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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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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바다를 생각하면 가슴이 뛸까?

-보르헤스의 독일 레퀴엠을 읽고-

 


“우리가 숨 쉬던 공기에는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 갑자기 근처에서 바다를 느낀 것처럼, 우리 가슴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고동쳤다.”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눈앞에 갑자기 바다가 펼쳐진 것처럼 놀랐다. 나에게도, 80년대를 지나왔던 우리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었다. 거리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어깨를 걸고 노래 부를 때, 전국에서 모인 깃발이 입장할 때 우리는 가슴이 벅차올랐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그런데 위의 문장은 보르헤스의 <독일 레퀴엠> 중에 나오는 것으로 승전을 구가할 때 나치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문장이 가장 사악한 집단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며 당황스러웠다. 정말 그들도 바다를 생각하면 가슴이 뛸까?

 

보르헤스는 소설 <독일 레퀴엠>에 한 나치 전범을 화자로 등장시킨다. 이 소설은 유대인 수용소의 부소장이었던 화자가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을 당하기 전날 세상이 자신을 이해하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자신의 선조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성장 과정, 나치당에 입당한 이후 소장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 사형수가 되기까지를 독일의 생성에서 제 3제국이 멸망하는 과정과 병행해서 기술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화자는 1908년 생이다. 브람스, 쇼펜하우어, 세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받으며 음악과 형이상학 덕분에 오랜 불행한 시절을 맞설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니체와 슈펭글러를 자기 삶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20대 초에 나치당에 입당한다. 처음에는 폭력적인 것 때문에 힘들었지만, 더 큰 목적을 위해서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교나 기독교 초기와 비교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있다는 흥분을 갖고 전쟁을 고대한다. 그런데 그는 소요 사태 중 총에 다리를 맞아 다리를 절단하게 되어 전쟁에 나가지 못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개인목적론을 발견하고 자신이 부상당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가 되거나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의미 있는 일이 지속해서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유대인 집단수용소에 부소장으로 발령 나자 그 직책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성실히 책임을 다한다. 자기가 좋아했던 행복을 노래하는 시인 ‘예루살렘’이 수용소에 오자, 동정심에 흔들리지 않고 그의 인간성을 파괴하여 자살에 이르게 하는데 ‘성공한다’. 나치가 승전을 거듭할 때는 그는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 같은 흥분을 느끼지만, 전쟁에 패하게 되자 자신의 죄를 자책하기도 하고, 이제는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모든 일이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독일의 운명은 예수와 유대주의의 병에 걸린 세상을 구해내고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생각하며 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뻐한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자기 육체는 몰라도 정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죽음을 기다린다.

 

음악을 사랑하고 형이상학을 공부한 지식인이 어떻게 나치가 되었을까? 그토록 잔인하게 한 인간을 몰락시키는데 전력을 다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키워드는 ‘독일적인’과 ‘새로운 시대’ 그리고 ‘운명’이였다.

이 소설의 제목 독일 레퀴엠은 브람스의 작품명이기도 하다. 브람스는 최초로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작품을 쓰면서도 독일 레퀴엠이라기보다는 인류 레퀴엠이 더 적당하다고 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더욱 보편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라 한다. 또 당시 독일어로 작품을 쓴 이유는 독일인의 자부심이 아니라 대중에게 친숙한 독일어를 쓴 것이기 때문에 ‘독일적’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작가가 제목으로 독일 레퀴엠을 잡은 것은 독일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독일적’으로 불리는 것의 의미 왜곡을 드러내고자 함도 있을 것이다.

