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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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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도서관

도서관, 그리고 찾을 수 없는 책

정교하고 우아한 세계를 만들어 내는 보르헤스는 이번에는 도서관을 만들었다. 육각형의 전시실과 층수가 무한히 있어 보이는 기하학적 구조에,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책이 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가?

처음에 사람들은 환희에 차서 도서관을 뒤졌다. 문제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 편람의 편람을 찾으려는 사람, 신성한 책을 찾으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책을 찾을 수 없었다. 책은 25개의 알파벳과 부호로 순열을 사용하여 제작된 것이다. 대부분 의미없는 문자의 나열에 불과하다. 더구나 책의 배열에는 기준이 없다. 그러니 분명히 원하는 책이 도서관 어딘가에 있는데 찾을 수 없게 된다. 화난 사람들은 책을 불태우기도 했고, 우연을 사용하여 스스로 책을 만들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떤 신성한 책이 어떤 전열실에 있다는 이야기나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에 대한 믿음도 생기기도 했다.

흔들리는 결정론, 1941년

보르헤스는 1941년 이 소설을 썼다. 세계는 이차대전의 소용돌이에 들어 있었고 지적 세계 또한 폭풍과 같은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19세기까지 세계의 원리를 찾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인과론을 찾는 것이었고 그 귀결은 결정론이었다. 볼츠만이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확률을 도입했을 때 물리학자들은 비난을 퍼부었다. 양자역학에서 전자의 분포를 확률로 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저항했다. 공고하던 결정론이 흔들렸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산술을 포함하는 공리계는 완전하지 않다. 완전한 진리체계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 진리 체계가 흔들린 것이다. 칸토르의 집합론은 수학을 무한집합의 토대 위에 올려놓았지만 기존의 상식을 크게 흔들었다. 힐베르트가 말한 것처럼 칸토르가 인류를 낙원으로 인도할 것인가?

확률론이 슬그머니 결정론이 되는 순간

보르헤스는 왜 이런 폭풍과 같은 시기에 이상한 도서관을 만들었을까? 위의 줄거리로 보면 지식을 찾는 우화처럼 보이지만, 내 생각에는 확률적 세계와 무한수로 이루어진 우주에 대한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알파벳과 문장 부호로 만들 수 있는 책의 모든 경우의 수를 우리의 사고 속에서 나열할 수 있고 그 수는 너무나 큰 수이지만 분명히 제한되어 있다. 보르헤스는 어떻게 책을 만드는지는 제시하지 않지만, 셰익스피어의 『햄릿』 같은 책도 이 도서관 어딘가에 '결정'되어 있다고 설정한다. 그러면 셰익스피어가 쓰지 않았더라도 이 도서관에는 햄릿이 이미 존재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확률론이 슬그머니 결정론이 된다. 기존의 인과론은 결정되어 있어도 너무 많은 변수가 있어 알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보르헤스는 모든 경우의 수가 있는 도서관을 만들어서 더 강력한 결정론적 세계를 만들었다. 현대 물리학자들도 보르헤스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확률도 계산할 수 있으므로(양자역학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정밀한 계산을 한다) 모든 입자의 운동은 물리적 계산 영역 안에 있으므로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이 새로운 결정론은 인류를 더 닫힌 세계로 몰아넣는다. 인류의 문명은 더 나쁜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진리는 있는데 찾을 수 없고, 미신, 전염병, 전쟁으로 인류는 멸망 직전까지 몰려 있게 된다.

무한이라는 구원

이 결정론을 구원하는 것은 무한이다. 화자는 도서관은 무한하지만 책의 수는 유한하므로 반드시 반복이 된다고 주장한다. 도서관은 무한하지만 주기적이다. 이것이 새로운 질서가 된다. 이렇게 무한은 새로운 신학이 된다.

산통을 깨는 것 같지만 열역학 제2법칙은 우주의 끝을 예고한다. 우주에 무한한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우주의 시간보다도 도서관의 책의 경우의 수가 훨씬 크다. 그래서 반복은 화자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눈먼 화자의 우아한 기도

작중 화자의 일생은 숭고함마저 있다. 젊은 날부터 진리를 찾아 헤맸고 이제는 눈도 멀었다. 그래도 그는 기도한다.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완전한 책을 읽게 해 달라고, 자신이 지옥에 가도 좋으니 천국이 있게 해 달라고.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우주는 존재할 거라고 하며, 반복하는 무질서를 발견한 것으로 우아한 기쁨에 젖는다.

