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스릴러다.


저자는 느닷없이 한 인물을 집요하게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 1851년에 태어나 1931년 사망한 미국인 어류학자. 스탠퍼드 대학 초대 총장직을 20년 넘게 수행하며 수천 종의 물고기를 새로 발견하고 이름을 붙인 어류 분류학의 대가. 그런데 왜 이런 사람을?


실마리는 이 책을 쓴 룰루 밀러의 어린 시절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은 그녀가 일곱 살쯤 됐을 때 휴가지에서 생화학자인 아버지와 나눈 대화이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그녀가 물었다.

"의미는 없어!" 마치 평생, 이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버지는 통보했다. 이어 덧붙인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54쪽-


당시의 과학자답게 기계 주의적 사고관을 가진 아버지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노력을 폄하했다. 눈앞의 현실적 쾌락만을 좇는 그와 달리 룰루 밀러는 의미의 부재와 혼돈 속에서 큰 불안감을 느꼈고, 언니의 문제까지 겹치며 급기야 16살 무렵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된다. 이후 잠시 안정을 찾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 한 남자를 만나 계피 냄새가 나는 7년의 안식처를 가지기도 했지만, 우연히 알게 된 동성애 성향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다시금 혼돈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순간, 떠오른 것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 중 한 장면이었다.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12분, 리히터 규모 7.9의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했다. 데이비드가 거의 30년 동안 수집한 수많은 어류 표본과 이름표가 담긴 유리병이 박살 났고, 물고기들이 튀어나와 뭉개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수라장인 연구실에서 망연자실한 데이비드. 일생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려는 순간 그는 의연히 바늘 하나를 찾아 떨어진 물고기의 살에 꿋꿋이 이름표를 꿰매 붙이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자기라면 하릴없이 혼돈의 지배를 인정하고 모든것을 포기했을 거라며 저자는 더없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과연 포기하지 않는 데이비드의 끈기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1859년 다윈이 발표한 종의 기원으로 존재의 의미가 상실된 시대, 데이비드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급격한 변화에 걸맞은 그들만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진화와 진보를 혼동한 그들은 생물체는 우수한 품종만이 살아남고 고등하게 진화한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증거를 수집한다. 그렇다, 우생학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 깊이 심취한 스승의 영향을 받은 데이비드는 물고기 연구에도 이를 활용한다.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고 열등한 개체들은 배제했다.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던 룰루 밀러는 이 대목에서 크게 실망한다. 그도 그럴 것이 데이비드의 시각으로 보면 동성애와 우울증 성향이 있는 그녀는 정상이 아닐뿐더러 더군다나 계통수에서 장애인이나 정신 질환자 등과 같이 걸러내고 배제해야 할 열등한 종자였던 것이다. 역경에 굴하지 않고 초인적인 인내심과 배짱에 매료되어 천착한 데이비드의 생의 역동이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잘못되고 어리석은 가치관으로 인한 것이었다니...


이후의 이야기는 책으로 만나면 좋을 것 같다. 짧게 요약하면 순수하고 강한 종자의 보존이라는 신화에 갇힌 데이비드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면서 서서히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결정적으로 최근의 분기학에 따르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분류하고 이름 붙이고 싶어했던 어류라는 집단은 허구이다. 쉽게 말해 사는 환경이 공통일뿐 이들을 동일 종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다시 혼돈으로 돌아온 셈이다.


어쩌면 저자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위해 데이비드의 몰락을 기대하며 그의 일생을 끝까지 파헤쳤을지 모른다. 정상과 우수함, 실체에 대한 집착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데이비드의 삶과 물고기에 관한 이야기를 잘 버무렸으리라. 어쨌든 마지막 책장을 덮으로 우리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상식과 기준도 언제까지 영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느낀다. 사물의 개념화와 이름 붙이기, 그것은 우리 자신과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려는 자아의 기만술일지도 모른다는 것.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2-02-17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저는.이책이 최근 여기저기 베스트셀러이길래 제목 보면서 <침묵의 봄>처럼 환경 묵시록 인가보네..했어요. noomy님 글이 너무 재미있고도 반전이네요. 7년 계피향의 삶도 궁금하고 뒷 이야기 궁금궁금. 멋진 리뷰는 본책 읽는 것만큼이나 행복입니다. 감사합니다

noomy 2022-02-18 09:3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기회되면 한 번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