화자는 ‘독일적인’ 것에 경도되어 있다. 그는 그의 조상을 ‘독일적인’것과 관련된 사람만 언급한다. 자신은 고문과 살인으로 사형수가 되었지만 독일과 관련된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공을 세운 선조의 이름을 열거하며 그들이 곧 자기 자신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작가는 ‘편집자 주’의 형식으로 화자가 자신의 선조 중에 가장 유명한 헤브라이어 학자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그는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독일적인’ 것을 찾는다. 쇼펜하우어에게서는 논리를 브람스와 세익스피어를 통해 무한히 다양한 세계를 배웠으며 자신이 그렇게 ‘극악무도’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세익스피어를 거대한 독일계 이름을 가졌다며 슬며시 ‘독일적인’ 것으로 편입시킨다. 그가 언급한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을 쓴 문명사학자이다. 그는 전쟁과 혁명으로 정점에서 무너지고 있는 서구 세계를 썼으며 독일의 몰락을 예견한 사람인데, 화자는 슈팽글러를 비판하면서도 그에게서 독일적이고 군인다운 정신을 발견한다.

화자가 열망한 새로운 시대는 유대교에서 비롯된 기독교 문명을 뒤엎는 새로운 도덕률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는 나치즘을 본질적으로 도덕적 행위인데 그것은 이미 부패한 노인에게 옷을 벗겨 새사람에게 옷을 입히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폭력과 칼이 중심이며 음험한 동정심은 버려야 할 것이다. 일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패전과 더불어 하이퍼인플레이션과 세계 공항을 겪으며 불안과 불만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독일을 타락시킨 저 더러운 유대인들 때문이라면, 단지 경제적 불만을 넘어 정의의 소명으로 화자는 나치가 되었을 것이다.

화자는 개인목적론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운명으로 나아가며 독일이라는 국가도 세계사 속에 역할과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부상을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고 의미를 찾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긴다. 자신이 수용소에 자행했던 잔혹한 행위도 소명에 충실했으므로 정당화된다. 자신의 조상 중 ‘독일적인’인 인물을 자신과 연관 시킨 것처럼 독일의 계보도 게르만 민족의 추장인 아르미니우스에서 시작하여 루터와 히틀러를 연결하여 찾는다. 그리하여 비밀스런 소명을 갖고 있는 독일 제국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파괴를 했어야 했다며 ‘조국의 운명을 바쳤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종교적 흥분상태에서 나타나는 독단이 된다. 이런 유의 운명을 믿거나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겐 합리적 판단이 어렵다.

 

이 소설과 장르는 다르지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아히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렌트에 의하면 아아히만은 평범한 사람인데 단지 생각하지 않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화자는 확신에 가득차 있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려 노력한다. 그는 상당 수준의 교양을 갖춘 사람이며 애초에 폭력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갖고 있었던 애국심이나 변화에 대한 열망, 역사나 운명을 믿는 태도는 좋은 사람들도 흔히 갖고 있다. 아렌트는 모두에게 철학을 해야 하는 짐을 지게 했는지 모르지만, 악행에 참여한 다수를 ‘생각이 없는 자’로 만들어 그들의 죄를 가볍게 한 면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생각이 없지 않고 타인을 해롭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 차이를 만들까?

작가가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동정심이다. 화자가 인간성의 마지막 기로에 섰을 때는 수용소에서 그가 좋아했던 시인 예루살렘을 만났을 때다. 그는 갈등 끝에 동정심을 짜라스투라 최후의 죄로 여기며 예루살렘의 인간성을 파괴한다. 작가는 예루살렘이 자살한 날을 화자가 부상당한 3월 1일로 같이 맞추어 예루살렘의 죽음은 곧 화자의 죽음이라는 암시를 준다. 연민과 폭력은 생존을 위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것이다. 폭력이 생존을 넘어 지배를 위해 사용될 때, 내면의 연민을 파괴한다. 그러면 어떤 정당화도 소용없이 그를 메마른 인간으로 또는 끔찍한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세상과 떨어져 사는 나도 지난 노동절에 집회에 갔다. 집회의 마지막은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나는 인터내셔널가를 잘 알지 못해서 아는 부분만 겨우 팔을 흔들며 불렀다.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오래된 습관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감정은 나치의 것과 다른 것일까? 우리가 서 있는 기반은 자본에 대한 적개심일까?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나오는 연대일까?



