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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없는 완전한 삶
엘런 L. 워커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1. 치과에 정기검진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사랑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의사는 내게 다짜고짜 "결혼하셨어요?"라고 묻기에 "아뇨."라고 답했다. 그 다음엔 "하실거죠?" 묻는데 치아와 결혼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해 멀뚱히 있자 "지금은 괜찮지만 출산을 앞두거나 수술을 하게 될 경우..."라고 하신다.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말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혹시 임신을 염두에 있다거나 출산을 예정하는 경우" 라고 말했다면 같은 말이라도 기분이 달랐을 것 같다. 결혼 적령기 안에 들어간 여자. 미혼. 사회의 통념상 '당연하다'는 가정을 하는 것까진 예민하게 굴지 않으려해도, 거기서 제가 비혼주의자라서요,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지만. 이건 좀 좋은 화법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그 사랑니는 한 해가 지난 지금도 멀쩡히 잘 쓰고 있다. 결혼과 출산을 앞두지 않아서 말이다.
1-2. 이 책을 읽다가 그 날 치과의사가 한 질문이 떠올랐다. 아주 가끔 억울한 기분이 든다. 기혼인 사람, 결혼을 예정하거나 계획이 있는 사람, 자녀를 갖거나 낳은 사람에겐 "근데 결혼은 왜 하셨어요?"라거나 "어쩜 애기를 다 낳았어요?"라고 묻지 않는데. 반대의 경우엔 "왜 결혼을 안 하려구요?" 라던가 "아이를 낳아서 키워봐야..."하는 말을 아무런 자각 없이 하는 무배려와 이기적인 면모를 보이곤 하는지. 만약 전자인 질문을 해버리면... 말을 말자.
2. 한 친구는 지난 달에 아이를 낳았다. 최근 통화에서 친구는 아이가 벌써 고개를 돌리려고 한다거나 아빠를 닮은 것 같다거나 신랑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낸다. 그녀 인생의 엄청난 변화가 생겼으니 당연한 대화라고 생각해 그저 응응,그랬구나, 하며 말을 맞췄으나 전화를 끊은 후 문득 "근데 넌 어떻게 지내?"라는 식의 질문을 한 번도 듣지 못했음을 깨닫자 왠지 입이 썼다. 이해한다. 부럽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그냥, 그저 이젠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친구는 결혼을 할 때 잃는게 아니라 아이를 낳을 때 잃게 되더라는 또 다른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3. A는 내게 어쩌면 너는 -비혼이나 아이를 낳지 않는 문제를 결심한 사람들에 대한 적지 않은 편견과 다르게- 책임감이 없는게 아니라 반대로 책임감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남들도 다 사는데, 애 키우는게 별거야, 그렇게 힘들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떻게 해내겠어, 난 좋은 사람이고 남편도 그러니까, 라는 불성실한 확신으로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거라고. 하긴, 엄마도 내게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하신다. 너보다 한참 부족한 사람들도 다 해내는 걸 왜 못할거라고 생각하냐고.
3-1. 못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거라 이야기해봐도 엄마는 -그저 딸을 배려해 말을 안 하는 것도 같다- 여전히 일말의 의구심과 측은함을 조금씩 안고 계신다. 그래서 요새 가끔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형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언니는 결혼을 했고 형부는 처가 식구들과 가깝고 제법 잘 지낸다. 아이도 둘 있다. 남동생도 아마 결혼을 할 테니까. 나쁜 의도라는건 알지만 어쨌건 부모님에게 나 말고도 손주와 사위와 며느리라는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를 만들 자식이 있다는 건 아주 가끔 다행이다(물론 이건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아주 이기적인 태도다).
4. 이 모든 이야기가 이 책 안에 있다. 저자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확고한 결심을 했지만 그 결심이 흔들리고 다시 잡히는 과정에서 혼란과 우울감을 느꼈다. 그 후 자식이 없는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책이 너무 적고 정보가 얕다는 생각에 자기 자신과 주변을 시작으로 해 사례를 모으고 책을 썼다. 저자가 말하는 아이가 없는 삶childfree에는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아이를 원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던 이들도 있으며 처음부터 자신의 주장을 확립한 사람들도 있다. 그 경우의 수를 분류하고 아이가 없는 삶이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그들은 육아 대신 무엇에 초점을 맞추며, 왜 현재의 삶을 살게 되었고, 사회는 그들에게 어떤 편견을 갖고 있고 그 편견은 또 옳거나 그른지에 대해 썼다.
4-1.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하기 위해>파트에선 동의할만한 고민의 흔적이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사회적, 유전적으로 희미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시점이 되면, 그 점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사회와 주변이 압박하는 이상화된 가정과 육아에 대한 환상에 대한 토로. 특히 부모가 된다는 점을 지나치게 환상적이고 이타적인 행위로 받아들이고 성숙한 사회구성원이 되는 자격처럼 권장하는 탓에 아이를 낳지 않으면 자신이 대단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거나, 성장하긴 커녕 퇴화하거나, 진정한 어른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스트레스에 대해서 동의한다.
4-2. 그리고 <아이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 <아이 없는 사람들이 마주해야 할 문제>파트는 앞으로 고민해볼만한 것들, 살면서 접할만한 고민에 대해 쓰여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좋은 파트너를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사회의 비주류로 살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이가 없기에 받는 차별이나 아이가 없기에 냉혹하고 무정한 사람이라는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부당함, 혼자가 된 미래에 대한 불안 등등. 예컨대 이런 부분들에 공감이 갔다.
