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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구병모 작가의 전작을 다 읽었다. 새 책이 나오길 기다렸고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읽었지만 누구에게도 추천하지 못했고 읽었다고 공개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가끔씩 혼자 하는 오만으로 ‘나만 알고 싶은’, ‘숨겨두고 싶은’ 작가라고 하기엔 이미 그녀가 꽤 유명한 것 같고(그래서 기쁘고 그만큼 괜히 서운도 하다) 누군가에게 소개해주기 어려운 소재인 것 같아서도 있지만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들키게 될까봐, 하는 생각이 컸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지러움과 끝난 후에 느꼈던 피로감 같은 것을 설명하게 되면, 왜 소설을 읽으면서 울렁울렁 어지러웠는지, 어떤 부분이 어떻게 나를 건드렸는지를 말하게 되면 그건 꼭... 나를 드러내는 일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일테면 그런 식이다.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이 했던 말처럼. 책값을 책정해서 내면 된다는 서점주인의 말에 “그러면 너무 내가 드러나잖아요.”라고 했던 혜원처럼. 그 순간의 난감함과 걱정처럼.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어째서 이렇게 절망적인지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겁, 이 났던 것 같다.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만은 합니다.
생각해보면 삶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보기에 불편한 것을 못 본 척 해온 것으로. 광화문 광장 앞을 지날 때, 나는 늘 우릿한 죄책감을 느꼈다. 세상에 너무 많은, 중요한 이슈가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해 내가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착하게 살아왔건만 왜 죄책감마저 내가 느껴야 하는 거냐는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던 것도 같고.
결국 그 고객님은 탈회를 끝내 못하고 전화 연결이 끊어진 것 같아요. 탕비실에서 호흡을 좀 진정하고 세수를 하는데 왠지 아이러니하더라고요. 악을 쓰고 옥을 하며 우리를 짓밟은 이들은 목적을 신속하게 달성했는데 정작 괜찮냐, 고 한마디라도 물어보고 돌아봐준 이는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분들을 더 잘 모시고 챙겨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인간인데 어째서 오랜 지배와 구속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어느새 나를 때리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반응하고 꼬리를 흔들거나 내리게 되었을까. 그러니 너희들은 더더욱 짐승 취급을 당해도 된다며 누군가들은 의기양양하게 돌을 던질텐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친구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한다. 나는 늘 죄송한 사람 밖에 없어. 그게 내 일이야. 생글생글 웃는 낯이 예쁜 친구는 여전히 웃음을 잘 짓지만 그건, 그냥 그녀가 자다가도 할 수 있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한 번씩 그녀는 만취한 상태로 전화를 건다. 울다가 웃고 그러다 조금 울먹이면서. 세상에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렇게 묻는다. 내 의견 따윈 섞이지 않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원하던 게 어떤 쪽인지 알 수 없어 나는 모호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또 어떤 새끼가 무슨 말을 지껄였어, 아냐, 그런 말은 그냥 하는 말이야, 네가 어디가 어때서, 어디서 술 마시고 있어, 집에는 들어갈 수 있겠어, 내년에 빚이 좀 줄면 확 때려치고 여행이라도 가, 우리 다음 달에 가까운 데라도 놀러갈까. 어떤 때는 그 중에 한 가지 혹은 몇 가지 때로는 모든 말이 나오거나 가끔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끔은 나도 다른 곳에 가 똑같이 하고 싶어진다고, 그 쪽 사람들이 뭘 꺼려하는지는 손바닥 보듯 훤하니 난 누구보다 체계적으로 진상을 떨 수 있다고 흐흐,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그녀에게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않는, 카페에서도 식당에서도 택시를 탈 때도 항상 예의가 바른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왜 세상엔 이렇게 못된 사람이 많을까. 착하다는 말이 바보같다는 말처럼 사용되는 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멍청하게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
당신은 들리지 않아요? 아니면 들리지 않는 척할 뿐입니까?
몇 가지, 입버릇처럼 잠꼬대처럼 흘러나오는 말이 있다. “이 불확실하고 폭력적이며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 여러 형태의 죽음이 넘쳐나고 있으므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에서 한 말을 떠올리면, 다만 나는 지금 내가 여기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그가 아는 것과 믿으려 했던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그 의미는 비록 다르지만 고칠 수 없기에 견뎌야 하는 삶을 단어를 애니 프루의 단편속에서 발췌했다. “부끄럼많은 생애를 살았습니다.”라며 새삼스럽게 중얼거리지 않으며 대신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해 돈이 없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던 것 같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말을 상기한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온다는 최승자 시인의 뜨거운 절망을 되뇌인다.
나만 잘 되길 바란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잘 되길 조금은 바랐다. 남들이 잘 안 되길 기대한 적도 맹세코 없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 앞에서 그게 내가 아님을 안도하는 이기심을 느끼긴 했다. 보다 나은 환경을 가진듯한 사람에게도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주 조금 위안이 됐다며, 그것마저 나쁜 것일까.
