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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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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고 지나가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두세번 읽으면 작가가 <흰>에 대한 이야기를 언니의 재건과 애도를 줄거리로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좀 더 읽으면 그녀가 겪은 고통의 깊이가 낯설게 보이다가 문장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그러면 고통속에 만들어지는 진주처럼 빛나는 문장에 짖눌리고 오래 동안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제 당신에게도 내가 흰 것을 줄께.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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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9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종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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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에 나오는 인물은 아일랜드인 스티븐 데덜러스와 벅 멀리건, 잉글랜드인 헤인스인데 이들은 마틴타워에 살고 있다. 1장은 세사람의 대화가 주를 이루며 스티븐의 내면이 기술된다.
각 인물에 대한 묘사가 따로 없어서 대화 중의 정보로 짐작해야 한다. 스티븐은 교사이자 시인이며, 벅은 의대생이고, 헤인스는 학생으로 보인다. 1장은 세 사람이 아침에 면도와 식사를 하고 더블린만에 수영을 하러 가기까지 이야기다. 스티븐은 건물 월세를 내고 있고 둘은 그냥 같이 살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븐은 어머니가 최근에 죽었는데 어머니가 죽기전 기도를 부탁했지만 거부해서 죄책감이 남아 있는 상태다. 벅은 스티븐을 예수회 애송이, 어머니를 죽인 아들이라 놀리며 돈을 빌리거나 요구하고 집 열쇠도 요구한다. 스티븐은 이런 벅에게 돈도 빌려주고 열쇠도 내어 주지만 벅에게 모욕받았다고 말하고 벅을 찬탈자로 여긴다. 스티븐의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두 가지 문제를 상징한다. 영국에 식민지배를 받고 있으며 종교적으로 카톨릭인 아일랜드의 문제다. 이 둘다 그가 아일랜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탓에 짊어진 문제다. 그는 이 문제를 시원하게 던져버릴 수도 없다. 던져 버릴려니 죄책감이 따르고, 지고가려니 역사는 무겁고 종교는 진부하고 어리석다. 더구나 관심이 있는 아일랜드 문학은 깨지 거울 같다. 이런 고민은 초라하게 만드는 문제도 있다. 자신에게 친절한 척하며 종처럼 부리려는 벅의 문제다. 자기를 모욕했다고 한 번 쏘아 붙이기는 했지만 돈도 주고 열쇠도 내어 주었 분노를 곱씹고 있을 뿐이다.

오디세이아의 1장은 신들이 회의 끝에 10년을 넘게 떠돌고 있는 오디세우스를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오디세우스의 집은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청혼하려는 남자들이 진을 치고 앉아 오디세우스의 가산을 탕진하며 음식을 먹고 있다. 아테네 신은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로 변하여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아버지가 살아 있고 그를 찾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텔레마코스는 청혼자들을 물리치고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정을 준비를 한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고 아버지를 찾아 가족을 복원하려 하지만 스티븐은 아버지를 극복하려 한다. 어머니가 기도를 해달라고 한 것은 아버지의 자리에 스티븐이 있어주기를 요청했고 스티븐은 거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변에서 떠 오른 익사체는 스티븐이 아버지를 극복했다는 상징일 수도 있다.
텔레마코스에게는 조언하고 돌보는 친절한 신이 있다. 그가 부정해야 할 것은 아버지기 죽었을지 모른다는 의심 뿐이다. 그는 친절한 조언자를 따라 의심없이 가면 된다. 스티븐에게는 신은 커녕 괜찮은 조언자도 없다. 벅도 헤이즈도 괜찮은 조언자가 아니다. 오히려 오딧세이아의 청혼자들 처럼 그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찬탈자에 가깝다. 그에게는 민족, 종교, 문학은 흔들리며 극복해야할 어떤 것이다. 그래서 텔레마코스는 희망에 차서 출발을 준비하지만 스티븐에게는 명확한 것은 없고 일상의 자잘한 문제를 걱정해야 하고 벅에게 대한 분노 같은 소심한 생각을 해야 한다.

