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 주목할 만한 소설 비평 좌담
박진.김남혁.장성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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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담하고 잘 꾸며진 그러나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단골 주점에 있다. 오늘따라 손님은 평소보다도 없고 시끄러운 사람들도 없어서 한산하다. 당신의 옆 테이블에서는 독서토론이 한창이다. 함께 술을 마시러 온 친구는 애인과의 통화(정확히는 말싸움인가)로 한창 열을 내다 나갔다 온다는 눈짓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심심하고 무료한 당신은 멍하니 있다 당신의 귓가를 매만지는 소리에 몸을 살짝 기울인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 당신 역시 책을 꽤 좋아하는데다 그들이 말하는 책은 대부분 당신도 읽은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책들을 읽고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들이 정밀한 표현과 현학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게다가 박식한 내용과 섬세한 태도까지. 흥미가 일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아닌 척 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한 발 더 다가간다.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언제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자작(自酌)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이런 기분으로 책을 읽게 되지 않을까. 이 책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나 말하지 않았던 것들, 혹은 말할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은 엄격히 말하자면 비평집이다. 평론집이라 하면, 도무지 일상적으로 쓰일 것 같지 않은 언어들만으로 작심하듯 골라내 엮고 엮어 자기네끼리만 숙덕거리는 느낌을 받기 쉽다. 혹은 어려운 말들이 마치 자신의 권위를 세워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게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언어들만을 쓰고 뿌듯해하는 얄미운 얼굴들이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평론집’이란 말이 무색하게 즐겁다. 유연한 언어와 일상적인 논제와 소설을 읽는 당신이라면 누구든 동참할 수 있는 주제를 갖추고 있되 -좌담을 녹취한 형식이라- 읽기에도 수월하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주제 자체가 흥미진진하다는 것이다. 보통의 평론집은 거의 해설집에 가깝기 마련이다. 과연 작가가 저런 생각으로 글을 썼을까 의구심이 들만큼 분석적이고 집요하다. 한 작가의 작품 전반에 대해 혹은 한 작품의 한 문단 한 문장 지나치게 낱낱이 분석한다. 때문에 보통의 독자들은 평론집을 읽지 않는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외려 이해를 방해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이 책의 주제는 노골적이고 재밌다. 실은 잡담거리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아, 정말 재밌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앉은 자리에서 서너장 넘겨보다 결국 다 읽고 말았다.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고 물 마시는 것도 멈춘 채 책장을 팔랑팔랑 잘도 넘어간다.

허나 아무리 재밌고 읽기 편해도 이 책은 어디까지나 ‘비평집’이다. 때문에 해당하는 책이나 작가에 대해 읽지 않았다면 무지막지하게 재미없는 책이 될 것이다. 아니, 이 책을 읽지 않으며 실은 읽을 수도 없다. 좀 더 풀어 말하자면 해당하는 책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선입견을 만들까봐 비평을 읽을 수 없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장정일에 대한 담론과 <최근의 문학상 수상작, 어떻게 달라졌나?>에 인용된 네 소설을 읽지 않은 죄로(!) 두 주제에 대해선 눈으로 훑는 정도에만 그쳤다.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이야기에 낀단 말인가, 비록 남의 술자리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아니다, 이 말에는 큰 허점이 있다. 만약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면, 출판계의 동향이야 어떻든지 관심이 없다면 애초에 이 책을 고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고른 사람이라면 무섭도록 달려가며 읽게 될 것이고, 읽지 않을 사람은 이 책의 존재 자체, 존재의 의미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많은 책장에 꽂힌 한 권의 책이고, 신간에 나타난 새 책일 뿐이며, 그저 글자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커다란 둘레처럼 느낄 것이다. 그들의 귀에 눈에 손에 이 책은 필터링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명확한 독자 타깃과 고정독자를 갖추고 있다. 소설을 읽는 당신, 그것도 좋아하는 당신, 소설의 미래를 걱정하는 당신, 다른 이와 함께 소설에 대해 말하고 싶은 당신만이 이 책을 연다. 그리고 나의 리뷰를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 그렇다.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지겨운 말이긴 하지만 이 책은 평론집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음에 쏙 든 문단을 발췌하라면 그 이야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모두 밝혀야만 하고, 때문에 특정한 주제나 발언을 언급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이 책이 쓰여진 맥락 자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 누군가 책에 대한,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을 읽는 그 자체가 즐겁게 만든다. 그 중에 고개를 삼십번 쯤 끄덕이게 만든 부분들을 어렵사리 옮기자면 이런 것들.  


