기에, 말은 과장이나 실수가 될 수 있으므로 그들은 좀 더 완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남자에게는 빛으로 여자에게는 말로 그렇게 다가가는 것이 차라리 옳은 것은 아닐까.

 

 

병실을 나왔을 때 나는 크게 혼잣말을 하고 뽀얀 해를 올려다봤어. 아직 내게는 빛도 언어도 남아있다는 걸 알았지. 그것을 잃어본 적도 사멸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이 심히 안심이 됐어. 우습지, 말이란 무용한 것, 본다는 것은 행위 이상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과 빛으로 안도하다니.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링거액이 떨어지던 소리처럼 똑,똑, 그 속도처럼 천천히 소리내어 읊었어.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그 말이 얼마나 나를 안심시켰는지. 소금기 어린 바다, 체온이 묻은 머플러, 뼈가 불거진 손목, 착한 나무처럼 곧았던 뒷모습. 그런 것들이 이렇게나 선연한데. 검붉은 피도 푸른 동맥도 가쁜 숨소리도 이렇게나 안타까운데. 남자의 유예도 여자의 정지도 이렇게나 서글픈데. 완전한 것은 없다니. 얼마나 절망 어린 안도감일까.

 

책 속에선 이런 말이 나오지. 스위스에 방문했지만 사진은 찍지 않았다고, 그때는 나와 세계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눈으로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고. 그래, 내가 w의 사진을 외면했던 건 거기에 낙인 찍힌 칼자국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너는 어떠니. 내가 말한 모든 것들을 나조차 모르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겠니. 그때의 너와 세계 사이에 놓인 칼을 나는 알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지금 너와 세계 사이에 놓인 칼은 어떤 것이니. 칼로부터 지킬 수 있는 튼튼한 방패는 찾았을까.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내년이면 너를 만난지 십삼년이 되고, 너를 잃은지 칠년이 되는구나. 이제 너를 만났던 시간보다 너를 잃은 시간이 더 길어졌어. 하지만 나는 너를 만난 시간부터를 재는 것이 버릇이 됐어. 내가 지금의 너를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야. 때때로, 너를 만난 육년이 없었다면 너를 잃은 칠년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그러니 너를 잃은 일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야. 만나지 않은 것보다 잃는 것이 나을테니 말야. 

 

네가 내쪽으로 등을 돌리는 찰나의 너의 머리카락이 흩어지던 모양과 네가 쓰던 향수로만은 절대 재현하지 못하는 너의 냄새와

연필을 쥐던 습관과 곧은 이마, 암갈색 눈동자가 온기를 품던 순간의 벅참. 믿기지 않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알고 있어. 그것이, 그 기억이 나의 빛이자 언어가 되어줄 지도 모르지.

 

이것은 꿈이 아닐거야. 꿈이라면 이 모든 것이 이토록 선명하고 이렇게 모호할 수는 없으니까.

이것은 꿈이 아닐거야, 분명. 네가 있는 세계가 꿈일리는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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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24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

리뷰도 좋고, 문장도 좋고, 한강의 문장도 좋고.
이거이거, 갈수록 [희랍어 시간] 읽고 싶지 말입니다..

Shining 2011-12-25 13:05   좋아요 0 | URL
크리스마스 재밌게 보내고 있어요?^^

고마워요, 이건 실은 개인적인 이야기인데도 좋다고 해줘서.
<희랍어 시간> 참 좋아요, 그냥 읽어도 좋았겠지만 이걸 읽은 때가 `지금`이어서
저는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1-12-24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립다.. 그리워요, 무언가가. 보고 있을 거예요, 편지가 도착했을 거예요. 샤이닝님이 보냈으니까. 우리들 추억은 참 각각이군요. 추억을 꺼내놓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써주어서 고마워요. 소설보다 더 좋네요, 이 이야기가 훨씬 더. 너무 그리워하지 마요, 그리워서 아름답지만, 부럽기도 하지만, 아프니까요. [희랍어 시간]의 문장은 정말 좋아요, 색다르고 낯설어요, 샤이닝님의 글로 다시 읽으니 제가 책을 대충 읽었나 싶기도 하구요. 우리 꿈이 되지 말고 살아요. 그러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lots of luck for you.

