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개인의 삶이 모여서
더 복잡하고 심오한 사회를 담아내는 건축물을 만든다.
이러한 건축물은 우리의 삶을 담아내기도 하고 우리의 행동을 조절하기도 한다.

꼭두각시 인형들을 보고 있노라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위에서 사람이 줄을 이용해서 춤을 추게 하거나 걷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꼭두각시 인형의 줄들이 바로 건축가가 디자인하는 벽, 기둥, 창문, 슬래브(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바닥)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건축 요소들이다. 이 줄들이 모여서 도시라는 인형과 그 인의 사람을 춤추게 한다. 하지만, 물질이합쳐져서 나타나는 건축물‘이 궁극적인 목표여서는 안 된다. 그 이후에만들어져야 하는 아름다운 인간의 삶이 우리 건축가가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목표로 삼아야 하는 지향점이다.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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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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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미술관>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인권 문제에 있어서 누구나 ‘잠재적 가해자‘‘
작가의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인권‘문제

그동안 사회 전반에 걸친 잘못된 암묵적 관행과 부조리, 절하된 여성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소리가 높다.
지금의 ‘미투‘운동 ‘페미니즘‘의 부각은 당연한 권리를 찾는 인권운동일 것이다.

‘자기 결정권‘의 관점으로 ‘성폭력‘은 ‘성적 자기 결정권‘의 침해다. 또 성적욕망 뿐만 아니라 지배 욕구의 문제, 자기보다 약한 자를 힘으로 제압하고 자기 말을 듣게 만들려는 행위라는 것이다.
기본적 자기결정권에 강압적 폭력행위는 한 마디로 나쁘다.
인권은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리고 행사하는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말한다.
무엇보다 인권의 핵심은 ‘자기 결정권‘이다.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 또한 옳지 않다.

이 책은 말한다.
‘그림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를 찾으며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누군가를
‘타자화‘ 시키고 ‘대상화‘ 하는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불편한 심정을 토로한다.

< 수산나와 두 노인>을 그린 두 화가의 시선에 대해

‘‘수산나를 바라보는 두가지 시선‘‘은 다르다.

‘렘브란트 판 레인‘의 ‘ 수산나‘는 관람자와 눈을 보며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하지만 ‘게르치노‘의 그림의 ‘수산나‘는 훔쳐보는 두 노인 앞에 대상화 된 ‘피해자의 수산나‘가 있다. 분명 다르다. 그리고 이 그림을 지켜보는 관람객은 잠재적 공범자이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 ‘작품 속 행위가 관람자의 공간에까지 확장‘된다고 한다. ˝

‘게르치노의 그림‘의 남성과 관람자는 한편이 되어 같이 훔쳐보는 공범자이며 가해자가 된다.

인권은 ‘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노사이드는 인간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최악의 범죄다.‘‘

인종과 이념의 대립으로 특정집단을 대량학살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라도 정말 용서 받지 못할 범죄 행위다.
현재 국제 사회, 지구촌 한쪽에서
˝수천이 죽어도 이제는 숫자만 보인다.˝
개개인의 생명, 죽음은 없다. 그저 사망자수로 끝나는 잔인한 기사들은 생명의 존엄성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목숨, 하나하나가 사람이다.
‘인간애‘
여기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오노레 도미에 <삼등객차>
이 책의 표지 그림이다.
그림은 삶에 찌든채 ‘삼등객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했다.
이 따뜻함은 인간을 사랑하는 ‘오노레 도미에‘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작가는 생각했다.

‘표현의 자유에 한계란 없나‘
‘인권감수성‘
그리고 ‘인권‘에 관하여 정답이 없는 문제에서 무엇이 인권의 가치에 부합한지 질문도 던진다.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표현에 대해 조심하고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자세 ‘인권감수성‘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고 노력해야만 길러진다.

‘표현의 자유‘와‘혐오표현‘ 경계에서 고민
‘반달리즘‘ 과 ‘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는 것
스테레오타입, 바뀌지않은 찍어 낸 것 같은 고정관념은
인종주의 문제에 있어 중요한 단어다.
부정적인 고정관념, 긍정적인 고정관념의 어떠한 스테레오타입도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같은 행동과 말도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인종주의 여부가 갈린다는 것이다.

책에 나오는 많은 그림작품들 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하거나 유명한 그림들이 많았다. 책을 넘기기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작품들이 이제는 지나칠 수가 없다. 알면 알수록 가릴 것도 생각할 것도 조심해야할 것도 많아진다. 그리고 불편해진다.
하지만 무시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제는 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불편한 것들‘을 발견하고 개선해야 할 것이다.

