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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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발표회나 경연대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눅이 들어서 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물러난 경험을 한두번씩은 보통 가지고 있다.
본디 자신의 실력이 상당함에도 왠지 주위 사람들이 더 대단해 보이고 자신은 너무나도 초라해 보여서 강한 열등감에 휩쌓이고 움추려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을 보여주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연약하고 흔들리는 자신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때 주위 사람들의 기대란 결국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열등감에서 나오는 환상에 불과하다. '저기 저 대단한 사람들을 봐.  저 사람들에 비하면 당신은 너무 초라해서 우리가 기대할 것이 없어.'


상당히 오래 전에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다른 사람들의 지나가는 이야기에 흔들리게 하지 말라"라는 주제의 책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사람들간에 무심코 던지 한마디에 흔들리거나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는 이야기다.


저자는 타인의 과제와 자신의 과제의 분리하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눈치를 보면서 내 인생을 흘려보낼수는 없는 것이다.
나 자신만큼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한 사람은 없다.
아무리 부모라고 할지라도 내 자신의 인생에 나보다 더 진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직장에서 만나는 혹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이야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당당해질 권리가 있고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현재를 당당하게 살기 위한 '용기'다.


과거와의 단절을 통한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과거와의 단절은 과거를 없는 듯 잊어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실패로 인한 주눅든 감정의 흐름을 끊으라는 것이다.
과거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의 감정이 현재의 또다른 실패의 연결고리가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있다.
노아가 살던 세상은 죄악으로 완전히 물든다. 하나님은 이 죄악된 세상을 새롭게 시작할 계획을 하시며 노아를 통해 방주를 준비하신다.
대홍수 이후 세상의 물든 죄악은 사라지고 노아와 방주의 동물들이 새롭게 세상을 다시 시작한다.


우리는 가끔 작은 프로젝트의 실패나 시험에 떨어져 낙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주저앉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나 다시 지금 이 시점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실패는 단지 새로운 출발점일 뿐이다. 그 자리에 낙심하고 주저앉아 멈출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지금이 최악의 순간이라면 앞으로는 더 좋아질 테니까.


아무리 내 삶이 실패로 이루어진 종합세트라 하더라도 항상 노아의 방주처럼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고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가 주저앉아 있을 것인가의 결정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먼저 고민하고 지나갈 것이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명확한 자신의 인생관이 정립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의 과제에 부모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어린아이는 자신의 인생관이 정립될 때까지 과제수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인생관 정립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물론 부모의 인생관을 자녀에게 심어서는 안되겠지만 자녀가 스스로 인생관을 잘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부모의 과제이다.
어렵게 가진 미움받을 용기로 무책임한 방임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기독교 교리 중 '회개'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삶을 살다가 다시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뚜렷한 인생관이 있다면 그리고 목표가 있다면 비록 실패한 삶이라 할지라도 다시 성공적인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뿔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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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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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는 극도의 통제사회다.
비록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모두는 감시자이고 더불어 감시대상이다.


같은 팀 직원이 얼마전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자유여행을 한 것이었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고 한다.
'구글'의 힘을 빌린 것이다. 구글서비스는 여행지 선택과 투어코스, 그리고 비행기시간을 고려한 출발시간까지 완벽한 가이드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개인정보가 완전히 노출되고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고 한다.


'결정장애',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신장애다. 결정을 위해서는 제반상황들의 고려와 그에 따른 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책임이 함께 동반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은 사유하고 반성하고 개선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이제 사회전반적으로 '결정'을 해야 할 일들이 없어지고 있다.
사회는 시스템화되어지고 우리는 시스템 속에서 이미 결정되어진 일에 충실하면 된다. 더이상 생각할 필요도 결정할 필요도 없다. 내가 할 일과 나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투명성은 모든 것을 공개한다. 더 이상 비밀은 없다. 이것이 신뢰성을 강화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투명사회에서는 더이상 신뢰가 필요없다. 신뢰는 상대방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신뢰하고 함께 하는 것이다. 하지만 투명성은 상대방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됨으로써 더이상 신뢰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개인적인 영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고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이 공간은 쉼과 재충전의 공간이다. 하지만 투명사회에서는 더이상 이런 공간은 없다.