Shining 2011-12-25 13:13   좋아요 0 | URL
저 리뷰 쓴다고 구두 약속 한 적 있잖아요. 지킨거에요-_-* <희랍어 시간>은 거의 압도될만큼 좋아서, 오랜만에 책을 읽고 멍해졌어요.

실은 며칠 전에 쓴 글인데 올릴까 말까 계속 고민했어요. 리뷰 섹션엔 리뷰를 써야 마땅하지만 결국 이 얘기밖엔 할 수가 없었거든요. 편지를 띄우긴 했지만, 상대방이 봐주길 원하는지 보지 않길 원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그랬는데, 써줘서 고맙다고 해서 고마워요, 진짜로. 체온이 0.5도는 상승한 기분이에요, 지금. 행운까지 빌어주시다니, 아름다운 크리스마스군요^^

2011-12-2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입니다. 추천을 한 번만 누르기엔 아쉬운 느낌이네요.
그나저나 누가 그렇게 많이 아프신 걸까요.
요즘은 사람들이 아픈 게 정말 슬프고 싫습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파서 요즘 슬프거든요.

저는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했지만, 한강에 대해 이상한 호감을 품고 있습니다. 사실 <희랍어 시간>만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소설을 꼭 읽을 거예요. (한강씨에 대한 리뷰를 읽으며 왠지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소설가다, 했고요. 그리고 한강씨의 아버지가 한승원씨라는 것, 한강씨는 내가 아는 딱 두 명의 동지 중 하나라는 것. 그 세 가지 때문에 호감을 품고 있어요. 부연>`동지`라 함은, 제가 너무 좋아하는 "딱다구리 그레이트 북스"를 어린 날에 나처럼 소중하게 읽은 사람을 얘기하는데요. 저의 대학교 친구 한 명과 한강씨. 살아오면서 이렇게 두 명 발견했거든요. ^^)

Shining 2011-12-27 23:11   좋아요 0 | URL
누군가의 곁에 서있는데 창가에서 검은 것이 안을 침범하려고 기웃거리는 걸 봐버렸어요.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런 것들도 어느정도는 능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걸까요? 그건 아니겠죠. 맘이 스산해요. 섬님의 가까운 분도 어서 쾌차하시면 좋겠네요..

좋아하실 것 같아요, 타인의 취향을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지만^^; 섬님이 좋아하실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웃음).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라.. 저는 모르겠어요, 이런, 동지가 될 수 없겠어요ㅠ

요다 2025-01-04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읽는 동안 내 마음이 섬세하고 여려진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 주목할 만한 소설 비평 좌담
박진.김남혁.장성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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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담하고 잘 꾸며진 그러나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단골 주점에 있다. 오늘따라 손님은 평소보다도 없고 시끄러운 사람들도 없어서 한산하다. 당신의 옆 테이블에서는 독서토론이 한창이다. 함께 술을 마시러 온 친구는 애인과의 통화(정확히는 말싸움인가)로 한창 열을 내다 나갔다 온다는 눈짓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심심하고 무료한 당신은 멍하니 있다 당신의 귓가를 매만지는 소리에 몸을 살짝 기울인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 당신 역시 책을 꽤 좋아하는데다 그들이 말하는 책은 대부분 당신도 읽은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책들을 읽고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들이 정밀한 표현과 현학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게다가 박식한 내용과 섬세한 태도까지. 흥미가 일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아닌 척 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한 발 더 다가간다.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언제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자작(自酌)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이런 기분으로 책을 읽게 되지 않을까. 이 책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나 말하지 않았던 것들, 혹은 말할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은 엄격히 말하자면 비평집이다. 평론집이라 하면, 도무지 일상적으로 쓰일 것 같지 않은 언어들만으로 작심하듯 골라내 엮고 엮어 자기네끼리만 숙덕거리는 느낌을 받기 쉽다. 혹은 어려운 말들이 마치 자신의 권위를 세워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게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언어들만을 쓰고 뿌듯해하는 얄미운 얼굴들이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평론집’이란 말이 무색하게 즐겁다. 유연한 언어와 일상적인 논제와 소설을 읽는 당신이라면 누구든 동참할 수 있는 주제를 갖추고 있되 -좌담을 녹취한 형식이라- 읽기에도 수월하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주제 자체가 흥미진진하다는 것이다. 보통의 평론집은 거의 해설집에 가깝기 마련이다. 과연 작가가 저런 생각으로 글을 썼을까 의구심이 들만큼 분석적이고 집요하다. 한 작가의 작품 전반에 대해 혹은 한 작품의 한 문단 한 문장 지나치게 낱낱이 분석한다. 때문에 보통의 독자들은 평론집을 읽지 않는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외려 이해를 방해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이 책의 주제는 노골적이고 재밌다. 실은 잡담거리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아, 정말 재밌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앉은 자리에서 서너장 넘겨보다 결국 다 읽고 말았다.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고 물 마시는 것도 멈춘 채 책장을 팔랑팔랑 잘도 넘어간다.