시작부터 이 책은 쉽지 않다. 라틴어 삽입구도 생경하고 상징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도 있고 오디세이아와 대조도 해야 하니 더욱 그렇다. 작가는 스티븐의 의식을 흩어서 배치해 놓았고 독자는 그것을 엮어서 실마리를 찾아 낯선 아일랜드인의 의식을 탐구해야 한다. 이런 배치가 치밀한 의도인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수없이 나오는 인용에 대해 의미를 찾으려면 시간이 많이 든다. 여행을 앞두고 텔레마코스는 분명한 목표가 있기에 두려움을 넘어 기대를 같겠지만 스티븐은 그렇지 않다. 조언자도 없고 목표가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자유라는 모호한 관념만 있는 여정일 뿐이다. 소름처럼 돋아오는 불안은 스티븐만의 것은 아니며 다음 장을 넘기려는 내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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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9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종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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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즈>의 리뷰를 시작하며


 <율리시즈>는 훌륭하지만 어려운 문학작품이라고 오래 전에 들었지만 읽을 기회가 없었다. 이 작품이 다시 만나게 된 계기는 슈테판 츄바이크의 <어제의 세계>에서 작가 제임스 조이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츄바이크에게는 제임스 조이스를 낯선 언어천재 쯤으로 설명했는데, 나는  <율리시즈>의 작가로 만났고 흥미를 느꼈다.

 전자책으로 구입하여 운전을 하거나 잠결에 듣기 시작했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찬찬히 보니 서술방식 자체가 보통의 소설과는 달랐다. 특별한 줄거리나 상세한 묘사도 없이 대사를 위주로 해서 단문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작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욘 포세의 서술방식과 비슷했다.  GPT에게 설명을 부탁하니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했다. 욘 포세와의 차이점은 욘포세는 반복되는 문장으로 주인공이 갖고 있는 강박을 드러냈다면 조이스는 화자의 정체성을 조각조각 보여주는 것 같다.

  <율리시즈>는 <오디세이아>를 패러디 해서 <오디세이아>와 똑 같은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등장 인물도 <오디세이아>의 인물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오디세이아>는 영웅의 이야기이고 십수년간 일어났던 일이지만 여기에서는 한 평범한 아일랜드계 유대인이 단 하루 동안에 더블린에서 일어난 일이다. 작가는 물거품처럼 사라질 이야기 보통사람의 하루 일상을 괴물을 잡고 세상을 구하는 별자리로 남을 영웅의 이야기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리뷰를 읽어보니 소설의 독자보다 소설로 해서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 더 많다하니 따분하고 어려움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도도 아닌데 내가 왜 이 책을 읽으려할까? 따분하고 어려움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고 할 수 있을까? 멀리서 험준한 산위에 있는 성채처럼 언젠가 가보고 싶은던 작품이었는지도 모른다. 별 모험 거리가 없는 내겐 가장 안전한 지적 모험이니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오디세이아>와 <율리시즈>를 한 장씩 병행하여 읽으며 이들을 따라 여행을 떠나 보겠다. 낯선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으나 멀리 거울에 비친 별자리 처럼 오디세우스가 있고 목적지가 어디라 해도 과정이 즐길만 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책을 읽고 장별로 후기를 다는 것은 처음이지만 여행기를 쓰는 마음으로 시도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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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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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바다를 생각하면 가슴이 뛸까?

-보르헤스의 독일 레퀴엠을 읽고-

 


“우리가 숨 쉬던 공기에는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 갑자기 근처에서 바다를 느낀 것처럼, 우리 가슴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고동쳤다.”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눈앞에 갑자기 바다가 펼쳐진 것처럼 놀랐다. 나에게도, 80년대를 지나왔던 우리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었다. 거리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어깨를 걸고 노래 부를 때, 전국에서 모인 깃발이 입장할 때 우리는 가슴이 벅차올랐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그런데 위의 문장은 보르헤스의 <독일 레퀴엠> 중에 나오는 것으로 승전을 구가할 때 나치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문장이 가장 사악한 집단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며 당황스러웠다. 정말 그들도 바다를 생각하면 가슴이 뛸까?

 

보르헤스는 소설 <독일 레퀴엠>에 한 나치 전범을 화자로 등장시킨다. 이 소설은 유대인 수용소의 부소장이었던 화자가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을 당하기 전날 세상이 자신을 이해하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자신의 선조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성장 과정, 나치당에 입당한 이후 소장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 사형수가 되기까지를 독일의 생성에서 제 3제국이 멸망하는 과정과 병행해서 기술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화자는 1908년 생이다. 브람스, 쇼펜하우어, 세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받으며 음악과 형이상학 덕분에 오랜 불행한 시절을 맞설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니체와 슈펭글러를 자기 삶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20대 초에 나치당에 입당한다. 처음에는 폭력적인 것 때문에 힘들었지만, 더 큰 목적을 위해서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교나 기독교 초기와 비교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있다는 흥분을 갖고 전쟁을 고대한다. 그런데 그는 소요 사태 중 총에 다리를 맞아 다리를 절단하게 되어 전쟁에 나가지 못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개인목적론을 발견하고 자신이 부상당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가 되거나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의미 있는 일이 지속해서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유대인 집단수용소에 부소장으로 발령 나자 그 직책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성실히 책임을 다한다. 자기가 좋아했던 행복을 노래하는 시인 ‘예루살렘’이 수용소에 오자, 동정심에 흔들리지 않고 그의 인간성을 파괴하여 자살에 이르게 하는데 ‘성공한다’. 나치가 승전을 거듭할 때는 그는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 같은 흥분을 느끼지만, 전쟁에 패하게 되자 자신의 죄를 자책하기도 하고, 이제는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모든 일이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독일의 운명은 예수와 유대주의의 병에 걸린 세상을 구해내고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생각하며 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뻐한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자기 육체는 몰라도 정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죽음을 기다린다.

