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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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 고 누군가 말한다면 이런 질문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


1.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

2. 소설이냐 에세이냐.


첫 번째 질문은 무난한, 그러니까 여느 소설가나 작가에게도 하게 되는 물음이라 보편적이지만 두 번째 질문은 이례적인 편이다. 소설만큼 에세이 역시 유명한 작가는 그리 많진 않은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엔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해 내 경우엔 늘 몇 개의 소설과 대부분의 에세이라고 답했는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은 후에야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에세이인 것 같다. 이유는 더 명확하다. 이 책에서 쓴 작가 본인의 비유를 빌리자면 작가로서의 서랍(소재를 넣어둔 일종의 마인드팰리스)은 호불호가 있지만 에세이로서의 서랍은 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책을 읽으면서 아, 말을 잘 하는 작가구나, 그래서 에세이는 더 설득력 있게 읽혔구나, 를 깨닫는다.


글을 읽고 말솜씨를 짐작한다니 우스운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의 '말솜씨'는 실제로의 말재간과는 무관하다. 타입이나 유형이라고 해도 좋다. 직관적으로 말재간이 좋은 사람이구나, 라는 느낌이 들게끔 쓰는 작가들이 있는데 대개는 그들이 쓴 에세이는 소설만큼 때로는 -칭찬인지 불운인지- 소설 이상으로 재미있다. 마주 앉아서 대화를 하거나, 강연을 할 때와 비슷한 일상적인 어휘를 쓰면서도 논리적으로 기승전결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도(즉, 서면을 통하는데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게다가 균형감각이 무척 좋아서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흐트러짐 없이 표현하는데에도 그게 아집이나 완고함이라기보단 명확함, 명징함 등으로 느껴지게도 한다. 자신의 주장은 이러하며 생각은 이러하지만 세상에는 나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니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당신의 방법을 찾는 것이고 그리고 당신이 궁금하다면 공개할 나의 방법은 이런 것입니다. 대개는 이런 어조다. 생각해보면 늘 그런 식으로 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십 년 삼십 년에 걸쳐 직업적인 소설가로 활약하고, 혹은 살아 남아서 각자 일정한 수의 독자를 획득한 사람에게는 소설가로서의 뭔가 남다르게 강한 핵core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drive, 장기간에 걸친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 이건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자질이자 자격이라고 딱 잘라 말해버려고 무방할 것입니다.


소설 한 편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한 일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못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마도 ‘재능’과는 좀 다른 것이겠지요.


나는 누군가에게서 비판을 받을 때마다 되도록 긍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뜨뜻미지근한 흔한 반발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보다는 설령 네거티브라고 해도 분명한 반응을 이끌어내는게 더 좋을 것이다, 라고.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 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안된다 싶더라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 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원래가 발췌를 귀찮아하는데다 이 책에서 발췌를 하려거든 책 하나를 필사하는게 나을만큼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많았지만 몇 개만 슬쩍 옮겨본다. 아마 이 전에 작가의 에세이를 읽은 사람에게는 약간 동어반복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을 것 같다. 나만 해도 몇몇 챕터는 그렇게 느껴졌지만 거기에 약간 보완 된 부분들이 꽤 재미있고 의미있다.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유의미한 정보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작가가 되고싶은, 소설가를 꿈꾸는, 그게 아니라도 글로 창작을 하거나 더 나은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에게 특히 유용한 정보가 많이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처음이 아니라 유지를 하는게 어렵다는 사실, 자신은 규칙적인 생활로 늘 정해진만큼 글을 쓴다는 것, 자신의 내부에서 글감을 찾아야 오래 견디고 덜 지루해진다는 생각과 자신의 '번역투' 문장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와 어째서 문학상 심사위원은 하지 않는지, 나아가 상이란 무슨 의미인지 등등. 어찌됐거나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독자라는 말과 더불어 나를 계속 찾고 궁금해하는 독자가 있고 그 독자를 만족시키는 것, 꾸준히 글을 써 그들을 만나는 것이 자신이 해야할 가장 큰 업이라는 말에는 묘한 감동이 느껴진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행위가 누군가의 창의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입장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괴감이나 질투, 열등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러한 말은 어쩌면 독자 한 명이 작가 한 명만큼이나 큰 창구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무라마키 하루키라는 소설가, 도 아니고 소설가라는 직업, 도 아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라니 제목이 재밌다는 생각을 했는데 끝까지 읽고나면 그야말로 맞춤인 제목같다. 이 책은 소설가라는 직업의 고단함에 대해 투정을 털어놓는게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소설이 업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발표하는 -사실상- 작법서에 가깝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설을 쓰는 분들, 창작자가 되려는 분들, 글을 더 잘 쓰고 싶은 분들이 읽는다면 분명 한 가지 이상은 유의미할 정보, 혹은 다시 생각해볼만한 이색적인 발상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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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희망 2017-02-1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끼의 에세이를 가장 좋아하고 그 다음이 단편입니다.
고백하자면 장편은 읽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의 장편들도 읽고닢어졌구요 또 이젠 그를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Shining 2017-02-17 17:37   좋아요 0 | URL
전 몇 개의 소설과 대개의 에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에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글쓰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더불어 이 책은 작가 본인의 매력 뿐 아니라 글쓰는 행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줘서 제겐 유용하고 의미있는 책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