지역과 이름을 모두 익명으로 처리하고 이 일의 개요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을 때 네티즌의 반응이 한결같았다는 점은, 아주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나 사람들 인식이 실로 이 정도 수준인가 싶어 당혹스러웠다. 그 글은 나중에 삭제했지만 캡처본을 갖고 있으니 증명할 수 있는데, 내가 글 속에서 그녀를 문제 삼는 태도는 가능한 한 자중하고 그저 ‘이웃 아이를 돕기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를 요지로 하여 아이 가진 엄마들의 관심과 응원을 촉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에도, 스크롤이 조금만 길어지면 앞뒤 잘라먹고 훑어 먹기 일쑤인 자잘한 오독에다 얼굴 모르는 상대를 향한 흥미 본위의 악의가 중첩되어서는, 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고 치면 그 중 여든 개가 나더러 오지랖을 넘어선 편집증이 의심되니 정신과에 가보라는 내용이었고, 열 개는 바카라 전략이나 노예 두 명 상시 대기 운운하는 스팸 광고였으며, 당신의 의도만큼은 존중한다는 중도 입장에 하나 마나 한 소리나 나머지 열 개였다, 그러니까 80명의 얼굴 모르는 이들은 지금 당신들이 내게 보이는 것과 거의 같은 반응을 나타냈다. 당신 자식이 피해를 본 것도 아니고 모른 척 지나가면 될 일을 애써 파고드는 저의는 무엇인가, 누군가를 위한다는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가...... 같은 것들 말이다. 내 아이가 다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이런 사람들이 길러내는 아이가, 훗날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아이로 자라난다는 걸 그들은, 당신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콧망울을 괜히 잡아쥐며 눈을 끔뻑거렸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 청승 좀 그만 떨라는 말, 너만 사는게 힘든 줄 아냐며 나는 더 죽겠다며 내뱉는 말, 네 일도 아닌데 현실로 돌아오라는 말, 말, 말, 말. 그게 도끼인지 칼인지 아니면 청산가리인지도 모르고 내뿜는 말들. 그런 말들이 떠도는 공간을 말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늘, ...늘 돌아섰다.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살면 안되는 거 아닐까요? 속으로 웅얼거리며.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너무 튀고 싶지 않다는 근거로,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하는 비겁합으로, 누군가 나설 거라는 조악한 변명으로. 돌아설 때마다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나은게 뭐지, 죄책감을 느끼고 안 느끼고의 차이일 뿐 아닌가 스스로를 비웃었다. 키티 제노비스가 죽어갈 때, 나는 창문을 열고 소리 치거나 망설임없이 수화기를 들어 신고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했겠지, 어쩌면 그냥 가벼운 싸움일지도 몰라, 저 사람이 나중에 나를 해코지 하면 어쩌지, 하는 것을 생각지 않고. 내가 그것을 ‘해내야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불편함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기어코 모른 척 했던 비겁함과 비열함에 대한 수치와 절망에 대한 해부. 나는 단지 좀 더 잘 살려고 했을 뿐인데, 할 수 있는만큼은 열심히 살아왔는데, 세상이 나를 거부하는건지 내가 세상을 거부하는건지 아님 원래 삶이란 세상과의 반목으로 살아가는건지, 한낮의 땡볕 속을 걷는듯한 아찔함. 비겁한 날들에 대한 구질구질한 변명과 그 변명이 가려주지 못하는 민낯의 수치. 저 사면초가의 상황을, 저렇게 온몸이 벌개질 정도의 수치를 느낄만한 상황과, 저렇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함의 시절에 대한 이해. 그러니까, 내가 이 모든 거지같은 상황을 ‘공감하거나’ 혹은 ‘이해할 것 같은’ 서글픔. 삶의 밑바닥을 더듬거려본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조. 그 모든 것이 조금씩 조금씩 나란 사람을, 나의 역사를, 감추려 했던 마음 속 깊은 초조와 푸른 절망을 누군가에게 까발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제목마저 따가운,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보통 이 같은 상황에서라면 방사능과 부식성 물질에 대한 시민들의 두려움에 공감하고 정부의 명령을 받은 군경이 출동하여 겉으론 멀쩡해보이나 어떤 종류의 희귀 질환자 내지는 돌연변이가 되었을지 알 수 없는 피난민들의 진입을 막았을 테고, 실제로 3년 전에 그들이 했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른 것이, G는 국가의 중심이었고 G가 곧 국가였으며 국가가 G였다. 정부에서는 G시민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돌볼 필요가 있었고 G에서 일차로 피신한 정부 조직과 주요 인사들은 그들을 지지해줄 기반이 필요했다. 어느 한쪽이 녹아 없어져야만 한다면 그건 O의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아는,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사건 중 무엇을 대입해도 성립이 가능한 문장들 앞에 서서 아아, 이건 나만의 일이 아니었구나 새삼 깨닫는다. 혼자만의 일도 아니고 개인적인 무언가도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벽을 타고 오르는 하이였고 남을 돕는 일을 하면서도 동정심이 많다는 이유로 순진하다고 혹은 답답하다는 소리를 듣는 양선이며 빼꼼 무언가가 내다보는 듯한 틈새로 기어코 발을 들여놓는 미온이며 제도권 안에서 얌전하게 살아가던 니은이자 길을 잃은 택시 속 여자일지도 모른다. 내가 모든 그녀들이었고 동시에 그녀들이 나의 친구이자 누이이자 선배이며 어쩌면 어머니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렇다고 하여 갑작스레 없던 용기가 샘처럼 솟거나 어설픈 희망을 가지진 않는다.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절망한다. 다만 연약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작은 연민을 횃대 삼아 어둠의 터널을 더듬더듬 짚어갈 뿐이다. 터널을 걸어가며 작게 속삭인다. 그것이 부디 우리 모두가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