박진 맞다. 소설은 독자마다 자기 리듬에 맞게 감상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반면에, 영화는 러닝타임이라는 일정한 시간 동안 영화의 속도를 그대로 따라가며 감상해야 한다. 이 점이 수용자뿐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너무 난해하거나 복잡해지면 관객들이 이미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돼버리고, 그러면 결국 실패한 영화가 되고 마니까.

장성규 그래도 소설이 원작인 영화들은 다른 영화들보다는 좋아하는 편이다. 문자 텍스트의 내러티브가 다른 매체를 통해 변형되는 모습을 보면, 원작에서 읽어내지 못했던 점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가 단순히 소설의 내러티브를 영상으로 그대로 옮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소설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재현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 문법의 특성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한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반대로 영화 문법이 지니는 고유성을 통해서 소설 문법이 보여주지 못하는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면 의미가 클 것이다. (성공한 소설의 영화화란 어떤 형태인가?)


김남혁 희뿌연 화면 처리를 통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관객들이 눈먼 자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하고 눈먼 자들이 받는 고통을 추체험하게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핵심은 오히려 ‘눈뜬 자’의 고통과 연대의식이다. 눈뜬 자인 의사의 아내는 눈먼 자들보다 더 큰 고통을 느낀다. 그녀는 두 개의 지옥, 그러니까 국가와 군인들의 공권력이 만드는 하나의 지옥과 공권력의 피해자인 눈먼 자들이 만드는 또 하나의 지옥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이 못 보는 지옥을 지켜보면서 의사의 아내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사실 이 소설에서 눈뜬 자는 의사의 아내 한 사람만은 아니다. 눈을 뜬 사람은 의사의 아내와 화자와 독자, 이렇게 세 명이다. 의사의 아내가 느끼는 고통과 책임감은 곧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는 독자와 자신을 시종 ‘우리’라고 명명함으로써 독자들로부터 눈먼 자들의 지옥을 못 본 척하지 않는 책임감을 이끌어낸다.

박진 정말 그렇다. 소설에 수시로 나오는 ‘우리’라는 호명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김남혁 그런데 영화에서는 ‘우리’라는 인칭으로 개입하는 화자의 효과가 사라져 있다. 그래서 영화는 ‘당신(관객)은 유일하게 눈뜬 자이니, 의사의 아내와 같은 고통과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각성을 유도하지도 못한다. 영화는 그저 눈먼 자들의 고통을 관음증적으로 구경하게 한다. 원작과 다르게 영화는 눈이 보이는 자들의 고통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에서 의사의 아내는 소설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스크린 셀러 현상에 대한 담화 중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 대해)


박진 같은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이 소설은 충분히 낭만적이고 충분히 비극적이고, 게다가 시대 현실에 대해서까지 말하는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포장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청춘의 고뇌나 낭만적인 사랑과 더불어 80년대 시대 상황까지 말해주는, 굉장히 진지한 소설을 읽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는 그냥 좀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읽는 것보다 훨씬 큰 만족감을 줄 수 있다. 그걸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은 사실이다.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대해)


김남혁 2000년대 소설에 눈가 등장하는지를 떠올려보면 2000년대 사회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8,90년대 소설에는 민중이나 시민이라는 혁명 주체가 등장했다. 그런데 2000년대 소설에는 속물, 마니아, 백수가 등장한다. 백수하면 이기호, 마니아하면 김중혁, 속물하면 정이현 등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백수들은 자포자기해서 골방에 있고, 속물들은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한 채 강남을 활보하고, 마니아들은 자기 관심사 외에는 세상과 단절된 채 유폐되어 있다. 이 세 무리는 사회가 변혁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사회에 대해 불만이 있어도 사회는 원래 이런 거라고 냉소한다. 이 세 무리가 만들어내는 2000년대 사회는 이른바 출구 없는 감옥이다.