만약 24시간 대중에게 공개된 투명유리 속에서 생활한다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극도로 피로하게 될 것이다.
투명유리 속의 우리는 보여지는 부분으로 대중과 관계해야 하고 이 보여지는 부분은 우리에게 지속적인 쉼없는 관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투명사회에서는 더이상 내면적인 요소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보이는 부분이 중요하다.
헬스장, 다이어트, 그리고 성형수술 등 우리는 외적인 부분을 가꾸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외적인 관리는 곧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고 이를 통해 세상과 분리된 자신만의 사유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이 미지의 세계는 평생 탐험할지라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와도 같다.
내가 책을 읽은 이유는 사유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이다.
가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읽은 책의 수를 하나 더 체크하기 위해 강박관념에 휩쌓이기도 한다.


책들은 그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고 시대의 방향에 맞는 사유의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도 한다.
모두가 지나간 길을 간다는 것은 편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안내도 역시 '구글서비스'와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문화의 틀에 갇혀야만 하고 일탈은 불가능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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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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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조니 뎁 주연의 영화 '트랜센던스'가 개봉하였다.
크게 흥행한 영화는 아니라 모바일에서 구입해서 봤다. 역시 흥행이 안된 만큼 큰 재미는 없었다.
대중적인 재미를 주지는 못해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영화들이 많이 있다.
이 영화도 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트랜센던스는 '슈퍼 컴'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슈퍼 컴이 아니라 사망한 천재과학자(조니 뎁)의 뇌의 모든 기억을 컴퓨터에 업로드해서 만들어진 지능을 가진 컴퓨터였다.
영화는 과연 트랜센던스가 인간인지, 컴퓨터인지 계속 우리에게 질문한다.
영화의 말미에 트랜센던스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통해 스스로를 죽임으로 인류를 구하던지, 아니면 세계를 지배하던지 결정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영화의 결론은 만약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는 인간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컴퓨터에 불과하다는 암시를 준다.
그리고 트랜센던스는 생전의 부인과 함께 죽음을 선택한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그리고 트랜센던스는 조니 뎁이었다고 결말이 났지만 여전히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트랜센던스가 죽음을 결정했던 것은 그 인공지능이 너무나도 인간과 유사했기 때문에 마치 감정을 가진 것처럼 인간적인 결정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것은 아니었을까?, 너무나도 인간적인 컴퓨터이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스스로 기계임을 자각하고 죽음을 선택해서라도 인간이고 싶어한 것을 아니었을까?

이 책은 지구를 정복한 인간종의 하나인 호모 사피엔스의 개괄적인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7만 년 전,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던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순간임을 암시하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함께 두려움도 일어나게 한다.
근 2백년 사이 과학발전을 통해 인간의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커졌지만 인간의 욕구불만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공지능, 유전공학, 나노기술 등을 통해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고 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이 책의 결론이다.
많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에 대해 어두운 결론을 쏟아내고 있다.
기계들의 지배를 받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같은 극단적인 모습을 그리거나 인공지능 등 기계의 도움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다가도 결국 인간이 창조한 새로운 종족과의 갈등으로 종말을 맞이하는 내용들이다.

과학자들과 지배자들은 장애나 죽음이라는 한계의 극복을 통해 인류 모두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슬로건으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관용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초인을 만드는 그 기술의 수혜자로서 자신들 스스로를 지목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한 불평등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죽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 권력자나 일반 서민이나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래는 달라질 수도 있다. 죽음은 우리같은 가난한 자나 힘없는 자의 몫일 수도 있다.

미래에 새롭게 창조되어질 그들은 사피엔스일까? 기계일까? 

신체의 일부만 로봇인 종.
로보캅처럼 뇌는 사피엔스이지만 신체는 로봇인 종.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
죽지않는 사피엔스.
컴퓨터와 같은 지능을 가진 사피엔스.
헐크같은 강한 육체를 가진 사피엔스.

이들은 사피엔스일까? 아님 다른 새로운 종족일까?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어울려 산다면 그 때도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일까?

수십 억 년이라는 지구의 역사 중 사피엔스가 등장한 시기는 겨우 7만 년 전이었고 실제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로 등극한 것은 더 짧은 기간이었다. 이전 지구의 지배자들은 사피엔스가 아니었다.

