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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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이다. 언제 처음 읽은 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발행일 정보를 보니 3판이 2000년이다. 아마 그때쯤인 거 같은데 그 해는 대학에 입학하고 3년째라 책 읽을 여유가 없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전 같기도 하고 그 이후 같기도 하다. 이처럼 기억이란 소설에 나오는 미로 같은 장서관에서 내가 원하는 고서를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흘러간 세월에 어지럽게 누적된 책들은 서로 엉키고 뒤섞여 분류된 방을 무색게 한다. 십수 년도 훨씬 더 된 희미한 기억 속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몇 가지 떠올리려 애썼다. 세 가지 정도 기억이 났다. 첫째, 이 소설은 중세 시대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이다. 둘째, 장서관과 금서에 얽힌 살인사건이다. 셋째, 웃음에 대한 별 시답잖은(?) 논쟁이다. 첫째와 둘째는 소설의 전체적인 틀이니까 기억이 난다 치더라도 셋째는 뭐지? 왜 유독 웃음에 대한 논쟁이 기억날까?

처음 이 두꺼운 책을 읽을 때는 추리소설의 덕목에만 집중했다. 살인 사건, 미스터리, 수수께끼 등. 그 외 활자들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해박한 종교, 역사, 철학에 대한 압도적인 텍스트는 대충 흘려 넘기며 사건을 푸는 열쇠와 범인에 대한 추리에만 열을 올렸다. 물론 재미있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추리소설이다. 하지만 장르 소설로만 치부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내용이 담겨있다. 그걸 간과한 나의 초독은 이 책이 가진 진가의 반의반도 못 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 소설은 진리에 대한 이야기다. 구체적으로 "진리는 어디에 있고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중세를 대변하는 두 입장에 대한 이야기다. 철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실재론과 유명론의 싸움, 즉 보편논쟁이다. 중세 시대의 진리는 곧 신이다. 당시 이성의 힘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은 사람이 고민했다. 중세의 시작을 알린 위대한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적 실재론을 받아들여 초기 기독교 교리에 적용했다. 실재론은 보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소설의 도입부에 수도원장의 말 브루넬로가 잠깐 등장한다. 수도원에는 그 외 다른 이름의 말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보편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 '말'이란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가 실재론이고, 브루넬로 같은 개별자만 존재하고 말이란 단지 기호, 이름일 뿐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명론이다.

중세 초, 중기에는 실재론의 영향으로 신, 공 교회, 교황,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신을 인간이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빛에 주목했다. 신을 담고 있는 빛에 의해 모든 사물이 비추어지고 우리가 빛을 통해 사물을 인식할 때 신의 인식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를 조명설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호르헤를 필두로 우베르티노, 베르나르 기 같은 인물들은 절대적인 신을 인식게 하는 것은 오직 신의 자비와 은총(빛)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교황이나 공 교회, 성경의 권위에 의해 보증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유명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윌리엄은 좀 다르다. 그는 이 땅의 만물은 신이 창조했으며 곳곳에 신의 원리와 말씀이 존재하므로 우리는 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는 스승 로저 베이컨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중세 말에 등장한 근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엿볼 수 있다. 이성을 활용하여 능동적으로 증거를 모아 가설을 세우고 확증하는 태도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데도 활용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아드소와 여인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 유명론은 보편보다 개별자에 더 방점을 찍는다는 것이다. 이단 논쟁에 대한 인식차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베르나르 기는 이단의 보편적 실재에만 집중하지만, 윌리엄은 이단을 이루고 있는 각 개별자의 서사에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아프리카의 끝'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힌트인 '넷의 첫째와 일곱째'에서 넷이란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보편)이 아니라 넷 그 자체 텍스트(개별자)에 해결의 열쇠가 있던 것도 유명론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다.

한편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눈에는 유명론에 좀 더 마음이 갈지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과학적 사고와 분류체계에 익숙하므로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개념이 실재한다고 믿기 어렵다. 하지만 실재론은 무시 못 할 힘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유명론에서 말하는 각 개별자 모두가 보편이고 진리라면, 바꿔 말해 개인이 인식하는 각기 다른 보편을 어떻게 확증하고 일치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보편이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론적으로 진리의 확증과 공유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실재론이 가지는 강력한 힘이다. 이후 실재론은 근대를 거쳐 인식론적 관념론으로 발전하게 되고 유명론은 인간의 인식과 관계없이 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론적 실재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용어가 헷갈리기 쉬우니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소설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웃음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호르헤와 윌리엄은 웃음을 두고도 현격한 시각차를 드러낸다. 호르헤는 웃음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았고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덕으로 보나, 윌리엄은 웃음은 인간에게만 있는 이성의 기호로 불합리한 권위에 대항하는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의심하고 회의하고 비판할 수 있는데 웃음만 한 것이 없으며 재담이나 말장난도 진리를 나르는 수레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외로운 신의 은총보다 인간의 이성이 우위에 설 것을 두려워한 호르헤는 필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을 지키는데 목숨을 던진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반복하는 독서의 힘은 대단하다. 처음에 추리와 미스터리에 집중하며 읽은 장미의 이름과 텍스트와 진리에 집중하며 읽은 장미의 이름은 정말 다른 소설이었다. 재독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가득 쌓인 책장을 보면 읽었던 책을 다시 본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재독이 늘 새로움과 즐거움을 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나~아~중에 다시 또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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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2-10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대학교 때 읽어보려고 몇번을 시도해봤는데 결국 단 한번도 완독한 적이 없는 책이에요 ㅠㅠ 올려주신 리뷰 보니 정말 한번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실재론, 유명론....(아 저에게 철학은 미지의 영역) 에 관한 설명도 책 읽을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

noomy 2020-12-10 15:32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재미있어요 다시 한번 시도해 보세요~ 그래도 안 읽히면 뭐 안 보면 되죠. 재미있는 책은 차고 넘치니까요 ^^;;

han22598 2020-12-11 00:55   좋아요 0 | URL
2021에 한번 도전해보겠습니다. 도전! 안되면 말고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