우리가 숨 쉬던 공기에는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 갑자기 근처에서 바다를 느낀 것처럼, 우리 가슴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고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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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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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읽어서는 안되는 소설이 있다면 바로 이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힘들었다. 소설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과 같이 우울의 늪에 깊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읽는다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욘 포세의 문체는 우울을 묘사하기에 최적화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단문으로 반복하여 서술하는 문체는  소설의 줄거리가 아니라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드러내어 준다. 그래서 독자는 더 어렵다. 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은데다가 화자가 주절거리는 말 속에서 단서를 건져 올려서 줄거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스는 가난한 데다가 노르웨이 출신이고 퀘이커교 집안 출신이다. 가난한데 시리아 출신이고 이슬람교 집안 출신이라 생각하면 조건은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소외되고 배척당한다. 그의 세계는 빛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도 이 세계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또 다른 희망의 빛으로 발견한 사랑에서 마저 버려지고 그것으로 인해 내쫓기고 만다. 세상에서 내쫓기면 그 사람의 세계는 우울함에 갇히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그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정신병원의 규칙을 따르면 그림을 그릴 수 없고, 어기면 병원에서 나갈 수 없다. 그의 선택은 병원에서 탈출하는 것 뿐이다. 사회적 위생의 관점에서 보면 라스의 머리와 수염을 잘라야 하지만 라스에게는 자존심이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


 올리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올리네는 노인이 된 라스의 누나이다. 가까운 기억은 사라지고 먼 과거만 기억한다. 독자는 그녀가 떠올리는 라스의 기억에서 라스의 삶을 조각을 맞출 수 있다. 오전에 동생이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지만 기억하지 못해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다리가 너무 아파 걷기 힘들어 생선을 가져오기가 어렵다. 더구나  용변을 조절할 수 없어서 생선을 화장실에 걸어두고 용변을 봐야 한다. 자신의 상태에 당혹해하지만, 이웃의 도움을 구하지 못한다. 어쩌면 라스는 특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올리네의 경우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미래다. 사회적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을 때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면 자존심은 무너지고 생존은 어려워지고 죽음을 갈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치매 환자의 시각에서 그들을 보기가 어렵다. 그들에게 생각 능력이 없어졌거나 현저히 약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욘포세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사람의 의식을 들추어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치매 환자의 당혹과 절망을 그대로 느껴야 한다. 나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고 내가 다리에 힘이 없어질 때를 상상하고 바지에 오줌을 지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개인의 세계를 가진 인간은 주류세계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라스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그림은 권위자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의사는 그의 건강을 위해 자위도 하면 안 된다고 하고 보조원은 그의 자위를 감시한다. 그래서 그는 본능과도 싸워야 한다. 프로이트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혹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올리네의 경우처럼 인간에게는 타인과  결코 나눌 수 없는 고통도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거의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예정되어 있다. 우울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일까?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실존했던 노르웨이의 화가다. 그의 그림을 그의 고향 바다를 그린 것 같았다. 풍경화인데 아주 무겁고 둔탁한 것으로 툭하고 맞은 느낌이었다. 빛은 멀리서 오는데 짙은 어둠이 스멀스멀 감돌고 있다. 구름과 바위는 무언가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하고 꿈틀꿈틀 움직일 것 같다. 역동하는 에너지와 짓누르는 어떤 힘이 충돌하는 긴장이 느껴졌다. 우울도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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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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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트 하우스 - 불안에 갇히는 곳



 피요르에서 태어나 자라면 어떤 사람이 될까? 험준한 암벽 사이로 짙푸른 바다가 길게 들어와 있고 마을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아름답지만 척박한 곳이다.  드라마 바이킹에 나오는 인물들은 너무나 용감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에 애착이 적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의 신 오딘은 외눈의 우울한 신인데 그의 전사를 죽게 해서 발할라로 부른다. 그래서 그들에겐 죽음이 늘 가까이 있어 보였다. 보트하우스는  피요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여기에는 바이킹처럼 용맹한 인물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잘 못하는 소심한 남자가 나온다. 그는 서른이 되도록 어머니 집에 얹혀살고, 가끔 임시직 일과 기타 연주를 한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바이킹처럼 피요르를 떠날 용기를 가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불안하다. 혼자 피요르에 나가 낚시를 하거나 불안이 심해지면 자기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쓸 뿐이다.