금고를 지키는 야만

이 화자는 찾지 못한 진리에 구속되어 있다. 진리 없는 세계에 나아가려 하지 않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기를 기도한다. 진리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좋은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본 인류의 역사에는 야만과 폭력, 좌절만 보인다. 전염병, 야만, 무지의 장벽을 넘어온 인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스스로 우아한 삶을 살았다고 위로한다. 그야말로 절대로 열 수 없는 금고 안에 진리가 있다고 믿으며 금고를 지키고 있으니, 책을 읽을 줄 모르는데 책에 입 맞추고 섬기고 있는 야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목적지 없는 여행자의 유희

내가 재미가 없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며칠간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며 분석하는 것은, 어디에 원고로 낼 것도 아니고 누군가 내 글을 봐 줄 사람이 있어서도 아니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 축구하듯이 내가 좋아하는 지적 유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다가 내가 눈이 멀면 나는 좀 많이 서운해하며 또 다른 유희를 찾아 나설 것이다. 보르헤스는 무거운 짐을 지고 어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나는 이곳저곳을 호기심과 즐거움에 따라가고 위험을 피해 가는 여행객이다. 비장함도 없고 때로 막막하기는 하다. 우아함은 모자라지만 좀 덜 씁쓸하고 오히려 유쾌함에 가까운 기쁨이 있을 것 같다. 어떤가, 보르헤스?

아마도 늙고 두려움을 느끼는 탓에 내가 속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유일한 종족인 인류가 멸망 직전에 있다 해도 ‘도서관‘은 불을 환히 밝히고 고독하게, 그리고 무한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소중하고 쓸모없으며 썩지 않고 비밀스러운 책들을 구비하고서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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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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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의 글

 무료한 아침, 읽을 책을 찾다가 보르헤스를 떠올렸다.
버린 동전이 돌아오는 이야기 〈자히르〉를 읽으며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져 출구를 찾지 못했다. 다음은 〈신의 글〉이었다. 역시 보르헤스답게 상징들로 가득한 미로였지만, 이번에는 출구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대리석을 깎아낸 듯한 단단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신의 글>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강 작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흰〉의 서문에서 보르헤스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는 두 사람의 문체가 다르다고 생각했기에 의아했지만, 이번에는 보르헤스와 한강이 닮았다고 느꼈다. 보르헤스의 문장도 시적 함축성을 지닌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하며, 문장마다 복합적인 상징을 새겨 넣는다. 차이점이 있다면, 한강은 섬세한 붓으로 내면의 고통을 그리는 반면, 보르헤스는 굵은 붓으로 지적 세계를 미로에 새겨 넣는다는 점이다.

 보르헤스의 다른 작품처럼, 〈신의 글〉에도 뚜렷한 줄거리는 없다. 〈독일 레퀴엠〉처럼 감옥에 갇힌 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마야 문명의 사제 치나칸은 스페인 정복자에게 고문당한 후 감금된다. 그가 감옥에서 서서히 늙어가는 것과 먼지가 쌓이는 것 외에는 물리적 변화가 거의 없다. 〈독일 레퀴엠〉의 파시스트 죄수는 자기변명을 늘어놓지만, 치나칸은 깨달음의 이야기를 한다.

 이 소설은 보르헤스적인 미로 속에서 진리를 찾는 구도 소설로 읽힌다.
치나칸은 반구형 감옥 속에서 재규어와 함께 갇혀 있다. 감옥의 반구형 구조는 우주를 상징하며, 재규어는 신적인 존재 또는 자연에 숨겨진 비밀을 나타낸다. 그는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신의 글에 다가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신의 글은 세상의 끝을 예견한 신이 창조의 첫날, 불행을 피할 수 있도록 남겨둔 글이다.
그것은 특정한 사물이 아니라 자연 속에 숨겨져 있으며, 오직 최후의 사제인 자신만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일 것이다.
치나칸은 재규어의 무늬를 관찰하며 답을 찾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는 모래의 꿈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을 경험하며 깨어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정오, 그는 갑자기 신의 글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태도와 과학적 사고

치나칸의 진리에 대한 태도는 특별하다.
그가 찾는 것은 태초에 신이 써두었다는 신의 글이다.
그는 신의 글에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이 점에서 그는 물리학자들과 유사하다.
물리학자들은 모든 힘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정식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치나칸은 경전을 읽거나 문헌을 탐구하지 않는다.
그는 내적 사유나 기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연 속에서 신의 글을 찾으려 한다.
이는 과학자들이 자연 속 질서를 찾는 방식과 유사하지만, 치나칸은 가설과 검증을 통해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반복 속에서 직관적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가 믿는 진리의 성격 또한 과학적 탐구와 닮아 있다.

그의 깨달음은 경이로운 경험이지만, 세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신의 글을 해독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초월적 경지에 도달한다.
그는 복수할 수도, 세계를 통치할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국가나 인간의 운명은 그에게 의미가 없다.
그의 깨달음은 내면에서 완결되었을 뿐, 바깥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석가는 깨달음을 얻은 후 세상을 향해 설법했지만, 치나칸은 감옥에서 잊혀진 채 죽어간다.
그는 미로를 빠져나왔지만, 그 길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완전한 무의미의 장소였다.