희선 2017-02-17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쓰기 힘들어서 괴로웠던 적이 없었다고도 하죠 쓰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은데... 하루키는 쓰고 싶을 때 쓴다고 했군요 쓰려고 준비를 먼저 하고 꾸준히 쓰겠습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고 산문도 쓰고 번역도 하는군요 소설만 쓰지 않고 다른 걸 해서 기분을 바꾸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다른 데서 했군요 어딘가에 떠나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소설가는 다음 책이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도 하죠 그게 얼마 없다 해도 그 사람을 생각하고 쓸지... 아니 그것보다 자신이 쓰고 싶어서 쓰는 게 더 좋겠네요 작가한테 자기 책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힘이 되겠습니다 거기에 부담을 가지지 않는 게 좋겠군요


희선

Shining 2017-02-17 17:41   좋아요 1 | URL
그렇다고 하네요. 솔직히 좀 놀라워요. 즐겁지 않으면 이렇게 오래 쓸 수 없다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제 생각엔 애정보단 애증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이 분은 그렇게 말하시는군요(흐음). 그때 쓴 글이 이 글에도 똑같이 포함되었는지 아니면 생각이 변하지 않았는지 희선님이 기억하신 부분과 완전히 같군요. 여전히 재밌고 즐거우며 쓰고 싶고 다른 일과 함께 쓰되 병행하진 않는다. 아예 소재 창고 같은게 다르다고 말하더라구요.

글쓰기를 통해 부수적으로 타인에게 위안이나 연민, 정보나 지식을 줄 순 있지만 근본적으로 글쓰기란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이기적인 행위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 괴롭고도 즐겁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창작 행위를 왜 하겠냔 말이죠(웃음). 자괴감을 갖는 날에는 이 사람은 무려 창작을 하는데 나는 소비밖에 못하지, 하고 주눅들기도 하지만 하루키는 바로 그 독자가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라고 하니 왠지 다행스럽기도 하네요 :)

2017-02-18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19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 없는 완전한 삶
엘런 L. 워커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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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치과에 정기검진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사랑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의사는 내게 다짜고짜 "결혼하셨어요?"라고 묻기에 "아뇨."라고 답했다. 그 다음엔 "하실거죠?" 묻는데 치아와 결혼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해 멀뚱히 있자 "지금은 괜찮지만 출산을 앞두거나 수술을 하게 될 경우..."라고 하신다.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말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혹시 임신을 염두에 있다거나 출산을 예정하는 경우" 라고 말했다면 같은 말이라도 기분이 달랐을 것 같다. 결혼 적령기 안에 들어간 여자. 미혼. 사회의 통념상 '당연하다'는 가정을 하는 것까진 예민하게 굴지 않으려해도, 거기서 제가 비혼주의자라서요,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지만. 이건 좀 좋은 화법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그 사랑니는 한 해가 지난 지금도 멀쩡히 잘 쓰고 있다. 결혼과 출산을 앞두지 않아서 말이다.

 

1-2. 이 책을 읽다가 그 날 치과의사가 한 질문이 떠올랐다. 아주 가끔 억울한 기분이 든다. 기혼인 사람, 결혼을 예정하거나 계획이 있는 사람, 자녀를 갖거나 낳은 사람에겐 "근데 결혼은 왜 하셨어요?"라거나 "어쩜 애기를 다 낳았어요?"라고 묻지 않는데. 반대의 경우엔 "왜 결혼을 안 하려구요?" 라던가 "아이를 낳아서 키워봐야..."하는 말을 아무런 자각 없이 하는 무배려와 이기적인 면모를 보이곤 하는지. 만약 전자인 질문을 해버리면... 말을 말자.

 

2. 한 친구는 지난 달에 아이를 낳았다. 최근 통화에서 친구는 아이가 벌써 고개를 돌리려고 한다거나 아빠를 닮은 것 같다거나 신랑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낸다. 그녀 인생의 엄청난 변화가 생겼으니 당연한 대화라고 생각해 그저 응응,그랬구나, 하며 말을 맞췄으나 전화를 끊은 후 문득 "근데 넌 어떻게 지내?"라는 식의 질문을 한 번도 듣지 못했음을 깨닫자 왠지 입이 썼다. 이해한다. 부럽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그냥, 그저 이젠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친구는 결혼을 할 때 잃는게 아니라 아이를 낳을 때 잃게 되더라는 또 다른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3. A는 내게 어쩌면 너는 -비혼이나 아이를 낳지 않는 문제를 결심한 사람들에 대한 적지 않은 편견과 다르게- 책임감이 없는게 아니라 반대로 책임감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남들도 다 사는데, 애 키우는게 별거야, 그렇게 힘들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떻게 해내겠어, 난 좋은 사람이고 남편도 그러니까, 라는 불성실한 확신으로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거라고. 하긴, 엄마도 내게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하신다. 너보다 한참 부족한 사람들도 다 해내는 걸 왜 못할거라고 생각하냐고.

 

3-1. 못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거라 이야기해봐도 엄마는 -그저 딸을 배려해 말을 안 하는 것도 같다- 여전히 일말의 의구심과 측은함을 조금씩 안고 계신다. 그래서 요새 가끔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형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언니는 결혼을 했고 형부는 처가 식구들과 가깝고 제법 잘 지낸다. 아이도 둘 있다. 남동생도 아마 결혼을 할 테니까. 나쁜 의도라는건 알지만 어쨌건 부모님에게 나 말고도 손주와 사위와 며느리라는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를 만들 자식이 있다는 건 아주 가끔 다행이다(물론 이건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아주 이기적인 태도다).