 그는 단문을 쉼표로 이어가는 글을 쓴다. 사건을 반복하여 말하고 같은 사건을 다른 이의 관점에서 말하기도 한다.


 불안이 엄습해 온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나는 적어도 10년을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크누텐과 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내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 중략)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 여름이었다. 난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그는 결혼 했고, 두 딸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크누텐과 나는 늘 함께 였다.

 (중략)

 나는 크누텐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게 내가 두려워해 왔던 거지,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그렇지만 일어날 일이었다는 걸, 옛 친구를 마주치는 건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다는 걸 난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난 예전과 다름없는 것처럼 보여,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원어(노르웨이어)로 읽으면 운율이 느껴진다는 이 낯선 문체는 자폐 아동의 반복하는 혼잣말과 비슷하다. 생각하여 정리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의식 속에 떠오르는 사건은 의지로 제어하기 어려워  여러 사건이 섞이고 시간도 제멋대로다. 어떤 사건은 떨쳐 버리려 애를 써도 자꾸 반복된다. 이 반복하는 사건이 의식의 주류가 된다. 이 소설의 화자에게 그것은 불안을 야기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그는 왜 불안한 걸까? 그는 불안의 이유를 제대로 진술하지 않는다. 독자는 정신과 의사처럼 화자의 주절거리는 말속에 실마리를 찾아가야 한다. 피요르에 사는 두 소년(화자와 크누텐)은 보트하우스에서 놀았다. 주인이 방치하여 몰래 들어가 구축한 그들의 아지트. 병, 조개껍데기와 같은 수집물이 있고, 어른들이 모르는 그들의 은밀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여기에도 불안은 있다. 주인이 와서 바깥에서 빗장을 걸어버리면 갇히게 되는 불안. 밴드를 하는 두 친구에게 관심을 가진 소녀. 두 친구와 그 소녀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었는데 두 소년만 진실을 알고 있다. 이 일 때문에 크누텐은 밴드를 그만두고 마을을 떠났고 마을을 방문할 때도 사람을 만나기를 두려워한다. 크누텐은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왔다가 보트하우스 옆 길에서 십수 년 만에 화자를 만난다. 이때 화자에게 불안이 엄습한다. 화자는 크누텐의 아내가 신경 쓰이고, 크누텐의 아내는 화자를 유혹하고, 크누텐은 아내를 의심한다. 불안한 화자는 연주도 그만두고 외출도 하지 않고 방에서 글만 쓴다. 여름이 지났을 때 또 다른 사건은 일어나고 진실을 아는 것은 두 사람뿐이다. 불안은 해결되지 않고 이제는 글조차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보트하우스에 영원히 갇히게 된 셈이다.


 그는 불안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불안했을 때를 반복하여 말한다. 마음을 흔드는 이가 다가오면 불안하다. 그녀와 함께할까 봐 불안하고 그렇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이 불안은 사람에게 힘을 주기도 한다. 화자에게는 음악을 하게 된 힘이었다. 마음을 흔드는 이가 다른 이에게 눈길을 준다면? 또 불안하다. 그녀와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말할 수 없다. 친구는 떠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사건을 다시 떠올릴 만남이 두렵다. 비슷한 일이 또 생길까 불안하다. 이제  불안에 영영 갇히어 살게 되었으니 불안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바이킹은 나침반도 없이 막막한 바다로 나아갔는데, 더 안전하고 풍요롭게 사는 화자는 왜 불안에 갇히는 것일까? 삶의 척박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크기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바이킹과 같은 불멸의 서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모험은 불멸의 이야기로 남으며 전장에서 죽으면 오딘이 있는 발하라에 간다. 그래서 벽에 똥칠하다 죽을 날을 기다리지 않고 방패를 두드리며 달려 나간다. 하지만 거대 서사가 거짓임이 밝혀진 지금 보트하우스와 자기만의 은밀한 세계에 사는 화자는 불안을 벗어날 마땅한 방법이 없다.