사피엔스는 지구의 지배자가 되면서 네안데르탈인 같은 다른 인간 종의 멸종시켰으며, 더불어 가축을 제외한 다른 모든 종의 동물들을 거의 멸종에 이르게 했다.

새로운 종족들은 우리 사피엔스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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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 융 심리학이 밝히는 내 안의 낯선 나
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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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곳(이때 아무도는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을 말한다.)에서 항상 또 다른 나와 대면하게 된다. 또 다른 나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히 꼭꼭 숨겨둔 욕망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빛이 커지면 어두움도 커지듯 밝은 곳의 선한 모습은 어두운 곳의 악한 모습를 극도로 억압한 결과이다.
즉, 이면에 악한 속성을 억압한 만큼 겉으로는 선한 속성이 들어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죄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조금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선행으로 죄를 상쇄하려고 하지만 선행이 커질수록 이면의 그림자도 더욱 커지게 되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융은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하지 말고 인정함으로써 명암의 균형과 융합을 통해 스스로의 발전의 동력으로 삼도록 권고한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까지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숨겨진 힘을 통제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내 속에 그림자를 깨닫고 인정하지만 이 힘은 현재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에도 부담이 되는 것이다.
내가 도움을 청하는 그 사람도 나와 동일한 문제에 봉착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만돌라라는 개념을 이야기 한다. 만돌라는 선과 악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도 아니고, 타협하거나 중립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선만 있던지,  혹은 악만  있는 반쪽이 아니라 선악이 함께 있는 모순을 이야기한다.
잘못하면 삶의 다양한 색채들이 제 빛을 내지 못하고 회색을 만들어 낼수도 있다. 회색은 모든 색깔이 뭉쳐 중성화가 일어나면서 우중층한 단조로움을 드러낸다. 하지만 만돌라는 삶의 다채로운 색을 내는 것이다.


자주 그림자로 인해 진한 흑색에 가까운 회색 속에서 주저앉을 때가 많다.


통제할 수 없는 폭발력, 거부할 수 없는 힘, 폭발 후 너무 처참하게 나의 내면을 파괴하는 힘, 그런것이 내 속에 있는 그림자이다.
신에게 부르짖음도 이제는 염치없다고 회색이 충고해 준다.
어쩌면 부르짖을 의지조차도 무참히 짖밟아버리는 힘이 그림자이다.


한때 모든 의지를 꺾고 그림자에 순응해서 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삶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한부 인생에서 그림자에 대한 단순한 순응은 신의 존재를 믿는 자로서 용납하기가 쉽지 않았다.
신은 염치없더라도 돌아오라... 그러면 용서하리라... 하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책 속에 글자들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을 통해, 뇌를 통해 나의 내면으로 들어온 글자들은 깊은 어둠에 잠긴 곳곳을 해집고 다니면서 밝은 빛을 심어준다. 마치 44년동안 청소하지 않던 지저분한 집안을 대청소를 하듯...
그 속에서 썩어 문들어진 더럽고 냄새나는 것을 만나 당황하기도 한다. 반면에 여기 있었구나 하고 예전에 잊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찾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있는 줄도 몰랐던 황금같은 보물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책' 이라는 것에서 해결점을 찾아 본다. 그림자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 해결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신이 모든 그림자에 대한 죄를 용서해 주셨다. 하지만 이미 그림자가 깊숙히 배인 육체의 틀 속에서는, 이 틀을 완전히 벗어버리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와 더불어 융이 말하듯 삶의 무지개를 만들는 동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책을 통해 내면의 강팍한 마음을 치유하고 나만의 글을 통해서 그 찌꺼기들을 밖으로 배출한다.
나만의 이야기를 열심을 내어 들어주고 이해해 줄 누군가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동병상련의 동지를 만났다고 해도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열을 내기 바뿌고 종국에는 우리가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에 만족하는 정도에 그친는 것이 일반이다.


속시원하게 마음 맞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자신의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끄집어내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내면의 성찰을 위해서는 깊은 곳에 있는 자기자신과의 깊은 만남이 필요하다.