 

4. 이 모든 이야기가 이 책 안에 있다. 저자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확고한 결심을 했지만 그 결심이 흔들리고 다시 잡히는 과정에서 혼란과 우울감을 느꼈다. 그 후 자식이 없는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책이 너무 적고 정보가 얕다는 생각에 자기 자신과 주변을 시작으로 해 사례를 모으고 책을 썼다. 저자가 말하는 아이가 없는 삶childfree에는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아이를 원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던 이들도 있으며 처음부터 자신의 주장을 확립한 사람들도 있다. 그 경우의 수를 분류하고 아이가 없는 삶이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그들은 육아 대신 무엇에 초점을 맞추며, 왜 현재의 삶을 살게 되었고, 사회는 그들에게 어떤 편견을 갖고 있고 그 편견은 또 옳거나 그른지에 대해 썼다. 

 

4-1.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하기 위해>파트에선 동의할만한 고민의 흔적이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사회적, 유전적으로 희미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시점이 되면, 그 점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사회와 주변이 압박하는 이상화된 가정과 육아에 대한 환상에 대한 토로. 특히 부모가 된다는 점을 지나치게 환상적이고 이타적인 행위로 받아들이고 성숙한 사회구성원이 되는 자격처럼 권장하는 탓에 아이를 낳지 않으면 자신이 대단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거나, 성장하긴 커녕 퇴화하거나, 진정한 어른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스트레스에 대해서 동의한다.

 

4-2. 그리고 <아이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 <아이 없는 사람들이 마주해야 할 문제>파트는 앞으로 고민해볼만한 것들, 살면서 접할만한 고민에 대해 쓰여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좋은 파트너를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사회의 비주류로 살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이가 없기에 받는 차별이나 아이가 없기에 냉혹하고 무정한 사람이라는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부당함, 혼자가 된 미래에 대한 불안 등등. 예컨대 이런 부분들에 공감이 갔다.

 

우리 사회에서는 세 가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녀를 가질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자녀 없이 사는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일부 부모들은 자녀를 낳은 일을 후회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중략) 제퍼스는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부모 노릇을 즐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어떤 사회에서는 아픈 반려동물을 돌보기 위해 휴가를 내도 정상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비롯해 가족 중심의 대다수 공동체에서는 비웃음을 살 뿐이다. 최근에 아이가 없는 없는 내담자 하나가 전화를 걸어와 아픈 고양이를 돌봐줘야 한다면서 상담 약속을 취소한 일이 있었다. 나 역시 반려견을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라,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약속을 취소할 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비서들 중 아이 엄마인 사람이 어이없다는듯 말했다. “세상에, 고양이가 아파서 약속을 취소하겠다니, 이게 말이 되나요?”

 

다른 사람을 보살피길 좋아하고 여성스럽다는 것이 자녀를 가진 사람만의 특성일 수는 없다. 내가 인터뷰한 여성들 중 대다수가 자신을 친구들과 가족을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이런 자질을 가졌다 해서 꼭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싶어하진 않는다. 여성들을 아이와 관련짓는 것은 사회적 기대의 한 예라고 봐야 한다.

 

린다는 이제 엄마가 되었고 관심의 초점이 ‘자신의 목표’에서 ‘무엇이 아기에게 최선인가’로 옮겨갔다. 그것이 건강하고 정상적일뿐더러 린다와 린다의 아들에게 필요한 변화임을 알면서도, 나는 기운이 쭉 빠졌다.

 

5.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가 원했던 부분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나는 조카들과 아주 가까운 사람-일반적인 이모의 의미보다 훨씬- 이 되어있었다. 작은 조카는 엄마보다 내게 안기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의 생체 시계는 아이의 아빠보다 내가 더 정확히 안다. 큰 아이는 엄마랑 아빠가 놀아주는 것보다 나랑 노는게 더 재밌다고 몰래 귀엣말을 한다. 나 역시 내 어디에 이런 말랑한 마음이, 이런 애틋한 마음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를 애정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 때마다, 아이에 가까운 삶을 사는만큼 나에겐 육아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확인한다. 내가 얼마나 나쁜 부모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아이를 위해 배려하고 때로는 희생도 해야 할 삶을 선택하기엔 내가 얼마만큼 이기적인 사람이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나와 같은 사람을 엄마로 둔 아이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 내가 엄마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런 각오나 기대나 다짐이 내 안에 있는지 물어볼 때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것을 느낀다. 이 책에서도 나왔듯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부모 노릇을 즐기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식이다.

 

5-1. 게다가 아이들이 워낙 가까이 있고 육아를 함께 나누느라 아이가 없는 삶에 대해서도 본의 아니게 체험해보기도 한다. 비용과 시간, 노력과 여가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경제적인 기회비용을 생각해보게 되고 아이가 있음으로 인해 변할 수 밖에 없는 삶의 형태와 그들을 선택하지 않음으로 내가 갖게 될 장점과 단점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조카는 자식과 다르지"라던가 "조카가 아무리 가깝고 예뻐봐야 자식만큼" 또는 "자식 낳으면 또 다르다."는 조언을 가장한 참견은 그만 받고 싶다. "안 낳아봐서 그래."까진 그렇다치지만 "출산도 육아도 안 해본 사람이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거둬주길 바라고 있다.