 

음악을 사랑하고 형이상학을 공부한 지식인이 어떻게 나치가 되었을까? 그토록 잔인하게 한 인간을 몰락시키는데 전력을 다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키워드는 ‘독일적인’과 ‘새로운 시대’ 그리고 ‘운명’이였다.

이 소설의 제목 독일 레퀴엠은 브람스의 작품명이기도 하다. 브람스는 최초로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작품을 쓰면서도 독일 레퀴엠이라기보다는 인류 레퀴엠이 더 적당하다고 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더욱 보편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라 한다. 또 당시 독일어로 작품을 쓴 이유는 독일인의 자부심이 아니라 대중에게 친숙한 독일어를 쓴 것이기 때문에 ‘독일적’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작가가 제목으로 독일 레퀴엠을 잡은 것은 독일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독일적’으로 불리는 것의 의미 왜곡을 드러내고자 함도 있을 것이다.

화자는 ‘독일적인’ 것에 경도되어 있다. 그는 그의 조상을 ‘독일적인’것과 관련된 사람만 언급한다. 자신은 고문과 살인으로 사형수가 되었지만 독일과 관련된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공을 세운 선조의 이름을 열거하며 그들이 곧 자기 자신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작가는 ‘편집자 주’의 형식으로 화자가 자신의 선조 중에 가장 유명한 헤브라이어 학자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그는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독일적인’ 것을 찾는다. 쇼펜하우어에게서는 논리를 브람스와 세익스피어를 통해 무한히 다양한 세계를 배웠으며 자신이 그렇게 ‘극악무도’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세익스피어를 거대한 독일계 이름을 가졌다며 슬며시 ‘독일적인’ 것으로 편입시킨다. 그가 언급한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을 쓴 문명사학자이다. 그는 전쟁과 혁명으로 정점에서 무너지고 있는 서구 세계를 썼으며 독일의 몰락을 예견한 사람인데, 화자는 슈팽글러를 비판하면서도 그에게서 독일적이고 군인다운 정신을 발견한다.

화자가 열망한 새로운 시대는 유대교에서 비롯된 기독교 문명을 뒤엎는 새로운 도덕률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는 나치즘을 본질적으로 도덕적 행위인데 그것은 이미 부패한 노인에게 옷을 벗겨 새사람에게 옷을 입히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폭력과 칼이 중심이며 음험한 동정심은 버려야 할 것이다. 일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패전과 더불어 하이퍼인플레이션과 세계 공항을 겪으며 불안과 불만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독일을 타락시킨 저 더러운 유대인들 때문이라면, 단지 경제적 불만을 넘어 정의의 소명으로 화자는 나치가 되었을 것이다.

화자는 개인목적론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운명으로 나아가며 독일이라는 국가도 세계사 속에 역할과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부상을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고 의미를 찾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긴다. 자신이 수용소에 자행했던 잔혹한 행위도 소명에 충실했으므로 정당화된다. 자신의 조상 중 ‘독일적인’인 인물을 자신과 연관 시킨 것처럼 독일의 계보도 게르만 민족의 추장인 아르미니우스에서 시작하여 루터와 히틀러를 연결하여 찾는다. 그리하여 비밀스런 소명을 갖고 있는 독일 제국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파괴를 했어야 했다며 ‘조국의 운명을 바쳤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종교적 흥분상태에서 나타나는 독단이 된다. 이런 유의 운명을 믿거나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겐 합리적 판단이 어렵다.

 

이 소설과 장르는 다르지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아히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렌트에 의하면 아아히만은 평범한 사람인데 단지 생각하지 않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화자는 확신에 가득차 있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려 노력한다. 그는 상당 수준의 교양을 갖춘 사람이며 애초에 폭력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갖고 있었던 애국심이나 변화에 대한 열망, 역사나 운명을 믿는 태도는 좋은 사람들도 흔히 갖고 있다. 아렌트는 모두에게 철학을 해야 하는 짐을 지게 했는지 모르지만, 악행에 참여한 다수를 ‘생각이 없는 자’로 만들어 그들의 죄를 가볍게 한 면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생각이 없지 않고 타인을 해롭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 차이를 만들까?

