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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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저는 새로운 시선을 찾는 일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는 것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고정관념이라는 틀 속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우리가 날마다 다니는 길에 무심한 이유는 이미 알고 있는 그 길이라는 고정관념의 틀이 실제 그 길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봄에 만난 길과 겨울에 만난 길은 분명 다를 것이다. 비 속의 길과 찬란한 햇빛 속에 길은 분명 다를 것이다. 
우리의 고정관념은 삶 속에서 순간순간 만날 수 있는 행복들을 그냥 지나치게 만든다.

박웅현씨는 스스로를 '새로운 시선을 찾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시선을 찾는 일은 고정관념의 틀을 허무는 일이다.
바로 내 옆에서 속삭이고 있는 행복들과 기쁨들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지금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나는 비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고집스러운 내 속의 자아는 그들의 소리를 거부한다. 
인간의 자고의 끝은 세상과의 단절이다.
자연이면서 자연이 아니기를 고집하는 인간.
그런 내 속의 자고가 비의 소리를 막고 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면 그 곳이 높은 자리고 높은 자리로 가면 그 곳이 바로 낮은 자리다.
비움과 채움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다.  

틀을 깨고 새로운 눈을 뜨려고 하면서 결국 새로운 틀을 만들고 있다.

다만 세상의 울림을 조금이라도 마음의 울림으로 느껴보고 싶다는 욕망도 스스로를 특별난 자리에 둔 인간의 속된 욕망이다.

"이 세상은 천재들뿐만 아니라 영웅들로도 가득 차 있다. 박웅현이 만든 광고의 메시지는 언제나 너희와 우리를 구별하지도 않고, 천재나 영웅을 보통 사람들에게서 떼어놓지 않는다. 천재나 영웅은 보통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세상은 보통 사람들이 바꾸어 나가는 것이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의 광고는 튀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맘을 잔잔하게 진실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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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 승효상의 건축여행
승효상 지음 / 안그라픽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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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삶이다.
부엌을 어디에 놓느냐, 거실의 위치나 크기는, 창문의 높이는 등등 건축의 양식에 따라 우리네 삶을 달라진다.

삶이 없는 외관상의 멋은 건축이 아니다.
진정한 건축을 보려면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달동네'는 좋은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달동네 골목 또는 작은 공터는 아이들의 정겨운 웃음 소리로 채워졌다가도 어느 순간에 동네 아줌마들의 바쁜 일손에 서두름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런 중에 가까운 곳 어디선가 할아버지들의 진중한 장기판 소리가 울려온다.
그리고 북적이던 골목은 어느 순간엔가 긴 적막만 남기고 비워져 버린다. 침묵은 골목에 또다른 주장이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푸근함을 품고 있는.

서양건축은 자연을 지배하려고 한다. 이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사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반면 동양건축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다. 건축은 자연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만 수행한다.

개인적으로 산책을 좋아한다. 혼자하는 산책.
무작정 걷다가 보면 맘 속의 복잡한 것들이 길바닥에 다 떨어져나가 버리고 없다. 머리가 텅 비워진다.
하지만 내 앞에 문득문득 나타나는 의미모를 조형물들은 비워진 내 머리를 다시금 가득 채우곤 한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조형물도 우리네는 알지 못한다. 수억의 조형물일지라도 삶의 공간에서는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고 삶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지워가는 지우개일 뿐이다. 

가끔 마주치는 들꽃이 길거리 화단을 형형색색 채우고 있는 인공의 꽃들보다 더 아름답다.
인공이 반드시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청계천은 처음에는 나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걷기 시작하고 자연이 돌아오면서 지금은 좋아졌다. 우리네 삶과 자연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달동네로 돌아갈 필요는 없지만 계속해서 회색빛깔의 사각형 건축물로 우리 삶을 채워갈 필요도 없다. 

저자는 서울시 '총괄건축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그를 통해 서울의 600년 역사나 더욱 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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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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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신영복 님의 저서를 보면 감옥에서 20년을 지낸 분같지 않게 인생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인 즉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히 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그들 개개인의 삶은 어떤 위대한 저서와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침묵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앞에 있는 그를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함의 발현이다.


이 책의 저자는 18C 카톨릭 수도사이다.
17C에서 시작된 '이성의 시대'는 18C에 한층 철저해졌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총결산이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카톨릭교회에 대한 권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것에 회의적이게 된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성경이 라틴어로만 되어 있어 카톨릭교회 지도자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당연히 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성경을 다양한 세속언어로 번역하게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더이상 하나님이 카톨릭교회 지도자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 말하시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더불어 볼테르, 괴테 등 다양한 책들이 출간되었고 특히 뉴턴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발달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도전을 가져왔다.


종교와 이성은 항상 대립될 수 밖에 없다. 이성의 발달은 종교의 쇠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락으로 추락한 카톨릭교회의 권위에 대한 회복의 필요성.
하나님에 대한 어설픈 지식을 전부인양 쏟아내고 있는 대중들에 대한 분노.