박진 한 가지 덧붙이자면, 따뜻한 위로든 차가운 위로든, 위로를 주는 소설들에 대해 무조건 비난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조건들과 대중들의 요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 사회심리적 의미를 다루는 섬세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대중문학’은 도피적인 위안을 주고 ‘본격문학’은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는식의 편리한 구분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박진 (전략) 그런데 위로라고 해도 다 같은 위로는 아닐 것이다. 현실의 고통을 감추면서 아직도 세상은 살 만하다고, 너만 잘하면 괜찮다고 말하는 위로가 있는 반면, 현실이 정말 끔찍하고 견디기 어렵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힘을 주고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위로도 있다. 황정은 소설이 주는 위로는 이 두 번째에 속한다. 누구보다 정직하게 현실의 고통을 응시하지만, 그럼에도 분노나 냉소보다 더 큰 힘을 주는 소설이라서 각별히 소중하게 느껴진다. (2010년 놓치기 아까운 소설 중 황정은의 『백(百)의 그림자』에 대해)


나는 소설의 힘을 위로라고 말했다. 소설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시대에 위로와 청춘라는 말이 난무하는 책들 속에서. 소설은 마치 한 마리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왔고 기꺼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었다. 어떤 날에는 연출된 기쁨을 골랐다. 그때 소설은 구세주가 되고 기꺼이 기쁨조가 되었다. 슬퍼하기 위해, 아프고 싶어서 읽을 때는 자학이나 자기기만의 도구가 되었다. 그렇게 샴푸의 종류나 립스틱의 색깔을 고르듯 소설을 선택하기도 했다. 허나 결국엔 특별히 좋아하는 샴푸의 향기, 얼굴색을 밝게 해주는 립스틱만을 남기듯이 마음안에 고이는 것만이 남았다.

물론 오직 위로를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 모든 가구와 환경과 인물과 직업과 하다못해 쓰레기까지 설정해가며 그 안에 숨을 불어넣는 이유가 어찌 위로뿐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떤 글을 읽고 가장 공명했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가 나를 위안한 글들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따뜻한 격려든 차가운 독려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험의 스펙트럼을 통한 결과이며 때문에 모든 독자는 것은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라는 프루스트의 말에 이보다 더 공감할 수는 없다.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술어라고 하지만 때론 접속어에 더 큰 무게가 실릴때도 있다. 예컨대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에서 제일 주목해야할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모든 사랑에는 매력과 장점만 있는게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래서의 힘으로 이겨나가지 않는가. 그래서와 그래도 사이에서. 그래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

이 책에는 문학이 문화산업의 일부가 되고 독서에 미치는 마케팅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져가는 상황에 대한 걱정과 비판도 담겨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어떤 소설을 선택해야 하는지, 바로 지금 좋은 소설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매번 다시 묻고 고민해야만 했다. 문학을 둘러싼 지금의 상황들은 이렇듯 별로 낙관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이 주는 즐거움과 감동, 소설이 이끌어내는 다양한 생각들과 진지한 고민들이 여전히 우기에겐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그래도’와 ‘그래서’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 이 책의 제목은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론 中)

공감을 넘는 동감의 마음이 생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까닭이 그래도여도 물론 좋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라는 말이 왠지 더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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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1-09-14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워요!! 황정은 소설이 내게 다른 소설과 다르게 다가온 부분이 정말 거기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요...재밌네요 :)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

Shining 2011-09-16 00:02   좋아요 0 | URL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는 정말...읽으면서 몇번이나 화들짝 놀랐어요. 처음엔 난해해서, 그 다음엔 좋아서. 웬디양에게도 이 책이 좋은 책으로 읽혔으면 좋겠는데요^^

2011-09-14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6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