허나 아무리 재밌고 읽기 편해도 이 책은 어디까지나 ‘비평집’이다. 때문에 해당하는 책이나 작가에 대해 읽지 않았다면 무지막지하게 재미없는 책이 될 것이다. 아니, 이 책을 읽지 않으며 실은 읽을 수도 없다. 좀 더 풀어 말하자면 해당하는 책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선입견을 만들까봐 비평을 읽을 수 없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장정일에 대한 담론과 <최근의 문학상 수상작, 어떻게 달라졌나?>에 인용된 네 소설을 읽지 않은 죄로(!) 두 주제에 대해선 눈으로 훑는 정도에만 그쳤다.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이야기에 낀단 말인가, 비록 남의 술자리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아니다, 이 말에는 큰 허점이 있다. 만약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면, 출판계의 동향이야 어떻든지 관심이 없다면 애초에 이 책을 고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고른 사람이라면 무섭도록 달려가며 읽게 될 것이고, 읽지 않을 사람은 이 책의 존재 자체, 존재의 의미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많은 책장에 꽂힌 한 권의 책이고, 신간에 나타난 새 책일 뿐이며, 그저 글자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커다란 둘레처럼 느낄 것이다. 그들의 귀에 눈에 손에 이 책은 필터링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명확한 독자 타깃과 고정독자를 갖추고 있다. 소설을 읽는 당신, 그것도 좋아하는 당신, 소설의 미래를 걱정하는 당신, 다른 이와 함께 소설에 대해 말하고 싶은 당신만이 이 책을 연다. 그리고 나의 리뷰를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 그렇다.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지겨운 말이긴 하지만 이 책은 평론집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음에 쏙 든 문단을 발췌하라면 그 이야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모두 밝혀야만 하고, 때문에 특정한 주제나 발언을 언급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이 책이 쓰여진 맥락 자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 누군가 책에 대한,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을 읽는 그 자체가 즐겁게 만든다. 그 중에 고개를 삼십번 쯤 끄덕이게 만든 부분들을 어렵사리 옮기자면 이런 것들.  


박진 맞다. 소설은 독자마다 자기 리듬에 맞게 감상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반면에, 영화는 러닝타임이라는 일정한 시간 동안 영화의 속도를 그대로 따라가며 감상해야 한다. 이 점이 수용자뿐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너무 난해하거나 복잡해지면 관객들이 이미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돼버리고, 그러면 결국 실패한 영화가 되고 마니까.

장성규 그래도 소설이 원작인 영화들은 다른 영화들보다는 좋아하는 편이다. 문자 텍스트의 내러티브가 다른 매체를 통해 변형되는 모습을 보면, 원작에서 읽어내지 못했던 점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가 단순히 소설의 내러티브를 영상으로 그대로 옮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소설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재현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 문법의 특성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한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반대로 영화 문법이 지니는 고유성을 통해서 소설 문법이 보여주지 못하는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면 의미가 클 것이다. (성공한 소설의 영화화란 어떤 형태인가?)


