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매 순간 완성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꾸역꾸역 이어오던 삶의 곡선이 툭 끊어지면서 세계의 완고함이 드러났다. 10여 년 전 가수 김창완의 인터뷰를 처음 봤을 때 받은 충격이다. 그전부터 실존주의적 삶의 태도를 몸소 보여준 그였지만, 2008년 산울림의 드러머였던 막내 김창익이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뜬 후 그의 인터뷰는 한결같이 '순간에 완성되는 삶'을 강조했다.

"나에게 있어 나는 나의 주인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갖잖아요. 그런데 요즘엔 그게 별 의미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인간은 워낙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 ‘자기’라는 것을 구축해 나가요. 자기 것을 확보하고, 자기 사고에 자기를 옹립하고, 자기 사고의 주인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섬기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래서 생겨난 자기라는 것은 기억의 적분, 기억과 경험의 누적 이외엔 아무것도 아닐 텐데…. 그거 모아봐야 한 줌 모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잡고, 자기 조정에 내맡기고 삶을 살잖아요? 그런데 이제 저는 생이, 삶이 순간에 완성된다고 믿게 됐어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앉아서 이런 얘길 하고, 생이 무엇일까 어리둥절하면서 말을 이어가고, 그 사이에 구 기자도 생이 뭘까 생각하고.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안다고 하면 거짓이죠. 하지만 이런 상태, 내 눈앞에 펼쳐져 시야가 다가가는 것, 내 이전의 경험과 나를 관통하는 시간들. 이 순간이 아니면 나를 완성하는 시간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신동아 2009년 2월호 인터뷰 중에서

"이 삶이라는 것이 매 순간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구나. 삶을 완성 시키는 것은 오랜 세월의 집적이 아니라 찰나구나. (중략)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저는 이렇게 선택을 했어요. ‘순간에 산다.’ 지금 내가 이 순간에 내 인생을 완성하겠다."

- EBS SPACE 공감 <김창완 밴드> 중에서

돌이켜보면 중고등학교 시절 내 머릿속은 많은 나무들이 뿌리내리고 살던 숲이었다. 공부, 성, 글쓰기, 음악, 컴퓨터, 친구 등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져 생의 충동을 거름 삼아 커 나갔다. 그 사이에서 한구석을 단단히 차지하고 있던 나무의 이름은 '죽음' 이었다. 삶과 죽음. 특히 죽음에 대한 상념은 꽤 자주 밤마다 나의 의식으로 밀려 들어왔고, 떨쳐낼 수 없는 울컥함과 절망을 애써 삼키며 잠이 들곤 했다. 게다가 필멸에 대한 생각은 다른 특이한 나무들이 자라는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미스터리' '외계인' 'UFO' '신비주의' '비관주의' '허무주의' '인간에 대한 절망' '휴머니즘의 부정' 등등.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는 동안 머리 한구석은 이런 유의 나무들이 하나의 군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목적 없는 삶은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며 2,30대를 지나갔다. 전만큼 절박하지는 않았지만, 삶과 죽음 그리고 세계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가수 김창완(배우, 작가, 라디오 DJ, MC 등등 그를 일컫는 수식어가 많지만 역시 가수일 때가 가장 그답다.)의 인터뷰를 본 것이다. 대학시절 산울림에 반쯤 빠져 있었기에 그의 언행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던 터다. 그 글을 처음 본 순간 나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삶과 죽음이라는 이름의 나무에 쩍하고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직선적인 시간관을 기본으로, 우리는 흔히 삶을 마라톤이나 험준한 산을 등반하는 등산에 비유하곤 한다. 이러한 삶은 시작과 끝이 비교적 명확하다. 결승선이나 산 정상은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어떤 유무형의 삶의 목표로 볼 수도 있다. 긴 삶의 궤적은 평평하거나 완만한 내리막이 있는가 하면 넘어지고 주저앉게 만드는 오르막도 있게 마련인데, 이러저러한 수많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삶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당장 두 가지 문제점이 생각난다. 첫째, 선형적인 삶의 양식은 우리를 자꾸 인과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관에서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가 만든 것이고,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가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인과의 굴레는 자아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을 강화시키고, 특히 문제 상황에서 항상 원인이 되는 나를 탓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후회하고 절망하며 더욱더 내 몸과 마음을 통제하려고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이런 삶에 대한 세계관은 목표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승선을 통과하거나 산 정상에 올랐다고 치자. 그렇다면 목표가 달성됨으로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가? 혹은 달성하지 못한다면 나의 삶은 완성되지 못하는가? 만약 새로운 목표를 계속해서 만든다면 그 삶은 목표에 집착하는 삶이지 완성되는 삶은 아니지 않을까? 아니면 단지 삶의 목표, 삶의 완성이 단순히 죽음이라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은 허무 그 이상이 될 수 있을까?

자연의 시간은 지금 즉, 순간의 무한한 반복적 연속일 뿐이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양상은 우리의 의식에서만 성립한다. 그러므로 삶은 매 순간 완성된다. 아니, 완성해야 한다. 자아는 과거나 미래와 단절된 채로 수없이 쪼개져 있으며, 그 순간에 내 삶이 완성되는 것이다. 게다가 순간에 완성된 삶은 그걸로 완성이며 끝이다. 각각이 누더기처럼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음 완성될 삶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죽음의 순간에 삶이 완성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분절된 삶을 계속 완성하고 있다. 삶의 단위는 일생이 아니라 순간이다.

여러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들이 참 많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가 있다.

"저게 무엇이오?" 그가 놀라도 크게 놀라면서 물었다. "두목, 저기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르지요? 바다?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두목, 내 맹세코 말하지만, 내가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이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불렀다. "조르바, 혹 돌아 버린 건 아닌가요?"

"무얼 비웃고 있어요? 당신 눈에는 안 보이는가요? 두목, 봐요. 저 모든 기적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술을 말이오."

그는 밖으로 달려 나와 봄철 망아지처럼 풀밭을 구르고 춤을 추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328~329p 열린책들

조르바가 느끼는 저 생의 충만, 생의 감각이야말로 순간에 완성되는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덧붙이자면 순간에 완성되는 삶이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삶은 오히려 순간에 집착하는 삶이다. 매 순간 새로이 구성되는 자아와 세계를 좀 더 명징하게 관조하면서, 우리를 둘러싼 경이로운 세상과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닿을 수 없는 타인들과 어떻게든 상호작용해야 한다.

덧붙여 김창완은 이런 삶에 대한 태도를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산다>라는 노래로 포착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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