 

6. 사례 위주로 진행되는 책이기에 깊은 통찰력 같은 건 없다. 글이 하나로 모이기보단 약간 어수선한 느낌을 주는데다 대부분이 여자의 관점이라는 것도 약간은 아쉽다. 아마 저자가 여자고 그가 주로 접하는 주변인이나 내담자, 무엇보다 출산의 직접적인 주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렇다면 남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나 고민을 갖고있는지 알 수 없는 건 역시 아쉬운 문제고 꼬아 생각하자면'아이없는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주로 여자에게 쏠려있다는 것도 씁쓸한 일이다.

 

6-1.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여러 사람의 삶과 그들의 역사와 가치관에 대해 듣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 저자가 머리말에 썼듯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출판되는 현실에서 아이없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 책의 의미인 것 같다. 

 

6-2. 결혼을 하고 아이에 대한 계획이 있는 사람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들은 다른 책들을 읽느라 바빠 굳이 아이 없는 삶에 대해서까지 읽어볼 차례가 오지 않을 것 같다(비꼬는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이미 고민을 하고 선택을 했을테니까. 만약 나였어도 그럴 것 같고). 선택하는 사람들은 망설임이나 경우의 수를 상대적으로 적게 가정한다는데 비해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불안해하며 망설이고 가정해본다. 대개의 모든 일이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덧) 인구증가의 면이나 환경오염의 문제 등에서 아이 있는 삶이 사회를 더 위태하게 나쁘게 만드는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놀라웠다. 여태껏 이런 관점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소비나 생산의 구조에서 봤을 땐 오히려 다자녀가정에 혜택을 주는게 합리적이지 않나 -정작 나 자신은 비혼을 지지하면서도- 생각해왔던 터라 내 자신이 사회에 세뇌가 된 건지, 미국과 한국은 인구에 대한 태도가 다른가(한국은 출산률 저하로 국내 인구 감소와 노령화를 걱정하는 터라), 아니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당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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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9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3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7-01-05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ㅎ ㅎ ~ 저도 그 경험자 입니다.
사랑니 와 치과. 임신과 출산 이 뼈 마디에 미치는 영향을 몸으로 겪었습니다. ^^ 공감하고 갑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 기분을 느끼는 날이 있다. 남들은 아이를 낳고 결혼을 약속하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나. 바로 전 날까지도 바쁘게,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열심히 걸어온 시간이었는데 대뜸 친구의 반가운 소식 앞에서 괜히 마음이 흐려졌다. 최선을 다해 아쉬워하고 반가워하며 축하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더 깊은 마음, 좀 더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타인의 삶과 나의 것을 비교하지 말자고 늘 읊조려왔건만.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산을 등반하는 것을 보면서 아, 벌써 저기까지 가서 좋겠다고 부러워하며 샘을 내다니. 심지어 그건 내 길도 아니었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산도 아니었건만. 스스로를 꾸짖었고 친구에게 속으로 사과했다.

 

솔직히 말해 잠정적 비혼주의자를 결심한 나에게 결혼이나 출산은 부러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찌됐던 그들이 사회적인 의미에서 주류에 합류한다는 것, 나와는 다른 삶을 영유하게 될테고 그 삶이 다수에게 인정받은, 설명이 필요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는 것, 그 태평함이 부러울 뿐이다. 아니, 요즈음엔 그보다도 더, 분기점을 지나고 일종의 이정표를 꽂는 것, 거칠게 표현하자면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가시적인 아이템을 획득하는 것이 부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대학, 취업, 결혼, 출산 등으로 삶이라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에 꽂을 수 있는 몇 개의 뚜렷한 깃발을 얻는 것. 자신이 성실하게, 나쁘지 않게, 혹은 평범하게 살아왔음에 안도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상징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이 상처 입었을 때 새삼 깨닫게 된다.

 

주말에는 가능한 한 나 자신을 위해 보낸다. 할 수 있는만큼 게으름을 보내고 주중에 못본 영화를 보고 아침 일찍부터 빨래를 해서 널고 방청소를 하고 침대 위에 뒹굴거리며 책을 읽는다. 마스다 미리의 단순한 펜선, 일견 가벼운 이야기 속에서 책장을 넘기다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가끔은 답변도 한다.

 

젊은 사람에게 ‘젊음’의 우월감을 안겨주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젊었을 때 그렇게 대해주면 기뻤으니까. 누군가 젊음을 부러워해주는 건 기쁘다.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그래서 사실은 특별히 부럽지도 않지만 젊은 사람에 대한 서비스. 나는, 젊은 나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좋다.

 

자신의 마음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 상담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옅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할 것이다. 계속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리고 계속 그렇게 해왔던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세상살이의 능숙함과 뻔뻔함을 때로는 분리시키고 가끔은 낡고 무거워진 질문을 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기도 한다. 아아, 어른이 되는 건 보기에 따라 더 강해지거나 때로는 더 무심해지는 일의 ‘결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때에 따라선 ‘그게 나쁜 걸까? 나는 지금 나쁜 행동을 하는건가?’ 라고 묻는 태도도 필요하다는 것을 마스다 미리는 주지시킨다.

 

맞아, 떨어진 물건을 줍는 것, 잘못 받은 거스름돈을 돌려주는 건 내 자신이 특별히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좋은 사람인 척 하고 싶지 않다. 좋은 사람이라는 오해도 받고 싶지 않다. 다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혹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노력마저 없애고 싶지 않거나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묻는 번거로울 만큼의 성실함을 잃지 않고 싶다.