‘‘인권이란 인간을 전제로 한 것이다.‘‘

결국,본질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100년전, 그 당시 불가능했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것이 되어 있다.
이렇듯 작가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불편함
우리시대의 인권 너머 느끼는 불편한 진리는 필요하다 생각하는것 같다.

‘‘언제나 작은 불편함이 큰 변화의 시작이였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인권의 가치, 인권 감수성
살면서 맞딱뜨리는 것에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관해 고민한다. 하지만 답을 찾지는 못하지만, 어려운 문제를 묻고 되묻는 작은 불편함이 ‘인권 감수성‘을 키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난 지금 나에겐,
작가가 바라는 ‘불편함의 아주 작은 불씨‘가 남았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지독한 독선‘을 부리고 있진 않은지
나의 독선으로 ‘인권의 가치‘를 매기고 있는건 아닌지..
정작 세상을 모르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은지
다시금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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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뻔뻔하게 나서는 힘도 필요하다?

인지하지 못한 행동 앞에서 자신의 오류를
급 자각할 때가 생긴다.
운전을 하다보면 낯선 도로에서 종종 만나는
당황스런 상황 , 이 때 나는 문제 해결 능력의 잠재력을 최고치로 끌어 올려야 한다. 잠시라도 머뭇거림이 있을시 여지없이 날아 오는 것들이 있다.
클락션의 진동이 귀를 때리는 순간이 닥친다.
갈라져 나오는 가닥가닥의 소리는 온 몸으로 쏟아져 그대로 박힌다. 어느새 몸은 꼼짝달짝 못하는 거미줄에 묶인 먹잇감이 돼버린다.
아직도 낯선 곳에서의 운전은 예측불허인 시공간의 블랙홀로 빠져들게 한다. 그 소용돌이에 순간 휘말리면, 일명 멘붕상태로 정신줄을 놓치고 만다.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과 쉴 새 없이 뜀박질하는 가슴은 더더욱 부동자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 번의 경험으로도 그 어떠한 경험치를 능가하는 압도적인 기억이 오늘 소환된다.

커피 한 잔과 함께 평온한 나의 시간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 전지적 관찰자의 묘한 즐거움에 빠져 까페 창밖의 광경을 목격한다. 그런데 예전의 내 경험이 오버랩 되면서 안쓰러움에 쌓여 같이 발을 동동거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일방통행인지 모르고 들어선 하얀 아반테 차량이 눈에 들어온다. 도로 중간지점에서 마주오는 차량과 맞딱뜨리는 순간에서 하얀 아반테 속 누군가는 자신을 의심한다.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이미 휘말리는 소용돌이 중심에 놓여진다.
하얀 아반테 주위를 빠르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과
그 속에 앉아 식은땀을 품어 대고 있을 누군가의 처지는 동변상련이며 나의 경험치 더하기 측은지심이다. 생면부지 없는 누군가에게도 내 감정이 동요되는 순간이다. 10미터 눈 앞에 벌어진 누군가의 처지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한 때 나도‘ 라는 공감대가 발동한 것이다.
하얀 아반테는 이래저래 차를 돌린다. 그렇다고 들어선 길을 무작정 밀고 골목길을 나가는 뻔뻔스러움도 없다. 그냥 정지. 답이 없다.
알아서 피해가는 차량들, 개중에 창문 내리고 들려오는 언성, 가면서 거침없게 쏟아붓는 굉음의 차량들 뿐이다.
익숙치 않은 세상 한복판에 흔들리는 누군가가 길을 잃어 갈방질팡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저 ‘멈춤상태‘에 놓여 있다. 여기서 누군가의 손길은 따뜻한 구원의 빛이다.
마침, 친절하게 방향을 지시하는 구원의 손길에서 빛나는 희망이 보인다. 구출된 하얀 차량은 그제서야 창문을 내린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연거푸 고마움을 연발한다.
지상 2층에서 나의 관망은 이제야 조아린 맘을 놓고 같이 한숨을 내쉰다. 별것 없는 공감이 뭣이라 웃음이 난다.