 피요르에 살지도 않는데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 존재로 인한 근원적 불안은 현대인만 졌던 무게가 아니다. 현대인의 특수한 불안은 무거운 이야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대가다. 사르트르는 이 불안을 내던져졌다고 표현했지만 우리는 마냥 내던져진게 아니라 충분히 관리를 받는 편이다. 현대에는 막막함 보다는 유혹이 오히려 많은 편이다. 그래서 자유는 달콤하고 불안은 생각보다 견딜만하다. 더욱 질주하는 21C의 세계를 보면 인간의 욕망은 불안에 눌려서 제어될 만큼 그리 약하지도 않다.


 피요르가 나오는 다큐를 보았다. 육지보다 바다로 가는 것이 더 쉬워 보이는 피요르 가장자리에 형성된 작은 마을 하나가 지나갔다. 그 보트하우스가 있음 직한 마을이었다. 외딴 마을의 낡은 보트하우스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불안 때문은 아니다. 불안을 느꼈던 처음 장소, 불안보다는 설렘이 더 정확한 그곳이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곳은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애틋함. 이것만으로 불안을 이길 만하지 않을까?

나는 여기 앉아 있다. 나는 혼자다. 나는 여기 존재한다. 그것이 이 불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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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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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욘 포세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르웨이 작가의 작가다. 호기심에 찾아 읽은 작품인데 읽은 처음부터 매우 당황했다. 그가 구사하는 문장 때문이다.  단문이 마침표 없이 쉼표로 이어지는데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화자는 그대로인데 다른 이의 관점에서 사건을 다시 진술하면 이게 뭔가 한다. 그러다가 결말에 이르면 추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소설은 매우 단순한 것 같아 던져두어도 될 것 같은데 다시 읽게 된다. 그러면 그 단문들이 힘 있게 살아나고 나는 오히려 긴장한다.


욘 포세의 문장은 우리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생각을 그대로 기술한 듯하다. 머릿속의 생각은 대개 단문으로 이루어지며 반복을 계속한다. 머릿속 생각은 시간 순서로 흐르지 않는다. 돌출하고 뒤섞인다. 불안과 강박이 되는 사건은 떨칠 수 없고 계속 반복된다. 그런데 이 반복은 조금씩 차이를 만든다. 생각이 사건을 반복하여 기억할 때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화자의 강박을 드러내면서도 기억의 시간대를 섞으며 아주 단순할 수 있는 줄거리에 긴장을 만들어 낸다. 독자는 이 차이에서 퍼즐을 맞추듯 사건을 추리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절대 단순하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치밀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방치된 보트하우스에서 초등학교 때 아지트를 만들고 밴드를 시작한 두 친구(화자와 크누텐)가 있었다. 이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비슷하게 반복되는 3번의 삼각관계가 있다. 특히 두 번째 소녀와 무슨 일인가 있었고 그 때문인지 크누텐은 고등학교에 가면서 마을을 떠났다. 결혼하여 가족과 여름 휴가를 와서도 화자나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해한다. 화자는 마을 떠나지 않고 제대로된 직업도 없이 어머니와 함께 산다. 화자는 휴가온 크누텐과 마주친다. 크누텐은 아내와 화자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화자는 크누텐의 아내가 유혹하자 불안해한다.