 

이 책은 이렇게 끝난다. 다른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좋다. 일기도 계속 쓰지 못하고 복어도 먹지 못했지만 나라서 좋다. 나도 나쁘지 않다(문장을 잇기 위해 몇 개의 조사와 어미를 살짝 바꿨다). 몇 년 전 그 해의 마지막 날, 그런 일기를 썼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길 희망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계속해서 나겠지. 겨우 나이거나 고작 나이거나 가쁘게 나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꿈꾸지 않는 것, 그게 나라는 비관주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여전히 바보같은 선택을 반복하고 때로는 철없는 생각을 곱씹고 아직도 누군가의 행복을 온전히 빌어주기엔 스스로가 부족할 때가 가끔 있지만 마스다 미리의 만화 속 대사처럼 아마 그게 나란 사람일테지. 나이를 먹으면서 갖는 가장 큰, 버릴 수 없는 장점은 내 자신에 대해서 단 한 가지라도 더, 냉정하고 정확하게 알게 된다는 점인 것 같다.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사람은 많지만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단순하게 하는 사람은 몇 없다. 그러면서도 무례하거나 냉혹하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이지도 않다. 책을 덮으면서 좋은 친구,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느낌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그 드문 경우가 마스다 미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동지의식, 동료애, 어쩌면 그런 것들에 배가 부르다.

 

친구에게 다시 한 번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무 사심이나 불안감 없는 순도 백퍼센트의 진심이었다. 다만, 그 날은 아주 예쁜 옷과 귀걸이를 골라야겠다고, 드물게 높은 구두를 신어볼까 생각한다. 이렇게라도 나는 나도 아주 잘못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무의식중으로 겉으로나마 조금은 증명하고 싶어한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속물이다. 뭐,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 마스다 미리가 말했듯, 나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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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1 0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9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간의 딸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조지핀 테이 지음, 권도희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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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핀 테이의 대표작을 이제야 읽었다. 사실 이전에 시도한 적이 있으나 영국 왕조에 대한 지식 부족(튜더왕조부터는 한결 수월한데... 요크인지 랭커스터인지 빨간 장미, 하얀 장미 다 저리가... 영국왕조 따위 알게 뭐냐......)과 가계도를 읽는 게 상당히 헷갈려서 초반부에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한 번 포기한 책은 이상하게 끝을 못 낸다는 징크스 아닌 징크스를 벗어나고자 다시 시도한 이번엔 -놀랍게도- 무리없이 끝까지 잘 읽었다.

 

주인공 그랜트 경위는 현재 부상으로 입원 중이다. 무료해하는 그에게 친분이 있는 여배우 마르타가 찾아와 사진을 몇 장 건네주는데 그 중에서 한 남자의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 시작이다. 그랜트는 스스로가 나쁘지 않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형사의) 직업적인 것이든 타고난 것이든 범인犯人과 범인凡人을 구분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사진 속 남자는 그랜트가 들어온 이야기 속의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랜트는 주변인들에게 그가 어떤 사람처럼 보이냐 묻는다. 그랜트의 담당의사는 소아마비 환자로 보인다는 소견을 내놓았고 꼬마라는 간호사는 간이 좋지 않은 인상이라 했으며 수간호사는 그게 어떤 종류이든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 같다고 말했다. 자신의 부하직원 경사에게 만약 이 사람이 법정에 선다면 어느 쪽에 설 것 같냐고 묻자 그는 판사석이라 말한다. 사실 그랜트 역시 맨 처음엔 그를 악명 높은 검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진 속 남자는 조카들을 성에 가두고 죽였다고 알려진, 악독하고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는 리처드 3세였다.

 

거동이 불편한 그랜트에게 리처드 3세는 현재 가장 큰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모든 사람들이 리처드 3세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나 그 중 과연 몇이나 사실일까. 다소 터무니없는 소문은 누구에 의해 어떤 식으로 조명되었나. 그랜트의 주변인들은 그의 부탁대로 교과서, 가장 유명한 역사책, 리처드 3세의 어머니에 대한 소설 등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나마 있는 자료들은 한 인물에서 대해서 면밀히 파악하기엔 너무나 적고 좁은 정보였고 결정적으로 토마스 모어가 쓴 글을 읽으며 리처드 3세는 간과하고 있던 신빙성의 문제에 대해 직면한다. 리처드 3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토마스 모어는 고작 여섯 살이었다. 그가 죽은 해에도 겨우 8살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모어가 쓴 글은 어쩌면 당시에 떠도는 소문을 엮어놓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으며 보다 결정적으로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 시대, 그러니까 튜더 왕조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객관성을 기대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심지어 홀린셰드의 <연대기>도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모어의 글을 바탕으로 썼다면. 그렇다면 과연 리처드 3세라는 인물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란 어디에 있는가? 경찰로서 그랜트는 소문을 싫어했고 소문이 증거로 채택되는 상황을 제일 싫어했다. 그랜트는 화가 났다.

 

그런 그에게 이번에도 마르타가 해답을 주었다. 처음 리처드 3세의 사진을 건넸던 그녀는 이번에는 ‘진짜’ 사료를 찾기 위한 동조자 혹은 문자 그대로 발이 되어줄 사람을 찾았다. 브렌트 캐러딘. 브렌트는 자료를 찾고 그 자료를 토대로 그랜트와 브렌트는 의견을 나누어 리처드 3세에 대한 역사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내린 결론은....