저자는 "제발 입닥치고 조용히 해! 그냥 이전처럼 내말을 들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맛을 본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소화되도록 하는 것이지 않을까?


< 보태는 이야기 >


- 침묵은 무조건 좋을까?
침묵시 중요한 것은 평소 이미지다. 평소 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침묵과 작은 긍정의 미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비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의 침묵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군'하는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때문에 평소 확신이 있을 때는 한마디씩(?) 던져야 한다.


- 너무 감정적인 글이나 말은 무조건 나쁜 걸까?
청소년기 시절, 깊은 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연애편지를 쓴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밤은 감정이 지배(?)하는 시간...  다음날 아침 혹은 메일을 발송한 이후 다시 본 편지 내용이 너무 낯뜨거워 얼굴을 붉혔던 추억들...


감정적인 글과 말은 칼이 될 수 있다. 그 칼은 내 앞에 있는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진솔한 말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날 때 가능한 것.


상황에 따른 선택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끔은 이성의 고삐를 풀고 그냥 던져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 SNS를 통한 소통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최근 SNS를 통한 무분별한 악플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혹자는 상대방과 마주보지 않는다는 이점은 얼굴 붉히지 않고 나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도망가기 >


폐쇄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는 사이...
너무나 이상적인 사이다.


불편한 침묵은 '어설픈, 설익은 말'을 끄집어 내게 만들고 결국 자신을 '바보'로 만든다.


간혹 지나친 선입견으로 무작정 어떤 대상에게 야유와 경멸을 보내기도 한다.
정작 어떤 대상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침묵, 그리고 대상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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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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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이미지들에 둘러 쌓여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한 끊임없는 자극들은 현대인의 외부 인지 감각을 무디어지게 만들고 종국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하지만 상품의 판매와 소비가 생명인 현대사회의 탐욕자들은 무디어진 감각을 깨워 더 많은 판매와 소비를 촉진코자 좀더 자극적인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게 우리 주변의 이미지들은 지속적으로 진화하며 더욱더 자극적인 괴물들이 되어 왔고 우리네 현대인들은 그 괴물들에게 순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정말 무서운 것은 현대인들이 그 괴물의 명령에 따라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급속한 발달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각종 전투와 대량 학살을 곧바로 필름에 담아 가정에서 작은 화면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 사실감 넘치는 영화와 사진 등 다양한 이미지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화면 속에 담겨진 전쟁과 대량 학살은 새로 개봉한 액션영화의 한 장면과 다를 바 없다. 즉 화면 앞의 우리들에게는 '타인의 고통'이 담겨진 그 전투와 대량학살이 '실제'가 아닌 '스펙터클'(연극이나 영화의 웅장하고 화려한 장면) 이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가상과 실제의 모호한 경계선은 청소년들이 이슬람 무장단체인 IS의 대원으로 참여하는 비상식적인 결과를 낳았다.
현대사회에 대한 반항과 스트레스를 가상세계에서의 폭력으로 해소하던 청소년들에게 IS에 가담하는 것은 어쩌면 재미난 새로운 가상게임으로의 접속과 다를바 없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현대인들에게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화는 지구촌을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하였다. '나비효과' 이론이 이렇듯 삶가운데 충실히 적용하는 시기도 없었다. 물리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의 결정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미지'로만 전달되어지는 '타인의 고통'이 우리에게 '실제'가 아닌 '스펙터클'로만 인지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미지에 대한 책임을 함께 져야만 하고 결코 자유로워져서는 안된다.


피로사회라는 별명을 가진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로 눈 앞이 아닌 지구 어디에선가 발생하는 전쟁이나 기아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래서인지 충격적인 사진들을 보면 명목상 관심을 보이는 척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때로는 진정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디어져만 가는 감각 속에서 결국 그러한 사진도 우리들을 둘러쌓고 있는 수많은 자극적인 이미지들의 하나로 전락해 버리고 결국 그냥 무시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진은 많은 주관적인 관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사진도 결국 누군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누군가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선택된 이미지는 당시 일어난 어떤 일을 그저 투명하게 객관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없다. 즉,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를 담고 있는 이미지들은 깨끗이 처리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이다.


둘째, 사진은 연출되어지고도 한다. 자신들의 고통이 좀 더 커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는 뭔가를 고발하고 가능하다면 사람들의 행동까지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은 연출을 통해 더 충격적이고 무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셋째,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 즉 가난한 나라들에서나 빚어지는 비극이라는 믿음을 조장한다. 이 사진을 보고 있는 우리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넷째, 특정한 문제를 광범위한 지역 또는 인류 보편의 문제로 느끼게 함으로써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거나 고작 인간 본성이나 시대적인 사악함에 대한 한탄 정도에만 머물게 한다.


다섯째, 사진의 예시 기능은 특정한 사실에 대한 의견, 편견, 환상, 잘못된 정보 등을 조장한다. 사진은 특정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하며 다만 일부분을 보여줄 뿐이다. 더구나 보편적인 사실에 대한 정보를 특정한 사진을 통해 예시함에 따라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과거 특정 사건을 떠올릴 때 이야기가 아닌 단편적인 사진을 통해 기억한다는 것이다.


