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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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준비운동을 한다. 계곡물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 몸을 적시고 수영을 하기 전 스트레칭을 하듯. 김유진의 『숨은 밤』을 읽으려고 『늑대의 문장』을 먼저 집어 들었고 김이설의 『환영』을 읽기 위해 『나쁜 피』를 읽었다. 『나쁜 피』를 손에 들고 당신은 움찔 놀란다. 예쁜 빨간색이다. 잿빛과 핏빛의 중간쯤 되는 선홍색이었다. 어쩐지 불온한 기분이 든다. 당신은 그 계시를 무시한 채 책을 연다. 아무데나 쭈그려 앉아 금세 몰두한다. 길이는 짧지만 부피가 대단히 큰 소설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은 일순 가벼운 빈혈을 느낀다. 선홍빛 책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린다. 당신은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즉홍적인 충동을 무시한다. 즉홍적인 것은 언제나 위험하고, 책을 집어던지는 것은 당신이 -아마도 절대- 할 수 없는 행위 중 하나다. 그래서 대신에 당신은 억지스러운 가벼운 미소까지 띄우며 자리를 벗어난다, 아무도 당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그렇게 한다. 『환영』을 받았다. 아직 젊다는 말이 어울리는 여자의 외출 전 뒷모습이다. 당신은 이런 표지가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의 어느 순간을 포착해낸 듯한 모습, 모른 척 해야 했던 그러나 알아버린 무언가를 목도하는 순간의 처참함을 느낀다. 표지가 마음에 걸린다, 제목은 더욱이 비릿하다. 모르고 목으로 넘겨버린 생선가시가 갑자기 나 여기 있다며 목구멍의 깊은 안쪽에서 꿈틀대는 것 같다. 하지만 한숨을 쉰다. 불안함은 호기심 앞에 언제나 무릎을 꿇기 마련이다. 

 

당신은 불현듯 지금 활동 중인 한국영화 감독을 몇 명 떠올린다. 이창동, 봉준호, 홍상수, 박찬욱, 김기덕. 전혀 닮지 않은 그러나 각각 다른 이유로 대가로 칭송받는 이들이다. 당신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잠시 멈춰서 생각한다. 이창동은 존경한다. 봉준호는 좋아한다, 아니 감탄한다. 홍상수는 당신에게 판단이 유보된 사람이다. 박찬욱과 김기덕의 이름을 입에 담고 당신은 망설인다. 박찬욱의 영민함과 남다름을 인정하지만 그의 그로테스크함은 여전히 의문이다. 김기덕의 영화를 보면서는 경악한다. 당신은 <나쁜 남자>를 보면서 거의 정신적으로 토악질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물론 당신도 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예술이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가장 참혹한 것이 저열함을 뜻하는 것은 아님을. 박찬욱 감독이 자신이 에세이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 모든 영화감독들이 허진호와 같은 영화를 -멜로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닌 것도. 하지만 꼭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해야 했는지 당신은 자문한다. 인간의 어두움, 이기심, 허기와 탐욕을 꼭 이런 방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지 불평한다.

당신이 읽은 김이설 작가의 두 책은 마치 김기덕 감독의 영화 같았다. 그 안에 담긴 촉감과 깊이와 조도(照度), 냄새는 물론 내용마저도 닮았다. 그들이 애써 만들어낸 것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침을 퉤, 뱉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관에 나와서 밝은 햇살을 축복하고 책을 덮고 나서 자신의 현실에 안위하게 만드는 것. 당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릴 것 같았고 슉 하고 군내 나는 낯선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내용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외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싶었다. 『환영』은 장편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중편에서 조금 더 보탠 정도의 글이다. 페이지만 짧은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가 짧고 건조하다. 하드보일드에서나 볼 법한, 헤밍웨이가 쓸 법한 단순한 구조를 가진 단문의 문장뿐이다. 작가의 단문에는 운율과 리듬이 있다. 그래서 당신은 이 지긋지긋한 내용을 물 흐르듯 한 번도 막힘없이 읽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게다가 이렇게나 기가 차는 경악스러운 상황들을 연이어서 늘어놓고 정작 자신은 남의 얘기를 하듯 담담하다. 귀찮다 못해 무기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한쪽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후비며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귀지를 후 하고 불어내는 말투다. 물의 낙하소리와 계절의 미묘한 변화만이 유일하게 작가가 개입해서 묘사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체념한 나른한 동시에 억센 여인의 목소리가 오히려 이 상황의 비참함을 강렬하게 대비시킨다.