 

 

라는 내용이다. 아주 독특하다. 500년이 넘은, 역사 속 실제 사건의 진실을 찾는 추리소설이라니. 그것도 (감히) 역사교과서와 토마스 모어에 대항하여. 게다가 그랜트는 내내 움직이지 못하니 말 그대로 ‘안락의자 탐정’에 딱 맞는 경우다. 왜 이제야 이 소설을 읽었을까 싶은 탄식과 이제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라는 안도를 느낄만큼 -앞부분만 잘 참으면, 계보에 질려 포기하지 않는다면- 아주 아주 재밌는 소설이다. 첫 느낌은 참신함과 도발적인 제안이었지만 읽는 내내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기록의 중요성이었다. 무려 500년 전 사건의 궤적을 더듬어 가려니 얼마나 어렵고 난감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생애의 파편과 편린을 천천히 주울 수 있다는 자체가, 기록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라는 기록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때론 폭력적인가를 상기한다. 승자의 입장에서 쓰는 게 역사라지만 한 인간을 평가하는 과정에 있어서 역사, 그것도 승자가 쓴 역사만을 읽는 건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역사가들 역시 사람이기에 각자의 주관과 호오를 개입할 수도 있으며 각자의 역사관과 당대의 시대상,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 혹은 변명을 대변하는 역할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이른바- '위인'이라 믿었던 사람의 추함과 악함에 안 후에 느끼는 충격. 좀 더 뒤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왜 그렇게 적혀있는지를 알고 느낀 배신감. 자잘한 일화들이 거짓이거나 과장, 미화일수 있으며 누군가의 행위에서 선악이 아닌 득실을 발견할 때의 씁쓸함. 그럼 감정들을 떠올리며 이 책이 지적하는 바에 수긍하게 된다.

 

하나 더. 리처드 3세가 어쩌면 형보다 더 좋은 왕이었다는, 좋은 군주일 수도 있었다는 어떤 근거나 자료들을 전해 들으며 과연 지도자에게 필수불가결의 덕목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적으로 훌륭하되 사적으로 배제되는 점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평가받아야 마땅할까. 이 질문에 관한 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은 공과 사의 분리겠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이며 합리적이진 않은 법이다. 게다가 사적인 부분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공적인 능력에도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이런 질문에는 명확히 답하기가 곤란하다.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고 하지만 글쎄, 진리는 누구의 품에도 있지 않는 듯 하다. 역사 속 인물 뿐 아니라 우리 주변만 둘러봐도. 누군가를 완벽히 이해한다거나 한 인간을 오롯이 파악할 수 있다는 기만을, 믿기가 어렵다. 그 때마다『리어왕』의 구절 - 1막 4장.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Who is it that can tell who I am? - 중얼거리는 것으로 씁쓸한, 신중한 중도를 택하게 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리처드 3세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더러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500년이 넘도록 오해받는 죽은 사람.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괴담에 등장하는 악당. 심지어 최근에 제대로 발굴되어 이장하기까지는 이름도 없는 땅에 묻혀 있었던 안타까운 왕. 실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토마스 모어는 물론 당대의 사람들, 그리고 저자와 우리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 리처드 3세는 어떤 사람인가? 정말 그는 자신의 두 조카를 죽였을까? 어쩌면 작가조차 흐리게 하는 답변은,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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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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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전작을 다 읽었다. 새 책이 나오길 기다렸고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읽었지만 누구에게도 추천하지 못했고 읽었다고 공개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가끔씩 혼자 하는 오만으로 ‘나만 알고 싶은’, ‘숨겨두고 싶은’ 작가라고 하기엔 이미 그녀가 꽤 유명한 것 같고(그래서 기쁘고 그만큼 괜히 서운도 하다) 누군가에게 소개해주기 어려운 소재인 것 같아서도 있지만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들키게 될까봐, 하는 생각이 컸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지러움과 끝난 후에 느꼈던 피로감 같은 것을 설명하게 되면, 왜 소설을 읽으면서 울렁울렁 어지러웠는지, 어떤 부분이 어떻게 나를 건드렸는지를 말하게 되면 그건 꼭... 나를 드러내는 일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일테면 그런 식이다.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이 했던 말처럼. 책값을 책정해서 내면 된다는 서점주인의 말에 “그러면 너무 내가 드러나잖아요.”라고 했던 혜원처럼. 그 순간의 난감함과 걱정처럼.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어째서 이렇게 절망적인지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겁, 이 났던 것 같다.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만은 합니다.

 

생각해보면 삶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보기에 불편한 것을 못 본 척 해온 것으로. 광화문 광장 앞을 지날 때, 나는 늘 우릿한 죄책감을 느꼈다. 세상에 너무 많은, 중요한 이슈가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해 내가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착하게 살아왔건만 왜 죄책감마저 내가 느껴야 하는 거냐는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던 것도 같고.