엄청난 이미지에 둘러쌓인 현대인은 보여지는 것에 대한 단순한 신뢰가 아닌 그 이면의 실제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듯 하다.


우리가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인간은 관음적 존재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강렬한 것이다. 이러한 욕구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상은 좀더 폭력적이고, 좀더 음란한 각종 스펙터클한 이미지들을 제공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연민이라는 쉬운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단순히 관음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은 모두가 곧 시들해진다.


우리는 연민을 느낌으로써 그들의 고통과 우리 자신이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무고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통이 없는 현실의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구 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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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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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에는 더이상 무엇인가를 소유할 필요가 없다. 단지 접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다.

물리적 시장이 사이버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물리적 시장은 방문해서 물건은 구입하지만 사이버 시장은 접속해서 서비스를 체험하는 것이다.
물리적 시장에서의 판매자와 구매자의 만남은 일회적이고 단골이 아닌 이상 흔적이 거의 남지 않지만 사이버 시장으로의 접속은 흔적이 남는다.
접속 일시와 구매상품 등등. 더구나 접속을 위해서는 공급자가 내건 조건에 맞는 개인 정보를 반드시 제공하여야 한다.
메일로, 핸드폰 메시지로 또는 우편으로 끊임없이 각종 상품에 대한 정보가 날아든다.
핸드폰은 정기적으로 특정 은행이나 보험회사로부터 전화가 온다.

인터넷서점 메인화면에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내가 최근 구매한 분야 책들을 소개한다.
나는 기업들에 완전 노출되어 있다.

요즘 '밴드'가 유행이다.
나도 몇개의 밴드에 가입 중이고, 그 중 몇개는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2개의 직장 모임과 1개의 취미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 중이고 참여 계획 중인 종교단체 모임도 1개 있다.

요즘 세상은 끼리끼리 모여야 사는 세상이다. 
모이지 않으면 도태된다.
특히 사이버상 모임은 접속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
물론 오프라인 모임도 초대받지 못하면 참여할 수 없다.

접속하지 못하는 자는 정보도 문화도 공유할 수 없고 정보화의 시대에 도태될 수 밖에 없다.
더불어 접속을 통해 형성된 네트워크는 그들만의 리그를 통해 조직사회의 생존여부를 결정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주위 모두가 어딘가 접속하기 위해서, 접속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한 그런 시대가 되었다.

글로벌리즘이 강조되는 현 시대에 눈에 보이는 제국은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제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막강한 대기업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정신과 육체와 삶을 지배한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는 혹은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이 상품이다. 
문어발씩 기업을 운영하는 대기업의 기저귀와 분유를 먹고 자라서 대기업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임종하고 대기업이 운영하는 상조회를 통해 안식을 맞는다.

지난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였다. 우리는 아무런 의문 없이 화이트데이니까 여자친구가 나에게 당연히 사탕을 사줘줄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화이트데이에 왜 건강에 좋지 않다고 평소 사먹지 않던 사탕을 평소의 몇 배의 돈을 지불하고 사야 하는가?

결국 세상은 이윤추구를 위한 상업적 욕망에 변질되었다.
교육, 정치, 인간관계, 문화 등등 모든 요소에 상업적 동기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광고, 스마트폰, 게임 등등 하루종일 접하게 되는 순간순간 스쳐가는 아니면 깊숙히 참여하게 되는 모든 것들의 이면에는 돈이 함께 한다. 하루도 몇번씩 돈을 위해 접속을 하고 결제를 한다. 모든 관계가 상업적인 목적이 내재하고 있다.

사이버상 누군가와 끊임 없이 잡담을 나눈다. 네크워크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공허하다. 남는 것이 없다. 진실한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진실한 관계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을 접촉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산을 알기 위해서는 사이버상 검색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진정 그 산을 알려면 그 산에 가서 그 산에 올라가봐야 한다.
쇠고기는 사이버상 사진으로 알수 있지만 진정한 쇠고기는 먹어봐야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쇠고기를 사이버상으로만 보려고 한다. 쇠고기를 먹어보지 않고 쇠고기를 안다고 한다.

최근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있었다. 우리의 삶이 사이버로 이동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대세이다.
1993년 실버스타 스텔론과 웨슬리 스나입스 주연의 영화 '데몰리션맨'이 개봉하였다.
내용 중에 여주인공 산드라 블록이 과거에서 미래로 온 스텔론에게 '섹스'를 하자고 제의한다.
... 그런데 미래는 신체적 접촉이 법으로 금지된 상태, 따라서 그 섹스라는 것이 '사이버상 섹스' 였고 피부가 접촉했던 과거에서 온 스텔론에게 이것은 '진정한 섹스'가 아니었다.
영화 말미에 스텔론은 키스를 시작으로 '진정한 섹스'를 산드라 블록에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균형이 필요한 시대이다. 물질적인 공간인가 사이버상의 공간인가가 양자 택일이 아니라 양자 균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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