김남혁 희뿌연 화면 처리를 통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관객들이 눈먼 자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하고 눈먼 자들이 받는 고통을 추체험하게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핵심은 오히려 ‘눈뜬 자’의 고통과 연대의식이다. 눈뜬 자인 의사의 아내는 눈먼 자들보다 더 큰 고통을 느낀다. 그녀는 두 개의 지옥, 그러니까 국가와 군인들의 공권력이 만드는 하나의 지옥과 공권력의 피해자인 눈먼 자들이 만드는 또 하나의 지옥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이 못 보는 지옥을 지켜보면서 의사의 아내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사실 이 소설에서 눈뜬 자는 의사의 아내 한 사람만은 아니다. 눈을 뜬 사람은 의사의 아내와 화자와 독자, 이렇게 세 명이다. 의사의 아내가 느끼는 고통과 책임감은 곧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는 독자와 자신을 시종 ‘우리’라고 명명함으로써 독자들로부터 눈먼 자들의 지옥을 못 본 척하지 않는 책임감을 이끌어낸다.

박진 정말 그렇다. 소설에 수시로 나오는 ‘우리’라는 호명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김남혁 그런데 영화에서는 ‘우리’라는 인칭으로 개입하는 화자의 효과가 사라져 있다. 그래서 영화는 ‘당신(관객)은 유일하게 눈뜬 자이니, 의사의 아내와 같은 고통과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각성을 유도하지도 못한다. 영화는 그저 눈먼 자들의 고통을 관음증적으로 구경하게 한다. 원작과 다르게 영화는 눈이 보이는 자들의 고통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에서 의사의 아내는 소설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스크린 셀러 현상에 대한 담화 중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 대해)


박진 같은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이 소설은 충분히 낭만적이고 충분히 비극적이고, 게다가 시대 현실에 대해서까지 말하는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포장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청춘의 고뇌나 낭만적인 사랑과 더불어 80년대 시대 상황까지 말해주는, 굉장히 진지한 소설을 읽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는 그냥 좀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읽는 것보다 훨씬 큰 만족감을 줄 수 있다. 그걸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은 사실이다.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대해)


김남혁 2000년대 소설에 눈가 등장하는지를 떠올려보면 2000년대 사회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8,90년대 소설에는 민중이나 시민이라는 혁명 주체가 등장했다. 그런데 2000년대 소설에는 속물, 마니아, 백수가 등장한다. 백수하면 이기호, 마니아하면 김중혁, 속물하면 정이현 등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백수들은 자포자기해서 골방에 있고, 속물들은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한 채 강남을 활보하고, 마니아들은 자기 관심사 외에는 세상과 단절된 채 유폐되어 있다. 이 세 무리는 사회가 변혁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사회에 대해 불만이 있어도 사회는 원래 이런 거라고 냉소한다. 이 세 무리가 만들어내는 2000년대 사회는 이른바 출구 없는 감옥이다.


박진 한 가지 덧붙이자면, 따뜻한 위로든 차가운 위로든, 위로를 주는 소설들에 대해 무조건 비난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조건들과 대중들의 요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 사회심리적 의미를 다루는 섬세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대중문학’은 도피적인 위안을 주고 ‘본격문학’은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는식의 편리한 구분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박진 (전략) 그런데 위로라고 해도 다 같은 위로는 아닐 것이다. 현실의 고통을 감추면서 아직도 세상은 살 만하다고, 너만 잘하면 괜찮다고 말하는 위로가 있는 반면, 현실이 정말 끔찍하고 견디기 어렵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힘을 주고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위로도 있다. 황정은 소설이 주는 위로는 이 두 번째에 속한다. 누구보다 정직하게 현실의 고통을 응시하지만, 그럼에도 분노나 냉소보다 더 큰 힘을 주는 소설이라서 각별히 소중하게 느껴진다. (2010년 놓치기 아까운 소설 중 황정은의 『백(百)의 그림자』에 대해)