 

결국 그 고객님은 탈회를 끝내 못하고 전화 연결이 끊어진 것 같아요. 탕비실에서 호흡을 좀 진정하고 세수를 하는데 왠지 아이러니하더라고요. 악을 쓰고 옥을 하며 우리를 짓밟은 이들은 목적을 신속하게 달성했는데 정작 괜찮냐, 고 한마디라도 물어보고 돌아봐준 이는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분들을 더 잘 모시고 챙겨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인간인데 어째서 오랜 지배와 구속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어느새 나를 때리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반응하고 꼬리를 흔들거나 내리게 되었을까. 그러니 너희들은 더더욱 짐승 취급을 당해도 된다며 누군가들은 의기양양하게 돌을 던질텐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친구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한다. 나는 늘 죄송한 사람 밖에 없어. 그게 내 일이야. 생글생글 웃는 낯이 예쁜 친구는 여전히 웃음을 잘 짓지만 그건, 그냥 그녀가 자다가도 할 수 있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한 번씩 그녀는 만취한 상태로 전화를 건다. 울다가 웃고 그러다 조금 울먹이면서. 세상에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렇게 묻는다. 내 의견 따윈 섞이지 않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원하던 게 어떤 쪽인지 알 수 없어 나는 모호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또 어떤 새끼가 무슨 말을 지껄였어, 아냐, 그런 말은 그냥 하는 말이야, 네가 어디가 어때서, 어디서 술 마시고 있어, 집에는 들어갈 수 있겠어, 내년에 빚이 좀 줄면 확 때려치고 여행이라도 가, 우리 다음 달에 가까운 데라도 놀러갈까. 어떤 때는 그 중에 한 가지 혹은 몇 가지 때로는 모든 말이 나오거나 가끔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끔은 나도 다른 곳에 가 똑같이 하고 싶어진다고, 그 쪽 사람들이 뭘 꺼려하는지는 손바닥 보듯 훤하니 난 누구보다 체계적으로 진상을 떨 수 있다고 흐흐,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그녀에게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않는, 카페에서도 식당에서도 택시를 탈 때도 항상 예의가 바른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왜 세상엔 이렇게 못된 사람이 많을까. 착하다는 말이 바보같다는 말처럼 사용되는 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멍청하게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

    

당신은 들리지 않아요? 아니면 들리지 않는 척할 뿐입니까?

 

몇 가지, 입버릇처럼 잠꼬대처럼 흘러나오는 말이 있다. “이 불확실하고 폭력적이며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 여러 형태의 죽음이 넘쳐나고 있으므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에서 한 말을 떠올리면, 다만 나는 지금 내가 여기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그가 아는 것과 믿으려 했던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그 의미는 비록 다르지만 고칠 수 없기에 견뎌야 하는 삶을 단어를 애니 프루의 단편속에서 발췌했다. “부끄럼많은 생애를 살았습니다.”라며 새삼스럽게 중얼거리지 않으며 대신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해 돈이 없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던 것 같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말을 상기한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온다는 최승자 시인의 뜨거운 절망을 되뇌인다.  

 

나만 잘 되길 바란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잘 되길 조금은 바랐다. 남들이 잘 안 되길 기대한 적도 맹세코 없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 앞에서 그게 내가 아님을 안도하는 이기심을 느끼긴 했다. 보다 나은 환경을 가진듯한 사람에게도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주 조금 위안이 됐다며, 그것마저 나쁜 것일까.

 

