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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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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되지 않은 글처럼 답답한 것이 없고 정리될 수 없는 파일처럼 막막한 것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분명 거기 있었으나 모든 말이 글이 되지는 않는 법. 망설이고 지우고 다시 쓰고 조각난 말들을 가여이 여기다 이렇게라도 너희에게 자유를 베푸노라. 주먹을 쥐며 결심하는 바, 조각난 것들을 옮긴다. 그렇게 탄생한 자유만 있고 자비라고는 없는 리뷰, 를 가장한 단상(斷想)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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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란 공평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읽지 않는 것과 읽는 것을 택할 수 있고, 신문과 잡지 중 고를 수 있고, 어떤 종류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나눌 수 있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비교적 평등하게 글을 읽을 수 있으니까. 교수든 학생이든 목수이든 농부이든 변호사이든 가수이든 글을 접할 수 있고 애서가가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의지만 가지면 모두가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정말로 (어디까지나 예로서) 교수와 농부가 공평하게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는건가? 사람이 책을 차별하지 않는다하여 책 자신이 자신을 고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가? 새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그건 당연하게도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 덕분이다.
그러니 우선 유니스 피치먼이라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는 모래가 모여 돌이 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운석과 같은 사람이다. 거대하고 고요하다. 감정이 거세 된, 아니 애초에 결여된 것과 같은 여자. 아버지를 질식시켜 죽게 했고 사람들의 약점을 잡거나 협박하는 데는 가히 능하다. 그리고 그녀는 -작가 자신이 첫 문장에서 밝히듯- 문맹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사실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문맹과 살인 사이에 물론 무수한 간극과 그 간극을 채울 자잘한 돌멩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커버데일 가에 온 순간부터 온갖 가구와 식기에 황홀경을 느낄 정도였지만 동시에 엄청난 위협감을 느꼈다. 방을 가득 채운 서재, 늘 책을 달고 사는 막내 아들, 신문과 책을 들고 여기저기 앉은 가족들, 그녀에게 남기는 메모, 서류를 찾아달라는 부탁.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스트레스 이상의 것, 즉 위협이다.
만약 그들이 평균 이상의 고학력자들이 아니었다면,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고매한 집안이 아니었다면. 유니스 파치먼은 그 집안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그녀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 또한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을 뿐 아니라 커버데일 일가는 지나치게 읽거나 쓰는 일을 자주 했기 때문에 유니스 파치먼에게 죽임을 당했다, 라고 두 문장으로 표현했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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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에서 가해자, 피해자, 사건과 동기까지 밝혀졌기 때문에 당연히 이 소설은 '어쩌다'로 초점이 맞춰져있다. 어쩌다 그 지경이 됐을까. 그들의 무엇이 그녀를 자극했을까. 무엇 때문에 그녀는 글을 모르고 모르는 것의 어떤 감정 -요컨대 저 문장 만으로는 그녀의 살인의 이유가 복수인지 수치인지 알 수 없기에- 때문에 살인을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파격적인 방법은 상당히 자극적일 뿐 아니라 옳았다. 모든 것이 다 서문에서 밝혀졌기에 맥이 빠지기 쉬운데, 오히려 이 책은 '감정'과 '진행'에 그 의미가 있기에 독자들은 더 면밀하게 책을 읽게 된다. 여기저리 놓인 부비트랩을 발견하고 그 부비트랩의 강도가 커지는 것을 찾아내며, 가해자와 피해자 중 어떤 쪽을 조금이나마 더 비난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작가는 이 점을 이용해 발군의 심리묘사를 선보인다. 들어봐 봐, 이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고 이 여자는 이렇게 살았어. 자 너라면 어떨 것 같아? 네가 이 여자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 거지? 네가 이 사람들이라면 이 여자는 어떻게 보일까? 라고 묻는 것처럼 작가는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책이 보여주는 것보다 많이,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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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씨의 발문처럼 나 역시 『더 리더』의 한나를 떠올렸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했던 여자,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진급을 앞둔 직장을 그만두고 미하엘의 앞에서 자취를 감춘 여자, 더 큰 은폐를 위해 자신의 무고함을 항변하지 않은 여자. 그런데 그녀는 아우슈비츠의 간수였고 자신의 행동이 일조 한 학살의 흔적에 대해서 태연하다. 물론 인간이란 때로는 개인적인 약점을 단체의 또는 공적인 오류보다 더 수치스럽거나 크게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의 단점을 자신이 속한 사회나 단체의 (때로는 더 큰) 단점보다 더 부끄럽게 여기거나 숨기고 싶어하는 경향 말이다. 그렇다손쳐도, 이 여자는 어딘가가 이상했다. 그래서 그때도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정말이지 혹여나 이 여자가 어떤 죄책감이나 일상적인 도덕성을 잃어버린 것과 문맹인 것은 관계가 있을까?