작가가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동정심이다. 화자가 인간성의 마지막 기로에 섰을 때는 수용소에서 그가 좋아했던 시인 예루살렘을 만났을 때다. 그는 갈등 끝에 동정심을 짜라스투라 최후의 죄로 여기며 예루살렘의 인간성을 파괴한다. 작가는 예루살렘이 자살한 날을 화자가 부상당한 3월 1일로 같이 맞추어 예루살렘의 죽음은 곧 화자의 죽음이라는 암시를 준다. 연민과 폭력은 생존을 위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것이다. 폭력이 생존을 넘어 지배를 위해 사용될 때, 내면의 연민을 파괴한다. 그러면 어떤 정당화도 소용없이 그를 메마른 인간으로 또는 끔찍한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세상과 떨어져 사는 나도 지난 노동절에 집회에 갔다. 집회의 마지막은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나는 인터내셔널가를 잘 알지 못해서 아는 부분만 겨우 팔을 흔들며 불렀다.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오래된 습관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감정은 나치의 것과 다른 것일까? 우리가 서 있는 기반은 자본에 대한 적개심일까?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나오는 연대일까?



우리가 숨 쉬던 공기에는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 갑자기 근처에서 바다를 느낀 것처럼, 우리 가슴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고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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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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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읽어서는 안되는 소설이 있다면 바로 이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힘들었다. 소설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과 같이 우울의 늪에 깊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읽는다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욘 포세의 문체는 우울을 묘사하기에 최적화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단문으로 반복하여 서술하는 문체는  소설의 줄거리가 아니라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드러내어 준다. 그래서 독자는 더 어렵다. 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은데다가 화자가 주절거리는 말 속에서 단서를 건져 올려서 줄거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스는 가난한 데다가 노르웨이 출신이고 퀘이커교 집안 출신이다. 가난한데 시리아 출신이고 이슬람교 집안 출신이라 생각하면 조건은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소외되고 배척당한다. 그의 세계는 빛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도 이 세계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또 다른 희망의 빛으로 발견한 사랑에서 마저 버려지고 그것으로 인해 내쫓기고 만다. 세상에서 내쫓기면 그 사람의 세계는 우울함에 갇히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그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정신병원의 규칙을 따르면 그림을 그릴 수 없고, 어기면 병원에서 나갈 수 없다. 그의 선택은 병원에서 탈출하는 것 뿐이다. 사회적 위생의 관점에서 보면 라스의 머리와 수염을 잘라야 하지만 라스에게는 자존심이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


 올리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올리네는 노인이 된 라스의 누나이다. 가까운 기억은 사라지고 먼 과거만 기억한다. 독자는 그녀가 떠올리는 라스의 기억에서 라스의 삶을 조각을 맞출 수 있다. 오전에 동생이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지만 기억하지 못해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다리가 너무 아파 걷기 힘들어 생선을 가져오기가 어렵다. 더구나  용변을 조절할 수 없어서 생선을 화장실에 걸어두고 용변을 봐야 한다. 자신의 상태에 당혹해하지만, 이웃의 도움을 구하지 못한다. 어쩌면 라스는 특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올리네의 경우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미래다. 사회적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을 때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면 자존심은 무너지고 생존은 어려워지고 죽음을 갈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치매 환자의 시각에서 그들을 보기가 어렵다. 그들에게 생각 능력이 없어졌거나 현저히 약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욘포세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사람의 의식을 들추어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치매 환자의 당혹과 절망을 그대로 느껴야 한다. 나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고 내가 다리에 힘이 없어질 때를 상상하고 바지에 오줌을 지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개인의 세계를 가진 인간은 주류세계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라스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그림은 권위자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의사는 그의 건강을 위해 자위도 하면 안 된다고 하고 보조원은 그의 자위를 감시한다. 그래서 그는 본능과도 싸워야 한다. 프로이트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혹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올리네의 경우처럼 인간에게는 타인과  결코 나눌 수 없는 고통도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거의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예정되어 있다. 우울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일까?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실존했던 노르웨이의 화가다. 그의 그림을 그의 고향 바다를 그린 것 같았다. 풍경화인데 아주 무겁고 둔탁한 것으로 툭하고 맞은 느낌이었다. 빛은 멀리서 오는데 짙은 어둠이 스멀스멀 감돌고 있다. 구름과 바위는 무언가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하고 꿈틀꿈틀 움직일 것 같다. 역동하는 에너지와 짓누르는 어떤 힘이 충돌하는 긴장이 느껴졌다. 우울도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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