무엇보다 당신은 인물들의 생동감에 감탄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을 그야말로 노련하게 재생시켰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살아서 숨 쉰다. 그저 ‘현실에 있을법한 인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팝업북을 펼치기라도 한 듯 입체감이 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작가들의 캐릭터가 2D라면 그녀의 인물들은 3D나 4D 어떨 때는 아이맥스 정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뱉는 침은 당신이 서 있는 땅바닥에 끈적거리며 떨어지고 오토바이의 굉음은 귀를 찢을 듯 하고 닭기름의 미끌미끌한 감촉들이 손가락에 묻었으며 걷지 못하는 간난쟁이의 젖냄새는 당신의 코를 자극한다. 덕분에 당신은 캐릭터에 더 몰입할 수 있지만 동시에 더 끔찍하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냄새나 감각이나 이명처럼 글을 읽고 나서는 많은 것들이 당신 곁에 찰싹 달라붙는 것 같아 당신은 기겁을 하며 머리카락을 털고 씻고 갈아입게 된다. 작가는 생동감을 그려내는 특별한 재주를 지녔을 뿐 아니라 냉담하고 하드보일드하다. 행복이란 몇 가지를 끊어내고 몇 개를 바꾸거나 노력한다고 해서 쉬이 손에 닿는 것이 아님을. 마지막에는 해피 엔드, 라는 건 드라마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면서 작가의 냉담함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냉담함을 품기 위한 노력에 마음이 아린다.  

 

이제 당신은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해야한다, 아무리 내키지 않다 하더라도. 하지만 당신은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하는지, 기실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 윤영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간암에 걸린 아버지가 시작인가, 민영의 가당찮은 사업이 이유인가, 덜컥 생긴 애가 문제인가, 공부는 전혀 하지 않는 남편의 탓인가. 그 모두가 원인인 동시에 결과다. 게다가 이제 와서 내 실수와 너의 과오, 너의 미련함과 그의 아둔함을 탓해서 무엇하겠는가. 어느 것도 바뀌지도 되짚을 수도 뒤집을 수도 없는 뻔뻔한 사실들일 뿐이다. 

윤영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억척스러운 여자라고 당신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은 이 여인을 욕하지 않는다. 저것 외에도 사는 방법이 있노라고 다 당신 탓이라고 싸늘하고 적당한 경멸을 던지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렇게 살면 안 된다고 당신은 불행을 자초한 거라고 멀찍이 서서 혐오해서도 안 된다. 나라면 절대 저런 식의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거만하게 장담해서도 안 된다. 그건 바닥까지 가 본 사람들만이 아는 것이었다. 인생의 바닥을, 마치 얼마 남지 않은 잼통의 밑바닥을 긁어 모으듯 삶의 밑바닥을 허우적 대본 적 없는 이들은 누구도 윤영을 욕해선 안 된다. 당신은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삶도 내 의지와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어째서 또 다시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익숙한 착각에 빠졌을까. 때론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주먹에서 휘둘리고 있다고 당신 역시 생각해본적이 있지 않은가. 나 자신의 삶조차 그러할진데 윤영처럼 주위의 모든 것들이 당신을 버리고 벼린다면, 당신은 윤영보다 더 순결한 삶을 살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윤영이, 윤영의 가족이 과하다고? 아니다, 당신은 알고 있다. 가족이란 때때로 정말이지 갖다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가족은 서로에게 이보다 더 심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하고 있다는 걸. 가족이기에 더 못 견딜 일도 얼마든지 있다는 걸. 불행하게도 당신도 대충은 안다.

인간은 때론 놀랍다. 어떻게 저런 일들을 모두 겪은 채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런 일들을 겪고도 살아남는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두고 죽을 용기로 살지, 라고 쉽게 말하지만 어떤 이들은 사는 게 죽는 것보다 힘들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의 생(生)의 무게, 삶의 이유와 존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수가 없다. 당신은 내가 아니고 그녀가 아니며 그녀는 내가 아니고 당신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은 언제까지고 ‘당신’으로 남아 그녀를 바라본다. 당신은 그녀를 응원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다. 말릴 수도 없고 격려할 수는 더더욱 없다. 모든 일이 다 잘 될거라는, 시간이 해결해줄거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도 지껄일 수 없다. 그저 바라본다. 외출준비를 끝낸 그녀가 구두를 신는 순간 그녀는 ‘나’가 아닌 ‘당신’일 뿐이다. 