지역과 이름을 모두 익명으로 처리하고 이 일의 개요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을 때 네티즌의 반응이 한결같았다는 점은, 아주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나 사람들 인식이 실로 이 정도 수준인가 싶어 당혹스러웠다. 그 글은 나중에 삭제했지만 캡처본을 갖고 있으니 증명할 수 있는데, 내가 글 속에서 그녀를 문제 삼는 태도는 가능한 한 자중하고 그저 ‘이웃 아이를 돕기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를 요지로 하여 아이 가진 엄마들의 관심과 응원을 촉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에도, 스크롤이 조금만 길어지면 앞뒤 잘라먹고 훑어 먹기 일쑤인 자잘한 오독에다 얼굴 모르는 상대를 향한 흥미 본위의 악의가 중첩되어서는, 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고 치면 그 중 여든 개가 나더러 오지랖을 넘어선 편집증이 의심되니 정신과에 가보라는 내용이었고, 열 개는 바카라 전략이나 노예 두 명 상시 대기 운운하는 스팸 광고였으며, 당신의 의도만큼은 존중한다는 중도 입장에 하나 마나 한 소리나 나머지 열 개였다, 그러니까 80명의 얼굴 모르는 이들은 지금 당신들이 내게 보이는 것과 거의 같은 반응을 나타냈다. 당신 자식이 피해를 본 것도 아니고 모른 척 지나가면 될 일을 애써 파고드는 저의는 무엇인가, 누군가를 위한다는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가...... 같은 것들 말이다. 내 아이가 다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이런 사람들이 길러내는 아이가, 훗날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아이로 자라난다는 걸 그들은, 당신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콧망울을 괜히 잡아쥐며 눈을 끔뻑거렸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 청승 좀 그만 떨라는 말, 너만 사는게 힘든 줄 아냐며 나는 더 죽겠다며 내뱉는 말, 네 일도 아닌데 현실로 돌아오라는 말, 말, 말, 말. 그게 도끼인지 칼인지 아니면 청산가리인지도 모르고 내뿜는 말들. 그런 말들이 떠도는 공간을 말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늘, ...늘 돌아섰다.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살면 안되는 거 아닐까요? 속으로 웅얼거리며.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너무 튀고 싶지 않다는 근거로,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하는 비겁합으로, 누군가 나설 거라는 조악한 변명으로. 돌아설 때마다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나은게 뭐지, 죄책감을 느끼고 안 느끼고의 차이일 뿐 아닌가 스스로를 비웃었다. 키티 제노비스가 죽어갈 때, 나는 창문을 열고 소리 치거나 망설임없이 수화기를 들어 신고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했겠지, 어쩌면 그냥 가벼운 싸움일지도 몰라, 저 사람이 나중에 나를 해코지 하면 어쩌지, 하는 것을 생각지 않고. 내가 그것을 ‘해내야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불편함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기어코 모른 척 했던 비겁함과 비열함에 대한 수치와 절망에 대한 해부. 나는 단지 좀 더 잘 살려고 했을 뿐인데, 할 수 있는만큼은 열심히 살아왔는데, 세상이 나를 거부하는건지 내가 세상을 거부하는건지 아님 원래 삶이란 세상과의 반목으로 살아가는건지, 한낮의 땡볕 속을 걷는듯한 아찔함. 비겁한 날들에 대한 구질구질한 변명과 그 변명이 가려주지 못하는 민낯의 수치. 저 사면초가의 상황을, 저렇게 온몸이 벌개질 정도의 수치를 느낄만한 상황과, 저렇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함의 시절에 대한 이해. 그러니까, 내가 이 모든 거지같은 상황을 ‘공감하거나’ 혹은 ‘이해할 것 같은’ 서글픔. 삶의 밑바닥을 더듬거려본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조. 그 모든 것이 조금씩 조금씩 나란 사람을, 나의 역사를, 감추려 했던 마음 속 깊은 초조와 푸른 절망을 누군가에게 까발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제목마저 따가운,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보통 이 같은 상황에서라면 방사능과 부식성 물질에 대한 시민들의 두려움에 공감하고 정부의 명령을 받은 군경이 출동하여 겉으론 멀쩡해보이나 어떤 종류의 희귀 질환자 내지는 돌연변이가 되었을지 알 수 없는 피난민들의 진입을 막았을 테고, 실제로 3년 전에 그들이 했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른 것이, G는 국가의 중심이었고 G가 곧 국가였으며 국가가 G였다. 정부에서는 G시민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돌볼 필요가 있었고 G에서 일차로 피신한 정부 조직과 주요 인사들은 그들을 지지해줄 기반이 필요했다. 어느 한쪽이 녹아 없어져야만 한다면 그건 O의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아는,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사건 중 무엇을 대입해도 성립이 가능한 문장들 앞에 서서 아아, 이건 나만의 일이 아니었구나 새삼 깨닫는다. 혼자만의 일도 아니고 개인적인 무언가도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벽을 타고 오르는 하이였고 남을 돕는 일을 하면서도 동정심이 많다는 이유로 순진하다고 혹은 답답하다는 소리를 듣는 양선이며 빼꼼 무언가가 내다보는 듯한 틈새로 기어코 발을 들여놓는 미온이며 제도권 안에서 얌전하게 살아가던 니은이자 길을 잃은 택시 속 여자일지도 모른다. 내가 모든 그녀들이었고 동시에 그녀들이 나의 친구이자 누이이자 선배이며 어쩌면 어머니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렇다고 하여 갑작스레 없던 용기가 샘처럼 솟거나 어설픈 희망을 가지진 않는다.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절망한다. 다만 연약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작은 연민을 횃대 삼아 어둠의 터널을 더듬더듬 짚어갈 뿐이다. 터널을 걸어가며 작게 속삭인다. 그것이 부디 우리 모두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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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9-0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어제 읽었는데, 댓글이 조금 늦네요. 저는 작가가 이런 소설들을 써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의 불행이 전시되는 사회, 때로는 그것은 쾌감이 되거나 유희가 되거나, 그보다 나쁘지는 않아도 안도가 되기도 합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 그 타인의 불행을 보고 있는 제가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만드는 그런 소설을 써줘서 고맙다는 거 말입니다. 단지 안도에 그친다고 해도 그 안도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걸까..소설이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이유로 타인의 불행과 재난을 보는 것일까.

저는 양선의 이야기와 그 마지막 소설 카드사 상담원의 이야기가 가장 좋았어요.

Shining 2015-09-03 14:54   좋아요 0 | URL
저도 카드사 상담원 이야기 좋았구요, 그 외 중에선 이창이 기억에 남네요.

몇 번 애정을 표현한 적 있지만 저는 꽤 잘 맞는 작가같아요. 뭐랄까, 저를 스쳐가거나 살짝 할퀴고 간 흔적들을 남이 써놓은 걸 보는 느낌이에요. 정서랄까 사고의 편린이랄까 아무튼 꼭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라 무척 흔들리게 되고 그래서 반가우면서도 왠지 무섭기도 해요. 그래서 아마 누군가에게 당당하게 좋아하는 작가라고 밝히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본문에 썼다시피 나를 드러내는 일이 될까봐 괜히 머쓱해지거든요.

말씀하신 것과는 조금 다른 말이지만, 저는 이게 과연 타인의 일인가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지금 내가 혹은 또 다른 내가 겪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이창동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그녀가 겪는 고통은 분명 일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 그 정도의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간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라는 뉘앙스요. 미묘하게 다르지만 저는 꼭 제 고통처럼 느껴져서 이 불행과 재난이 헐떡거리게 아프더라구요. 어쩌면 바로 그게 우리가 타인의 불행을 바라보는 까닭이자 타인의 것에서 안도와 공포를 느끼게 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어요.

2015-09-05 16: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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