이 소설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불안일 것이다. 화자는 불안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글을 쓴다. 불안의 계기는 분명한데 이유는 불명확하다. 화자의 처음 불안은 좋아하는 동급생이 나타났을 때였다. 이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 수 없어 불안해 했고 보트하우스에서 키스 놀이를 할 때 그녀가 크누텐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할까 두려워했다. 다음 불안은 밴드가 연주할 때 소녀가 화자에게 눈길을 보냈을 때다. 소녀는 처음에는 화자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크누텐을 보고 그와 이야기 한다. 다음이 10년도 더 넘은 후에 크누텐과 그의 아내를 보았을 때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보트하우스에서 화자를 유혹할 때 불안해 하고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자 불안에 견딜 수 없어 글쓰기 마저 그만둔다. 작가가 사건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은 것은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사건의 폭을 넓혀서 보편적 불안을 다루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작가는 불안을 설명하지 않는다. 어구와 행동을 반복함으로 표현할 뿐이다.


 욕망의 실현 또는 좌절에 대한 두려움은 불안을 유발한다. 이 불안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화자의 경우처럼 음악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 불안은 넓게 보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되고 존재 자체의 문제로 발전되기도 한다.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불안은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과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또 그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이유도 모른채 불안해하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화자가 마음을 두었던 소녀와 크누 텐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었고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비슷한 상황이 오면 본인도 이유를 모르는 불안이 증폭된다. 불안은 틀리지 않아서 마침내 사건은 일어난다. 보트하우스에 있었던 일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처럼 화자만 지게 되는 기억의 짐이 더해졌다. 그래서 화자는 더 큰 불안을 안게 된다. 


  기억은 아마도 보트하우스와 비슷할 것이다. 화자의 보트하우스는 주인이 방치한 틈을 타서 구축한 아지트와 같은 비밀스러운 낙원이다. 하지만 이곳은 주인에 의해 빗장이 걸려 자칫하면 갇히게 될 수도 있는 불안한 곳이다.  기억의 어떤 곳에서는 조개껍데기나 유리병 같은 수집물이 남아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기억은 떨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오히려 반복하여 불쑥불쑥 솟아나 우리를  불안의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고 쉽게 던져 버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화자가 안 됐다는 생각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작가가 사용한 문체는 불안만이 아니라 피요르를 잘 드러낸다. 피요르에 대한 묘사도 제대로 없는데도 파도 소리와 바람이 중요한 곳에 효과음이 들리는 듯 나타난다.  그 효과로 화자의 외로움과 불안이 낭만적 감성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울한데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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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연대기 1~3 세트 - 전3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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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루키의 기억  

                                                -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제목이 꽤 낯설다. 새가 시간의 태엽을 감고 있는데, 그 새가 시대를 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소설은 직장을 그만두고 파스타를 끓이는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루키 특유의 세밀한 묘사와 비유, 간결한 문장을 읽는 재미로 읽어 나가다가 기묘한 무속인이 등장하면 이상해진다. 여기에  관동군의 기억이 더해지고 파스타 남자가 무속인이 되어가면 당혹하게 된다. 이 소설은 무속이 이끌어가는데 이 무속은 전통적이지 않다. 일본의 그 흔한 신사도 하나 나오지 않고 어떤 신에게도 의지하지도 않는데도, 미래를 말하고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기도 하고 일종의 심리 치료도 한다. 무속의 도구도 특이하다. 물이 말라버린 우물과 야구방망이, 얼굴에  생긴 얼룩 반점이다. 더욱 당혹스런 것은 이 도구들의 조합에 아무런 개연성이 없다. 작가는 현대 일본을 살아가는 주류와 비주류 인물의 계보를 관동군의 기억에서 찾고 일본을 치유할 길을 찾으려 한다. 이들 사이의 연결과 치유를 위해 작가가 동원한 방식이 무속이다. 내가 보기에 이 연결은 성공하지 못했고 기괴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일본 작가가 관동군과 전쟁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지를 따라 가 보는 것은 꽤 흥미가 있었다.