우리 사회에서는 세 가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녀를 가질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자녀 없이 사는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일부 부모들은 자녀를 낳은 일을 후회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중략) 제퍼스는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부모 노릇을 즐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어떤 사회에서는 아픈 반려동물을 돌보기 위해 휴가를 내도 정상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비롯해 가족 중심의 대다수 공동체에서는 비웃음을 살 뿐이다. 최근에 아이가 없는 없는 내담자 하나가 전화를 걸어와 아픈 고양이를 돌봐줘야 한다면서 상담 약속을 취소한 일이 있었다. 나 역시 반려견을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라,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약속을 취소할 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비서들 중 아이 엄마인 사람이 어이없다는듯 말했다. “세상에, 고양이가 아파서 약속을 취소하겠다니, 이게 말이 되나요?”
다른 사람을 보살피길 좋아하고 여성스럽다는 것이 자녀를 가진 사람만의 특성일 수는 없다. 내가 인터뷰한 여성들 중 대다수가 자신을 친구들과 가족을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이런 자질을 가졌다 해서 꼭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싶어하진 않는다. 여성들을 아이와 관련짓는 것은 사회적 기대의 한 예라고 봐야 한다.
린다는 이제 엄마가 되었고 관심의 초점이 ‘자신의 목표’에서 ‘무엇이 아기에게 최선인가’로 옮겨갔다. 그것이 건강하고 정상적일뿐더러 린다와 린다의 아들에게 필요한 변화임을 알면서도, 나는 기운이 쭉 빠졌다.
5.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가 원했던 부분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나는 조카들과 아주 가까운 사람-일반적인 이모의 의미보다 훨씬- 이 되어있었다. 작은 조카는 엄마보다 내게 안기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의 생체 시계는 아이의 아빠보다 내가 더 정확히 안다. 큰 아이는 엄마랑 아빠가 놀아주는 것보다 나랑 노는게 더 재밌다고 몰래 귀엣말을 한다. 나 역시 내 어디에 이런 말랑한 마음이, 이런 애틋한 마음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를 애정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 때마다, 아이에 가까운 삶을 사는만큼 나에겐 육아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확인한다. 내가 얼마나 나쁜 부모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아이를 위해 배려하고 때로는 희생도 해야 할 삶을 선택하기엔 내가 얼마만큼 이기적인 사람이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나와 같은 사람을 엄마로 둔 아이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 내가 엄마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런 각오나 기대나 다짐이 내 안에 있는지 물어볼 때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것을 느낀다. 이 책에서도 나왔듯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부모 노릇을 즐기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식이다.
5-1. 게다가 아이들이 워낙 가까이 있고 육아를 함께 나누느라 아이가 없는 삶에 대해서도 본의 아니게 체험해보기도 한다. 비용과 시간, 노력과 여가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경제적인 기회비용을 생각해보게 되고 아이가 있음으로 인해 변할 수 밖에 없는 삶의 형태와 그들을 선택하지 않음으로 내가 갖게 될 장점과 단점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조카는 자식과 다르지"라던가 "조카가 아무리 가깝고 예뻐봐야 자식만큼" 또는 "자식 낳으면 또 다르다."는 조언을 가장한 참견은 그만 받고 싶다. "안 낳아봐서 그래."까진 그렇다치지만 "출산도 육아도 안 해본 사람이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거둬주길 바라고 있다.
6. 사례 위주로 진행되는 책이기에 깊은 통찰력 같은 건 없다. 글이 하나로 모이기보단 약간 어수선한 느낌을 주는데다 대부분이 여자의 관점이라는 것도 약간은 아쉽다. 아마 저자가 여자고 그가 주로 접하는 주변인이나 내담자, 무엇보다 출산의 직접적인 주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렇다면 남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나 고민을 갖고있는지 알 수 없는 건 역시 아쉬운 문제고 꼬아 생각하자면'아이없는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주로 여자에게 쏠려있다는 것도 씁쓸한 일이다.
6-1.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여러 사람의 삶과 그들의 역사와 가치관에 대해 듣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 저자가 머리말에 썼듯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출판되는 현실에서 아이없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 책의 의미인 것 같다.
6-2. 결혼을 하고 아이에 대한 계획이 있는 사람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들은 다른 책들을 읽느라 바빠 굳이 아이 없는 삶에 대해서까지 읽어볼 차례가 오지 않을 것 같다(비꼬는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이미 고민을 하고 선택을 했을테니까. 만약 나였어도 그럴 것 같고). 선택하는 사람들은 망설임이나 경우의 수를 상대적으로 적게 가정한다는데 비해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불안해하며 망설이고 가정해본다. 대개의 모든 일이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덧) 인구증가의 면이나 환경오염의 문제 등에서 아이 있는 삶이 사회를 더 위태하게 나쁘게 만드는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놀라웠다. 여태껏 이런 관점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소비나 생산의 구조에서 봤을 땐 오히려 다자녀가정에 혜택을 주는게 합리적이지 않나 -정작 나 자신은 비혼을 지지하면서도- 생각해왔던 터라 내 자신이 사회에 세뇌가 된 건지, 미국과 한국은 인구에 대한 태도가 다른가(한국은 출산률 저하로 국내 인구 감소와 노령화를 걱정하는 터라), 아니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당혹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