나는 소설의 힘을 위로라고 말했다. 소설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시대에 위로와 청춘라는 말이 난무하는 책들 속에서. 소설은 마치 한 마리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왔고 기꺼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었다. 어떤 날에는 연출된 기쁨을 골랐다. 그때 소설은 구세주가 되고 기꺼이 기쁨조가 되었다. 슬퍼하기 위해, 아프고 싶어서 읽을 때는 자학이나 자기기만의 도구가 되었다. 그렇게 샴푸의 종류나 립스틱의 색깔을 고르듯 소설을 선택하기도 했다. 허나 결국엔 특별히 좋아하는 샴푸의 향기, 얼굴색을 밝게 해주는 립스틱만을 남기듯이 마음안에 고이는 것만이 남았다.

물론 오직 위로를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 모든 가구와 환경과 인물과 직업과 하다못해 쓰레기까지 설정해가며 그 안에 숨을 불어넣는 이유가 어찌 위로뿐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떤 글을 읽고 가장 공명했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가 나를 위안한 글들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따뜻한 격려든 차가운 독려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험의 스펙트럼을 통한 결과이며 때문에 모든 독자는 것은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라는 프루스트의 말에 이보다 더 공감할 수는 없다.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술어라고 하지만 때론 접속어에 더 큰 무게가 실릴때도 있다. 예컨대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에서 제일 주목해야할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모든 사랑에는 매력과 장점만 있는게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래서의 힘으로 이겨나가지 않는가. 그래서와 그래도 사이에서. 그래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

이 책에는 문학이 문화산업의 일부가 되고 독서에 미치는 마케팅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져가는 상황에 대한 걱정과 비판도 담겨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어떤 소설을 선택해야 하는지, 바로 지금 좋은 소설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매번 다시 묻고 고민해야만 했다. 문학을 둘러싼 지금의 상황들은 이렇듯 별로 낙관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이 주는 즐거움과 감동, 소설이 이끌어내는 다양한 생각들과 진지한 고민들이 여전히 우기에겐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그래도’와 ‘그래서’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 이 책의 제목은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론 中)

공감을 넘는 동감의 마음이 생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까닭이 그래도여도 물론 좋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라는 말이 왠지 더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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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1-09-14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워요!! 황정은 소설이 내게 다른 소설과 다르게 다가온 부분이 정말 거기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요...재밌네요 :)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

Shining 2011-09-16 00:02   좋아요 0 | URL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는 정말...읽으면서 몇번이나 화들짝 놀랐어요. 처음엔 난해해서, 그 다음엔 좋아서. 웬디양에게도 이 책이 좋은 책으로 읽혔으면 좋겠는데요^^

2011-09-14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6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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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은 준비운동을 한다. 계곡물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 몸을 적시고 수영을 하기 전 스트레칭을 하듯. 김유진의 『숨은 밤』을 읽으려고 『늑대의 문장』을 먼저 집어 들었고 김이설의 『환영』을 읽기 위해 『나쁜 피』를 읽었다. 『나쁜 피』를 손에 들고 당신은 움찔 놀란다. 예쁜 빨간색이다. 잿빛과 핏빛의 중간쯤 되는 선홍색이었다. 어쩐지 불온한 기분이 든다. 당신은 그 계시를 무시한 채 책을 연다. 아무데나 쭈그려 앉아 금세 몰두한다. 길이는 짧지만 부피가 대단히 큰 소설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은 일순 가벼운 빈혈을 느낀다. 선홍빛 책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린다. 당신은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즉홍적인 충동을 무시한다. 즉홍적인 것은 언제나 위험하고, 책을 집어던지는 것은 당신이 -아마도 절대- 할 수 없는 행위 중 하나다. 그래서 대신에 당신은 억지스러운 가벼운 미소까지 띄우며 자리를 벗어난다, 아무도 당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그렇게 한다. 『환영』을 받았다. 아직 젊다는 말이 어울리는 여자의 외출 전 뒷모습이다. 당신은 이런 표지가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의 어느 순간을 포착해낸 듯한 모습, 모른 척 해야 했던 그러나 알아버린 무언가를 목도하는 순간의 처참함을 느낀다. 표지가 마음에 걸린다, 제목은 더욱이 비릿하다. 모르고 목으로 넘겨버린 생선가시가 갑자기 나 여기 있다며 목구멍의 깊은 안쪽에서 꿈틀대는 것 같다. 하지만 한숨을 쉰다. 불안함은 호기심 앞에 언제나 무릎을 꿇기 마련이다. 