 소설의 주요 장소는 마른 우물이 있는 빈집이다.  관동군의 육군 대령으로 엘리트였던 ‘모모’가 살던 집인데 그는 공훈도 많이 세웠고 몹쓸 짓도 많이 했다. 전쟁 포로를 500명 가까이 한꺼번에 처형하고 농민을 몇만 명이나 끌어 모아 강제 노역을 시키다가 절반을 죽어나가게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지 않다 한다. 그는 전쟁후 전범 재판을 피하려 이 집에서 자살을 했다. 그런데 그 후로 이집은 일종의 마가 끼어 이사 들어온 사람들이 목을 메달아 죽고 우물의 물도 말라 버려 빈집이 되었다 한다. 

 관동군의 기억은 평범한 군인(마미야 중위)과 동물원 수의사의 것이다. 마미야 중위는 관동군에서는 별 하는 일 없이 평화롭게 있다가  어떤 임무를 띤 인물(야마모토)은 호위하기 위해  동료 혼다와 함께 몽골 사막에 가게 된다. 그들은 소련 군 장교가 지휘하는 몽골군에게 잡힌다. 소련군 장교는 몽골군을 시켜  야마모토에게 가죽을 벗기는 고문을 하게 하여 죽인다. 소련군 장교에 의해 마미야는 물이 없는 우물에 버려졌다가 기적으로 살아남는다. 전후에는 소련군의 포로수용소에 갖힌다. 그런데 여기서  고문을 행한 소련군 장교를 비밀경찰로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비밀경찰은 불법 권력을 사용하여 수용소를 지배한다. 마미야는 그를 위해 일하게 되지만 그를 죽이려 한다. 마미야는 실패하지만 비밀 경찰은 자신의 비리를 함구하는 조건으로 마미야를 살려준다.

 수의사의 기억은 누구도 전한 사람은 없다. 단지 그의 딸이 신비적 경험으로 알게 된다. 얼굴에 반점이 있는 수의사는 대륙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위해 만주에 설립한 동물원에 가게 된다. 그는 소련군의 진주를 앞두고 동물원의 맹수를 처리하기 위해 온 군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 군인들을 이끈 장교는 명령대로 총을 사용하지 않고는 맹수를 죽일 수 없다고 깨닫고 맹수를 사살하지만 코끼리는 살려 둔다. 다음날 군인들은 만주군 군사학교의 일본인 교관을 야구방망이로 때려 죽인 중국인 생도들을 끌고 온다. 이번에는 명령 그대로 수행한다. 총을 사용하지 않고 칼로 찔러 죽이고 , 주도자는 살인의 무기였던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때려 죽여서 구덩이에 묻는다.

 귀국하는 수송선을 탔던 수의사의 어린 딸은 미군의 잠수함을 만나게 된다. 미군은 비무장 상태에 민간인을 실은 수송선을 함포로 침몰시키려한다. 그 극적인 순간에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공격을 멈춘다. 

 

 하루키에게 관동군의 학살은 전해들은 분명치 않은 이야기이지만 받은 피해는 몹시 구체적인 기억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름을 중요하게 다루는데도 관동군 엘리트 군인은 이름 없이 그냥 ‘모모’다. 평범한 군인인 마미야에게 생생하고 구체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는 기억은 소련의 비밀경찰이 된 군인에게 당한 끔찍한 고문이다. (하루키는 이 고문과 살해를 아주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비밀경찰의 폭력적 강압이 지배하는 수용소를 겪었다. 어린 여자 아이는 미군의 잠수함의  함포 앞에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일본의 평범한 군인들은 인간으로 자존심을 갖고 살려했다고 기억한다. 평범한 관동군은 대부분 별 하는 일 없이 있었고, 맹수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장교는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도 없었다. 마미야는 포로 수용소에서 군림하는 소련의 비밀경찰을 죽이려고 하는(소련인들도 꼼짝 못하는데) 결기가 있었고, 동물원에서 장교는 명령을 거역하고 맹수를 총으로 죽이고 코끼리는 놓아 주었다. 그러니까 잘못이 있다면 일부 엘리트 군인들에게 있었고 평범한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인간으로 살려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끔찍한 학살과 폭압, 군수물자를 위한 수탈은 다 누구의 손으로 했을까?