한나와 유니스는 비슷하다. 문맹임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만 살인이나 살인 방조에 큰 죄악감은 없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더 큰 희생을 감수하지만 자신들의 행위(유니스는 이미 아버지를 살인한 후 커버데일 가로 오며 한나는 공개 재판에서 그 때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냐고 묻는다)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게다가 유니스 파치먼은 읽고 쓰지 못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 라고 작가 스스로가 맨 처음에 공표했다. 달리 말해 그녀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문맹이기 때문이야, 라고 독자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그녀는 문맹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살인을 했는가? 아니면 문맹이 결과적으로 가져온 도덕적 해이와 결여 때문에 살인을 했는가?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녀들의 오묘한 도덕성 혹은 죄악감의 결여는 우연에 근거한 개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면 문맹이라는 결핍에서 파생된 결과인가? 활자를 읽고 글자를 접하는 것이 지적 능력 뿐 아니라 정서적 능력을 좌우하게 되는 것일까. 단지 활자를 읽을 수 없다는 원인이 인간의 감정 발달을 거세시켜 필연적인 감정을 부여받지를 못하는 걸까. 흥미롭게도 작가인 루스 렌들은 아주 얇은 표피 아래의 어딘가에서 외친다. 유니스가 괴물이 되어버린 건 문맹이기 때문이라고. 문맹인 괴물이 아니라 문맹이기에 괴물이 되었다고. 내 자신이 그 의견에 동의하는가 아닌가는 차치하고 적어도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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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나로 하여금 다른 시대를 동시에 살게 하고 내가 결코 겪지 못했던 않았던 없었던 일들을 경험하게 한다. 타인의 경험과 사고에 빠져들며 그것을 내게로 투영하고 다시 현실로 환치한다.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거나 하지 않으려 했던 생각들을 저절로 때로는 기어코 하게 만든다. 세상에는 무수한 삶과 방식과 고난이 있고 그 순간이 만약 내게 왔다면 나는 어떻게 할지를 예상해보고 결정해보게 한다, 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여태 나는 책이 있어서 영화를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어떤 말로도 행동으로도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없었을 때, 나는 작가들에게 도망쳤다. 상처받은 어린애가 엄마 치맛폭으로 뛰어들듯 달려가 안겼다. 세상의 모든 말이 있었지만 그 모든 말은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에 부족했기에. 현실세계의 말은 너무나 달콤하게 쉽게 부서지는 웨하스 같았기에. 현재를, 십년 전을, 백년 전을 살던 이들. 내가 모르는 고통, 갈등의 세계로 달려갔다. 삶이란 얼마나 가벼운가, 또 얼마나 무거운가.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 곳에 모두 있었고 때로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그래도 그것이 현실보다 나았기에 위기의 순간, 나는 친구들이나 가족이나 연인이 아닌 책이나 영화에게 달렸다.
책은 나를 위로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오히려 내 고통의 진위를, 층위를, 면모를 더 자세하게 쪼개고 객관적으로 성찰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어쩌면 더 괴로워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토록 내 고통을 분석하지 못했을텐데. 그래도 책은 나를 위로만 한 것일까. 책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구체적인 위로를 받을 수 없었겠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괴로워할 수 있었던 건 책의 탓은 아니었을까. 책이 아니었다면 구태여 몰랐을 것들, 감정과 전조와 갈등들. 그것들을 배웠고 현실세계에 적용하고 다시 감정을 분석하고 그렇게 더 체계적으로 아파한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그저 '괴롭다' 혹은 '기쁘다' ,'불안하다'처럼 뭉뚱그려 말할 수 있는 감정들을 '나는 지금 무엇때문에 괴롭고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것이 아니라 이것 때문에 힘든 것이다', '지금 나의 행복은 언젠가 이것이 사라진다는 일회성 혹은 소멸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타자화 하는 동시에 방관자로 만들어 더 자학하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책을 읽는 나는 책을 읽지 못하는 나보다 영리해진걸까, 불행해진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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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인 내 생각에 이 책은 영리하고 다의적인 소설이다. 굳이 장르를 구별하자면 추리가 되겠지만 서문에 추리소설의 모든 것을 밝히기 때문에 사실 그보다 더 큰 것을 노렸다고도 할 수 있다. 작가의 뒤를 쫓아가며 범인이 누군지 '맞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알기 때문에 어떤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마 작가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하나는 문맹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그 중에서도 악영향에 대한 것. 또 하나는 가진 자, 배운 자, 더 위에 있는 자들이 과연 가지지 않은 자, 배우지 못한 자, 더 아래 있는 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누군가에는 너무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 일일 때, 당연한 자는 아닌 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게다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의도에서든 혹여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무언가를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 값싼 연민은 이기심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
그러나 나는 둘 중의 어느 편에서도 구태여 서고 싶지 않았다. 커버데일 일가는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이기적이지만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그건 위선이 아니라 차라리 기만이었을 테고. 커버데일 일가가 기만행위를 했기에 그들이 유니스 파치먼에게 살해당할 만 하다고 당연히 생각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유니스 파치먼의 폭력적 도덕성이 오롯이 문맹의 결과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다만 이 책은 잘 써진 책이 주는 쾌감이나 단순한 즐거움 이상으로 이 책은 나를 생각하게 하기에 좋은 평점을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즉 우리는 모두 문맹이 아니고 그 중 몇몇은 애서가라는 점이 가장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유니스가 되지 않았고 커버데일 일가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 값싼 동정이나 부끄러운 안도감일지 모른다. 활자는, 아니 활자도 잔인하다.
덧) 유니스 파치먼의 공범인 조앤 스미스. 흥미로울 뿐 아니라 중요한 인물인 이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아니, 그런 글을 쓰기에는 다분히 조심스럽다는 이유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고의적으로 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