 

당신은 불현듯 지금 활동 중인 한국영화 감독을 몇 명 떠올린다. 이창동, 봉준호, 홍상수, 박찬욱, 김기덕. 전혀 닮지 않은 그러나 각각 다른 이유로 대가로 칭송받는 이들이다. 당신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잠시 멈춰서 생각한다. 이창동은 존경한다. 봉준호는 좋아한다, 아니 감탄한다. 홍상수는 당신에게 판단이 유보된 사람이다. 박찬욱과 김기덕의 이름을 입에 담고 당신은 망설인다. 박찬욱의 영민함과 남다름을 인정하지만 그의 그로테스크함은 여전히 의문이다. 김기덕의 영화를 보면서는 경악한다. 당신은 <나쁜 남자>를 보면서 거의 정신적으로 토악질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물론 당신도 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예술이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가장 참혹한 것이 저열함을 뜻하는 것은 아님을. 박찬욱 감독이 자신이 에세이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 모든 영화감독들이 허진호와 같은 영화를 -멜로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닌 것도. 하지만 꼭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해야 했는지 당신은 자문한다. 인간의 어두움, 이기심, 허기와 탐욕을 꼭 이런 방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지 불평한다.

당신이 읽은 김이설 작가의 두 책은 마치 김기덕 감독의 영화 같았다. 그 안에 담긴 촉감과 깊이와 조도(照度), 냄새는 물론 내용마저도 닮았다. 그들이 애써 만들어낸 것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침을 퉤, 뱉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관에 나와서 밝은 햇살을 축복하고 책을 덮고 나서 자신의 현실에 안위하게 만드는 것. 당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릴 것 같았고 슉 하고 군내 나는 낯선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내용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외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싶었다. 『환영』은 장편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중편에서 조금 더 보탠 정도의 글이다. 페이지만 짧은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가 짧고 건조하다. 하드보일드에서나 볼 법한, 헤밍웨이가 쓸 법한 단순한 구조를 가진 단문의 문장뿐이다. 작가의 단문에는 운율과 리듬이 있다. 그래서 당신은 이 지긋지긋한 내용을 물 흐르듯 한 번도 막힘없이 읽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게다가 이렇게나 기가 차는 경악스러운 상황들을 연이어서 늘어놓고 정작 자신은 남의 얘기를 하듯 담담하다. 귀찮다 못해 무기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한쪽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후비며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귀지를 후 하고 불어내는 말투다. 물의 낙하소리와 계절의 미묘한 변화만이 유일하게 작가가 개입해서 묘사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체념한 나른한 동시에 억센 여인의 목소리가 오히려 이 상황의 비참함을 강렬하게 대비시킨다.

무엇보다 당신은 인물들의 생동감에 감탄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을 그야말로 노련하게 재생시켰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살아서 숨 쉰다. 그저 ‘현실에 있을법한 인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팝업북을 펼치기라도 한 듯 입체감이 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작가들의 캐릭터가 2D라면 그녀의 인물들은 3D나 4D 어떨 때는 아이맥스 정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뱉는 침은 당신이 서 있는 땅바닥에 끈적거리며 떨어지고 오토바이의 굉음은 귀를 찢을 듯 하고 닭기름의 미끌미끌한 감촉들이 손가락에 묻었으며 걷지 못하는 간난쟁이의 젖냄새는 당신의 코를 자극한다. 덕분에 당신은 캐릭터에 더 몰입할 수 있지만 동시에 더 끔찍하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냄새나 감각이나 이명처럼 글을 읽고 나서는 많은 것들이 당신 곁에 찰싹 달라붙는 것 같아 당신은 기겁을 하며 머리카락을 털고 씻고 갈아입게 된다. 작가는 생동감을 그려내는 특별한 재주를 지녔을 뿐 아니라 냉담하고 하드보일드하다. 행복이란 몇 가지를 끊어내고 몇 개를 바꾸거나 노력한다고 해서 쉬이 손에 닿는 것이 아님을. 마지막에는 해피 엔드, 라는 건 드라마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면서 작가의 냉담함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냉담함을 품기 위한 노력에 마음이 아린다.  