역사적 해석과 마야 문명의 기억

이 소설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읽을 수 있다.
잊혀져가는 마야 문명을 기억하며, 정복자의 문명을 은근히 비판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마야 문명의 사제였던 치나칸은 고문을 당하지만 보물의 위치를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종교적 상징인 재규어와 함께 감옥에 갇혀 결국 잊혀진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 속에서, 마야 문명의 신화가 다시 떠오른다.
그는 나무로 만든 사람들이 물항아리에 공격당하고, 개들에게 찢기는 장면을. 본다.

이것은 마야 신화에서, 신을 잊은 인간들이 결국 자신이 만든 도구에 의해 멸망하는 이야기다.
치나칸은 복수할 필요조차 잊었지만, 정복자들은 결국 그들이 만든 도구들에 의해 멸망할 운명에 놓여 있다. 정복당한 문명에겐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의 지혜는 막강해 보이는 정복문명의 문제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명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잘 모르는 남아메리카인들의 무의식인지도 모른다. 

보르헤스의 미로 속에서

보르헤스는 언제나 낯선 이야기로 우리의 사고를 흔들어 놓는다.
그는 마야 문명을 호출하여, 그의 마술 같은 문장으로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러나 이 초대는 당혹스럽다.

진리를 깨달았지만, 원리적으로 자신을 초월할 수밖에 없기에, 실상 아무런 변화도 없다.
신은 멸망할 세상을 만들었고, 진리는 결국 무의미를 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할 의미가 있는가?

만약 세상이 거대한 미로라면, 우리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큰 벽으로 둘러싸인 미로 속이 아니라, 옅거나 짙은 안개가 우리를 감싸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불확실성이 반드시 불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더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소행성과의 충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들이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류가 존재한 이후로 가장 자유로운 세계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그 누구도 아닌데, 왜 또 다른 사람의 움명에 관심을 갖고, 왜 또 다른 사람의 국가에 관심을 보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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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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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고 지나가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두세번 읽으면 작가가 <흰>에 대한 이야기를 언니의 재건과 애도를 줄거리로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좀 더 읽으면 그녀가 겪은 고통의 깊이가 낯설게 보이다가 문장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그러면 고통속에 만들어지는 진주처럼 빛나는 문장에 짖눌리고 오래 동안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제 당신에게도 내가 흰 것을 줄께.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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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9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종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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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에 나오는 인물은 아일랜드인 스티븐 데덜러스와 벅 멀리건, 잉글랜드인 헤인스인데 이들은 마틴타워에 살고 있다. 1장은 세사람의 대화가 주를 이루며 스티븐의 내면이 기술된다.
각 인물에 대한 묘사가 따로 없어서 대화 중의 정보로 짐작해야 한다. 스티븐은 교사이자 시인이며, 벅은 의대생이고, 헤인스는 학생으로 보인다. 1장은 세 사람이 아침에 면도와 식사를 하고 더블린만에 수영을 하러 가기까지 이야기다. 스티븐은 건물 월세를 내고 있고 둘은 그냥 같이 살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븐은 어머니가 최근에 죽었는데 어머니가 죽기전 기도를 부탁했지만 거부해서 죄책감이 남아 있는 상태다. 벅은 스티븐을 예수회 애송이, 어머니를 죽인 아들이라 놀리며 돈을 빌리거나 요구하고 집 열쇠도 요구한다. 스티븐은 이런 벅에게 돈도 빌려주고 열쇠도 내어 주지만 벅에게 모욕받았다고 말하고 벅을 찬탈자로 여긴다. 스티븐의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두 가지 문제를 상징한다. 영국에 식민지배를 받고 있으며 종교적으로 카톨릭인 아일랜드의 문제다. 이 둘다 그가 아일랜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탓에 짊어진 문제다. 그는 이 문제를 시원하게 던져버릴 수도 없다. 던져 버릴려니 죄책감이 따르고, 지고가려니 역사는 무겁고 종교는 진부하고 어리석다. 더구나 관심이 있는 아일랜드 문학은 깨지 거울 같다. 이런 고민은 초라하게 만드는 문제도 있다. 자신에게 친절한 척하며 종처럼 부리려는 벅의 문제다. 자기를 모욕했다고 한 번 쏘아 붙이기는 했지만 돈도 주고 열쇠도 내어 주었 분노를 곱씹고 있을 뿐이다.