 다음은 국국주의에 복무한 자들도 사무라이 전통의 결기를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비밀임무를 수행하던 야마모토는 가죽을 벗기는 고문 속에서도 끝내 발설하지 않고 죽는 용감한 정보원이었다. 또 관동군의 엘리트 군인은 활복을 하려 했으나 미군이 나타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권총 자살을 했다 한다. 군국주의의 폭압은 분명치 않지만 군인의 결기는 분명한 기억이다. 그 기억은 저택의 저주로 남아 거주자를 자살하게 하고 심지어 우물까지 마르게 한다. 주인공은 이 주택을 사서 고치고 다시 물이 나오게 한다. 일본인의 전통적 결기를 이어야 일본이 제대로 간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 군부보다 더 잔혹한 나쁜 집단이 있었다 한다. 고문을 자행하고 폭력으로 지배하고 비리까지 저지르는 소련의 비밀 경찰과 야만스런 몽골군, 어린 여자 아이에게 함포를 겨눈 미군이 있었다. 하나 더 덧붙이면 미군과 소련군에 대해서는 매우 편향된 기억도 있다. 관동군이 소련군을 만난 것은 전쟁 종료 1주전이었다. 관동군은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했기에 소련군은 아주 신속하게 관동군을 무장해제 시킬 수 있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관동군은 전후에 일본으로 돌아갔고 강제 수용소에서 노동을 한 부류는 소수였다. 일본군이 전쟁동안 비참한 전투를 치른 적은 미군이었다. 더구나 미군에 투하한 원자폭탄에 히로시마에만 한 순간에 14만명이 죽었는데 미군과의 기억은 어린 여자 아이를 위협한 잠수함 정도였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던 소련군은 고문을 자행하고 가혹하게 지배하고 비리까지 있는 비밀 경찰의 기억으로 관동군 기억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빈집의 우물에서 생긴 얼룩으로 사람들을 치유한다. 우물은 마미야 중위의 우물이며 얼룩은 수의사의 것이다. 이 연결이 많이 이상하지만 일단 받아 들이면, 어떤 기억(또는 흔적)을 만나는 것으로 치유에 이른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왜곡된 기억으로 치유에 이를 수 있을까? 치유의 가능성은 몹시 의심스럽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이런 기억이 유지되는 한 일본은 변함없이 군국주의자들의 나라일 것이다.

  하루키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음악을 듣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며, 특정한 해에 부르고뉴에서 생산된 와인을 찾는다. 손수건까지 갖추어 입는 세련된 양복을 입고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싶어한다. 심지어 그의 무속은 몰타섬에서 비롯되었고 구원이 크레타 섬에 있을거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서양 문화를 소비할 뿐(더구나 이 소설을 쓸 때 하루키는 미국에 있었다한다. 그것도 4년 동안), 그의 세계는 여전히 자신의 우물안에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 처럼 편집된 기억인 우물에 쭈그리고 앉아 구원을 찾고 있는 격이다. 

 기억은 무의식 속에 정돈되지 않는 상태로 불쑥불쑥 솟아나기도 한다. 기억은 쉽게 왜곡되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잘 의심하지 않는다. 악보를 외워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느날 자신이 악보와 다르게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찰하는 사람은 기억을 의심한다. 기억을 분석하고 인과를 찾고 일관된 체계를 갖추려 한다. 더구나 그 기억이 공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계보를 분석하고 정의를 구하는 것이라면 더 철저해야 한다. 하루키는 낯선 경험을 주는 작가인지는 모르지만 큰 이야기를 제대로 다룰만큼 기억을 성찰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일본인 다수가 그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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