 

이제 당신은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해야한다, 아무리 내키지 않다 하더라도. 하지만 당신은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하는지, 기실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 윤영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간암에 걸린 아버지가 시작인가, 민영의 가당찮은 사업이 이유인가, 덜컥 생긴 애가 문제인가, 공부는 전혀 하지 않는 남편의 탓인가. 그 모두가 원인인 동시에 결과다. 게다가 이제 와서 내 실수와 너의 과오, 너의 미련함과 그의 아둔함을 탓해서 무엇하겠는가. 어느 것도 바뀌지도 되짚을 수도 뒤집을 수도 없는 뻔뻔한 사실들일 뿐이다. 

윤영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억척스러운 여자라고 당신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은 이 여인을 욕하지 않는다. 저것 외에도 사는 방법이 있노라고 다 당신 탓이라고 싸늘하고 적당한 경멸을 던지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렇게 살면 안 된다고 당신은 불행을 자초한 거라고 멀찍이 서서 혐오해서도 안 된다. 나라면 절대 저런 식의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거만하게 장담해서도 안 된다. 그건 바닥까지 가 본 사람들만이 아는 것이었다. 인생의 바닥을, 마치 얼마 남지 않은 잼통의 밑바닥을 긁어 모으듯 삶의 밑바닥을 허우적 대본 적 없는 이들은 누구도 윤영을 욕해선 안 된다. 당신은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삶도 내 의지와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어째서 또 다시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익숙한 착각에 빠졌을까. 때론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주먹에서 휘둘리고 있다고 당신 역시 생각해본적이 있지 않은가. 나 자신의 삶조차 그러할진데 윤영처럼 주위의 모든 것들이 당신을 버리고 벼린다면, 당신은 윤영보다 더 순결한 삶을 살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윤영이, 윤영의 가족이 과하다고? 아니다, 당신은 알고 있다. 가족이란 때때로 정말이지 갖다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가족은 서로에게 이보다 더 심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하고 있다는 걸. 가족이기에 더 못 견딜 일도 얼마든지 있다는 걸. 불행하게도 당신도 대충은 안다.

인간은 때론 놀랍다. 어떻게 저런 일들을 모두 겪은 채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런 일들을 겪고도 살아남는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두고 죽을 용기로 살지, 라고 쉽게 말하지만 어떤 이들은 사는 게 죽는 것보다 힘들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의 생(生)의 무게, 삶의 이유와 존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수가 없다. 당신은 내가 아니고 그녀가 아니며 그녀는 내가 아니고 당신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은 언제까지고 ‘당신’으로 남아 그녀를 바라본다. 당신은 그녀를 응원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다. 말릴 수도 없고 격려할 수는 더더욱 없다. 모든 일이 다 잘 될거라는, 시간이 해결해줄거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도 지껄일 수 없다. 그저 바라본다. 외출준비를 끝낸 그녀가 구두를 신는 순간 그녀는 ‘나’가 아닌 ‘당신’일 뿐이다. 

 

당신은 여전히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김이설 작가 역시 좋아하고 싶지 않다. 당신은 선뜻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당신의 좁은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곱고 축복받은, 번듯한 길을 놔두고 진흙이 질척대는 어렵고 외면 받는 길을 걷는 그들이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는 분명 이따위 것이 문학이냐고 예술이냐고 말할 수도 있고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냐며 눈을 크게 뜨며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들은 당신들의 전기(傳記)를 뒤적이며 당신을 프로파일링하며 제 멋대로 근거를 짐작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가족들조차 타인에게 자랑할 수도 없다.