오디세이아의 1장은 신들이 회의 끝에 10년을 넘게 떠돌고 있는 오디세우스를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오디세우스의 집은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청혼하려는 남자들이 진을 치고 앉아 오디세우스의 가산을 탕진하며 음식을 먹고 있다. 아테네 신은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로 변하여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아버지가 살아 있고 그를 찾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텔레마코스는 청혼자들을 물리치고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정을 준비를 한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고 아버지를 찾아 가족을 복원하려 하지만 스티븐은 아버지를 극복하려 한다. 어머니가 기도를 해달라고 한 것은 아버지의 자리에 스티븐이 있어주기를 요청했고 스티븐은 거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변에서 떠 오른 익사체는 스티븐이 아버지를 극복했다는 상징일 수도 있다.
텔레마코스에게는 조언하고 돌보는 친절한 신이 있다. 그가 부정해야 할 것은 아버지기 죽었을지 모른다는 의심 뿐이다. 그는 친절한 조언자를 따라 의심없이 가면 된다. 스티븐에게는 신은 커녕 괜찮은 조언자도 없다. 벅도 헤이즈도 괜찮은 조언자가 아니다. 오히려 오딧세이아의 청혼자들 처럼 그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찬탈자에 가깝다. 그에게는 민족, 종교, 문학은 흔들리며 극복해야할 어떤 것이다. 그래서 텔레마코스는 희망에 차서 출발을 준비하지만 스티븐에게는 명확한 것은 없고 일상의 자잘한 문제를 걱정해야 하고 벅에게 대한 분노 같은 소심한 생각을 해야 한다.

시작부터 이 책은 쉽지 않다. 라틴어 삽입구도 생경하고 상징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도 있고 오디세이아와 대조도 해야 하니 더욱 그렇다. 작가는 스티븐의 의식을 흩어서 배치해 놓았고 독자는 그것을 엮어서 실마리를 찾아 낯선 아일랜드인의 의식을 탐구해야 한다. 이런 배치가 치밀한 의도인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수없이 나오는 인용에 대해 의미를 찾으려면 시간이 많이 든다. 여행을 앞두고 텔레마코스는 분명한 목표가 있기에 두려움을 넘어 기대를 같겠지만 스티븐은 그렇지 않다. 조언자도 없고 목표가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자유라는 모호한 관념만 있는 여정일 뿐이다. 소름처럼 돋아오는 불안은 스티븐만의 것은 아니며 다음 장을 넘기려는 내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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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9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종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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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즈>의 리뷰를 시작하며


 <율리시즈>는 훌륭하지만 어려운 문학작품이라고 오래 전에 들었지만 읽을 기회가 없었다. 이 작품이 다시 만나게 된 계기는 슈테판 츄바이크의 <어제의 세계>에서 작가 제임스 조이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츄바이크에게는 제임스 조이스를 낯선 언어천재 쯤으로 설명했는데, 나는  <율리시즈>의 작가로 만났고 흥미를 느꼈다.

 전자책으로 구입하여 운전을 하거나 잠결에 듣기 시작했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찬찬히 보니 서술방식 자체가 보통의 소설과는 달랐다. 특별한 줄거리나 상세한 묘사도 없이 대사를 위주로 해서 단문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작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욘 포세의 서술방식과 비슷했다.  GPT에게 설명을 부탁하니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했다. 욘 포세와의 차이점은 욘포세는 반복되는 문장으로 주인공이 갖고 있는 강박을 드러냈다면 조이스는 화자의 정체성을 조각조각 보여주는 것 같다.

  <율리시즈>는 <오디세이아>를 패러디 해서 <오디세이아>와 똑 같은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등장 인물도 <오디세이아>의 인물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오디세이아>는 영웅의 이야기이고 십수년간 일어났던 일이지만 여기에서는 한 평범한 아일랜드계 유대인이 단 하루 동안에 더블린에서 일어난 일이다. 작가는 물거품처럼 사라질 이야기 보통사람의 하루 일상을 괴물을 잡고 세상을 구하는 별자리로 남을 영웅의 이야기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리뷰를 읽어보니 소설의 독자보다 소설로 해서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 더 많다하니 따분하고 어려움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도도 아닌데 내가 왜 이 책을 읽으려할까? 따분하고 어려움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고 할 수 있을까? 멀리서 험준한 산위에 있는 성채처럼 언젠가 가보고 싶은던 작품이었는지도 모른다. 별 모험 거리가 없는 내겐 가장 안전한 지적 모험이니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오디세이아>와 <율리시즈>를 한 장씩 병행하여 읽으며 이들을 따라 여행을 떠나 보겠다. 낯선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으나 멀리 거울에 비친 별자리 처럼 오디세우스가 있고 목적지가 어디라 해도 과정이 즐길만 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책을 읽고 장별로 후기를 다는 것은 처음이지만 여행기를 쓰는 마음으로 시도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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