 

당신은 여전히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김이설 작가 역시 좋아하고 싶지 않다. 당신은 선뜻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당신의 좁은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곱고 축복받은, 번듯한 길을 놔두고 진흙이 질척대는 어렵고 외면 받는 길을 걷는 그들이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는 분명 이따위 것이 문학이냐고 예술이냐고 말할 수도 있고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냐며 눈을 크게 뜨며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들은 당신들의 전기(傳記)를 뒤적이며 당신을 프로파일링하며 제 멋대로 근거를 짐작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가족들조차 타인에게 자랑할 수도 없다.

작가란 차암 잔인한 사람이에요. 이 소설을 쓰는 도중, 아내는 어느 날 눈시울 붉히며 말했습니다. 작가가 울지 않으면 독자도 울지 않는다는 '조지 무어'의 말은 한편에선 진실이고 한편에선 거짓입니다. 아내는 그 양쪽 편을 보지 못하여 상처 받았고, 나는 그 양쪽 편을 보았기 때문에 상처받았습니다. 이것은 소설일 뿐야.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가공의 인물이란 말야.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박범신 - 킬리만자로의 눈꽃, 작가의 말 중)

"무엇보다도 이 소설 때문에 나처럼 괴로웠을 남편에게 각별한 감사를 건넨다. '내가 쓰는 소설의 의미'와 '식구가 쓰는 소설의 의미'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이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언제나 나에게 최선인 남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김이설 - 환영, 작가의 말 중)

물론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쓰고 싶은 글을 안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상처를 받게 될 남편에게 미안해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작가란 차암 잔인하다는 말, 작가의 아내로써 살아간다는 그 무게감을 담은 말 앞에서 당신은 박범신 작가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식구가 쓰는 소설’과 ‘작가가 쓰는 소설’의 의미 앞에서 머뭇거리며 인내했을 김이설 작가의 남편에게 덩달아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작가가 작가로서만 살아간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 그런데 아내로서의 엄마로서의 가족으로서의 모습보다 작가로서의 모습을 우위에 둘 수 밖에 없었다는 것. 하필 이렇게 토악질 나는 생생한 절망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아름답고 몽실몽실한 길을 놔두고 기어이 그 길로 가고 말리라는 고독한 전언. 언제까지고 ‘당신’일 수 밖에 없는 당신은, 그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감정과는 별개로 당신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김이설 작가의 책을 읽는다. 기어이 그 길로 가고야 마는 당신, 나는 당신 옆에서 작지만 또렷한 호롱불을 비춘다. 그것은 당신으로써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니까.

   

 

  

 

덧) 인칭을 구별 할 수 없는 이상한 리뷰. 애초에 '당신'은 독자인 '나'를 의식하고 쓴 관찰문이었다. 나 자신을 '당신'으로써 떼어놓고 쓰겠다는 의미이자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소설과 지나치게 가까워져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당신'으로서 나는 타자로써 윤영을 결국 관찰하고 관망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조의 의미로 썼다. 

하지만 쓰다 보니 기본형인 당신 1(독자로서의 나)을 필두로 소설 속 윤영을 가르키는 당신(2)과 불특정다수의 독자를 향한 당신(3) 그리고 작가를 향한당신(4)까지 다양한 의미로서의 당신이 난립하게 되어버렸다. 모호하지만 그 모호함조차 특성이라 변명해보며 구분되지 않은 '당신'이 판치는 이상한 리뷰가 되었다.   

현기증나는 현실만을 묶어 재현한 이 책을 읽고 가장 깊게 사로잡힌 생각은 '문학의 숭고함'에 대해서였다. 참 이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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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영화와 '그런' 문학도 당연히 필요한데, 손이 냉큼 뻗지는 않아요. 박찬욱 영화 하나 빼고 다 보고, 김기덕 영화 반 정도는 본 사람이 할 얘긴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그나저나 이제 진짜 김기덕 영화는 손이 안 뻗나 봐요. <풍산개> 안 봐지더라고요. 나이 먹어 그런가, 자극이 싫어요.ㅎㅎ)

Shining 2011-08-03 11:59   좋아요 0 | URL
저는 박찬욱 감독은 '역시 세련되고 똑똑하다'고 매번 생각하지만 '좋다'라는 느낌은 못 받는 편이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볼때마다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지' 하게 되요-_-;; 하지만 미안하고 고맙고 거북하고; 늘 복잡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고요.

아, 김이설 작가는요 (비록 두 권 밖에 안 읽어봤지만^^;) 독특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구병모 작가의 『아가미』처럼 그러나 조금 다른 의미로 놀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