작가란 차암 잔인한 사람이에요. 이 소설을 쓰는 도중, 아내는 어느 날 눈시울 붉히며 말했습니다. 작가가 울지 않으면 독자도 울지 않는다는 '조지 무어'의 말은 한편에선 진실이고 한편에선 거짓입니다. 아내는 그 양쪽 편을 보지 못하여 상처 받았고, 나는 그 양쪽 편을 보았기 때문에 상처받았습니다. 이것은 소설일 뿐야.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가공의 인물이란 말야.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박범신 - 킬리만자로의 눈꽃, 작가의 말 중)

"무엇보다도 이 소설 때문에 나처럼 괴로웠을 남편에게 각별한 감사를 건넨다. '내가 쓰는 소설의 의미'와 '식구가 쓰는 소설의 의미'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이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언제나 나에게 최선인 남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김이설 - 환영, 작가의 말 중)

물론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쓰고 싶은 글을 안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상처를 받게 될 남편에게 미안해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작가란 차암 잔인하다는 말, 작가의 아내로써 살아간다는 그 무게감을 담은 말 앞에서 당신은 박범신 작가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식구가 쓰는 소설’과 ‘작가가 쓰는 소설’의 의미 앞에서 머뭇거리며 인내했을 김이설 작가의 남편에게 덩달아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작가가 작가로서만 살아간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 그런데 아내로서의 엄마로서의 가족으로서의 모습보다 작가로서의 모습을 우위에 둘 수 밖에 없었다는 것. 하필 이렇게 토악질 나는 생생한 절망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아름답고 몽실몽실한 길을 놔두고 기어이 그 길로 가고 말리라는 고독한 전언. 언제까지고 ‘당신’일 수 밖에 없는 당신은, 그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감정과는 별개로 당신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김이설 작가의 책을 읽는다. 기어이 그 길로 가고야 마는 당신, 나는 당신 옆에서 작지만 또렷한 호롱불을 비춘다. 그것은 당신으로써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니까.

   

 

  

 

덧) 인칭을 구별 할 수 없는 이상한 리뷰. 애초에 '당신'은 독자인 '나'를 의식하고 쓴 관찰문이었다. 나 자신을 '당신'으로써 떼어놓고 쓰겠다는 의미이자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소설과 지나치게 가까워져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당신'으로서 나는 타자로써 윤영을 결국 관찰하고 관망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조의 의미로 썼다. 

하지만 쓰다 보니 기본형인 당신 1(독자로서의 나)을 필두로 소설 속 윤영을 가르키는 당신(2)과 불특정다수의 독자를 향한 당신(3) 그리고 작가를 향한당신(4)까지 다양한 의미로서의 당신이 난립하게 되어버렸다. 모호하지만 그 모호함조차 특성이라 변명해보며 구분되지 않은 '당신'이 판치는 이상한 리뷰가 되었다.   

현기증나는 현실만을 묶어 재현한 이 책을 읽고 가장 깊게 사로잡힌 생각은 '문학의 숭고함'에 대해서였다. 참 이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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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영화와 '그런' 문학도 당연히 필요한데, 손이 냉큼 뻗지는 않아요. 박찬욱 영화 하나 빼고 다 보고, 김기덕 영화 반 정도는 본 사람이 할 얘긴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그나저나 이제 진짜 김기덕 영화는 손이 안 뻗나 봐요. <풍산개> 안 봐지더라고요. 나이 먹어 그런가, 자극이 싫어요.ㅎㅎ)

Shining 2011-08-03 11:59   좋아요 0 | URL
저는 박찬욱 감독은 '역시 세련되고 똑똑하다'고 매번 생각하지만 '좋다'라는 느낌은 못 받는 편이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볼때마다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지' 하게 되요-_-;; 하지만 미안하고 고맙고 거북하고; 늘 복잡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고요.

아, 김이설 작가는요 (비록 두 권 밖에 안 읽어봤지만^^;) 독특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구병모 작가의 『아가미』처럼 그러나 조금 다른 의미로 놀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