낯선도로에서 표지판을 잘못 보는 경우는 이제는 아주 가끔이나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설사 그러한 실수후에도 당차게 핸들을 돌리고 빠져나올 수 있는 뻔뻔함도 적당히 생겼다. 나의 잘못도 그저 실수라 말하는 변명도 당당하게 내 뱉는 담담함도 배웠다. 세상 초보에서 이제는 적당한 세파에 ‘무던한 견딤‘도 배웠다.
초보 인생이 마흔을 넘는 어느 순간부터 가파르게 언덕 길을 올라가고 있다. 인생 주기 한창인 나이다보니 정신없이 엑셀레이터 밟고 질주해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브레이크도 밟아가며 속도 조절을 해야한다.
무한 질주보다 무서운게 없으니 말이다.
눈 앞에 보이는 그저 그런 광경이 오늘 브레이크를 걸어주었다. 일상이 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있는 시간이 가져다 주는 힘을 느끼는 순간이다.

의도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그 시간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점점 늘어난다.
사춘기의 감성이 생기기도 하고 낯선 설렘이 폭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더 이상은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지껏 내가 몰라서 갈 수 없었던 길이었다면 지금은 어슬프게 아는게 늘어나 갈 수 없는 두려움이 더 생겼다.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달려야 한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취해서 있을 때가 있었다. 내가 몰랐던 예전의 감정을 알게 되는 순간 이제 어른이 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금세 틀렸다는 것을 깨달게 된다. 부족함, 모자람을 깨달을 때마다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책을 읽으면서도 여러 책을 같이 넘겨야 되고 때론 인터넷을 뒤져 세상의 정보를 모아 보기도 한다. 수많은 가지들이 한꺼번에 엉켜 때론 머리 속을 망치로 내리 치기도 한다. 뭐하고 있는지 모르는 현실의 자신에 대해 책망도 한다. 나의 둔함에 자책을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 앉기도 한다. 그러다가 악에 받혀 오기도 생긴다. 하루에도 참 많은 감정들을 소화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이러한 감정 소비로 시달릴 때면 어디로 도망칠 궁리를 찾고만 있다. 일상에서 던지는 문제보다 내 속에서 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답을 찾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그러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소중해졌다. 당연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났다. 일상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탄탄히 이어 나갈 관계의 끈을 만들기 위해 혼자 있는 나의 시간은 충전이다.

나의 충전 시간인 혼자만의 커피 타임,
<안나까레니나 >에 빠져있는 요즘 소환된 나의 초보 시간들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찾아준다.
근데, e북의 불편함에 몰입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다시 읽는 <안나 까레니나> 예전과는 너무나 다르게 다가온다.
조만간 ‘안나이야기‘로 열을 올리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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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놓인 책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더불어 딸려 온 책이다

주문한 책과 함께
동네 책방 주인장이
선물로 담았던 책이다

<가시리 >
사랑노래가 담긴

750년 전 이야기
시대는 몽골의 침입이 있던 때
세 명의 우정과 사랑
서로 다른 미래
그 사이에서
소녀 아청의 마음

가인(歌人)아청의 사랑노래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았다

아청의 옆에는 ‘좌‘와 ‘우‘
그녀를 향한 좌와 우의 마음을 아청은 알고 있다
하지만 둘을 잃는다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아청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운명을 의탁하지 않는다

‘‘그녀에겐 의지가 또한 사랑이었다‘

스스로의 의지가 중요한 그녀
의지가 확고할수록 아쉬움도 깊다
좌와 우의 엇갈린 미래 앞에서
가슴아파한다

가시리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슬픔을 노래하는
작자미상의 ‘고려가요‘를 모티브로 작가는

˝노래를 아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풀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처럼
‘이 노래의 주인공들만큼 사랑하며 살고싶다‘는 작가의 말처럼
아주 오랜만에 사랑노래를 가슴에 담아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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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9

사랑의 대상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고 있다. 사실상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사랑을 받는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사랑의 강렬함을 입증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위에서 이미말한 바와 동일한 오류다.

p73

모성애

모성애는 어린아이에게 살려고 하는 소망뿐 아니라 삶에 대한사랑‘을 천천히 길러준다. 이러한 사상은 성서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약속된 땅(땅은 언제나 어머니의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넘쳐흐른다‘고 묘사되고 있다. 젖은 사랑의 첫 번째 측면, 곧 보호와 긍정적 측면의 상징이다. 꿀은 삶의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젖‘을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린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무리 심하게 말해도 과장이 될 수 없다. 삶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불안도 감염된다. 이 두 태도는 어린아이의 퍼스낼리티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사실상 어린아이 - 그리고어른ㅡ사이에서 ‘젖‘만 먹은 자와 젖과 꿀을 먹은 자를 가려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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