책과 글쓰기가 이런 작업에 도움이 될 것 같고 때문에 지금도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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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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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철학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우리들의 인생의 문제를 되집어 보고 철학을 통한 위안거리를 찾고자 한 책이다.


몇 가지 기억의 자취를 더듬어서 남은 흔적들을 적는다.


< 너무도 명백한 것이라거나 "당연한" 것으로 선언된 것들 중에서 실제로 그런 것은 거의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
가끔 어떤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데 있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분명 논리적으로는 이것이 해답이나 환경적인 요소가 이를 용납하지 않을 때이다. 또는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현재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누군가로 인해서 이다. 전자는 그 타협점을 찾아 적절히 해결이 가능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도무지 해결점을 찾을 수 없고 결국에는 그대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하는 불합리함도 겪게 된다.


세계의 역사는 너무도 명백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부정하면서 발전해 왔다. 유발 하라리는 '사이엔스'를 통해서 인간은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통해 발전해 왔고 또다른 혁명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인간은 현재를 부정하는 힘에 의해서 발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긍정은 현실의 문제점을 덮게 한다. 그리고 현실의 부정과 새로운 해결점의 모색은 강한 반발에 부딪친다. 때문에 많은 혁명들이 과격한 폭동 등을 동반했던 것 같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의 우선 순위를 왜곡하고, 행복의 물질적 환상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잘 팔리지 않는 것은 경시하게 만드는 것이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들의 생리이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
최근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라다크라는 세상에 공개되지 않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던 지역이 개방되어지고 서구화되면서 겪게 되는 폐해를 소개하고 지속가능한 개발과 전통문화와의 조화를 찾아 가는 내용이다.


나는 항상 삶의 공허함 속에 살고 있다. 가족이 있고 나름 괜찮은 직장과 수입이 있지만 그 공허함을 떨쳐낼 수가 없다. 한 때 직장 속에서 업무에 죽도록 매달리며 이런 공허함을 떨쳐낼려고 했고 일상의 바쁨은 공허함을 없애주지는 못하지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가혹함을 선물로 주었다.
최근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며 이런 공허함이 다시 큰 파도처럼 밀려왔다. 주위에서는 "너는 이전처럼 일이 많은 자리에 가야해... 일이 없으니 그런거야."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 세상은 좋은 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좋은 직장과 좋은 배우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직장에서 승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돈을 벌게 되면 모든 필요가 채워진다고 말한다.
그러니 열심히 살아서 성과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필요를 충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 필요를 해결하고 행복해 지는 유일한 방법일까?
한병철교수의 '피로사회' 표현 나는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고 결국 다 타버리고 영혼만 남은 존재이다.


새로운 삶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보는 벽들을 깨부수고 일어나야 할 시기가 왔다.


< 무조건 모욕으로 판단하는 그들의 성향 뒤에는 자신이 조롱당할 만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세네카의 사상을 중심으로) >
나는 자존감이 무척 약하다.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공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이런 성향을 ' 스스로가 조롱당할 만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우리는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객관적인 사실에서 찾기보다는 자신의 감정 속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대부분 스스로를 너무 사랑하고 때문에 보호하고 싶은 자신의 감정은 다양한 스토리를 개발해서 모든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린다. 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이런 피해를 보는 거라고 말한다.


이런 자격지심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스스로를 더욱 큰 자격지심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이전 대학생 시절에 같은 학과에 너무나도 박학다식한 동기생이 있었고 나는 그 친구를 너무나도 대단하게 생각한 나머지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었다. 그런 똑똑한 친구가 나와 친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던 중 정말 우연찮게 그 친구와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고 그 친구로 부터 재미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내가 너무 대단하게 보여서 가까이 접근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후로 우리는 상당히 친해졌다.


스스로를 너무나도 잘 아는 자신은 스스로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혹시 상처라도 받을까봐 과도하게 스스로를 보호한다.
실제로 그는 너무나도 빛나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자아 속에 꼭꼭 숨겨서 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한다.

고아성, 박성웅 새 영화 <오피스> 스틸컷.jpg (알싸인 가족도 나옴)

<오피스> 영화의 한 장면 : 과도한 성과주의로 인한 단체 광기를 통해 우리 시대상을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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