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 이야기
전혜진 지음 / &(앤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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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이던 30년 전, 교통사고로 일가족이 사망한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연희는 “가족을 잡아먹은 여우새끼”라며 격분한 할머니와 큰오빠 원일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연희를 거둔 건 남해 사량도에서 무당으로 지내던 이모 애란. 이후 연희는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됐지만, 굿은 안 하고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며 조용히 신당만 모실 뿐입니다. 그런 연희에게 큰오빠 원일이 30년 만에 연락을 해옵니다. 스무 살 된 딸 연아가 지독한 무병(巫病)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딸이 이모와 여동생처럼 무당이 될 운명일까 봐 두려워하는 원일 앞에서 연희는 지난 30년을 떠올리며 착잡해집니다.



2024년 출간된 ‘족쇄’를 읽고 단번에 전혜진의 팬이 됐지만 두 번째 작품을 만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연희 이야기’라는, 흔하지만 비범한 느낌을 주는 제목과 무당이 그려진 표지, 그리고 ‘살기 위해 신(神)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띠지의 카피를 보며 ‘족쇄’와는 다른 장르이긴 해도 그만큼의 묵직함을 만끽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알라딘 기준으로 ‘미스터리’와 ‘호러공포’로 분류되긴 했지만, ‘연희 이야기’는 여러 장르가 복합된 작품입니다. 무당의 이야기이자 여성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괴담이자 통렬한 사회 고발물의 미덕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억울함에 몸부림치다 귀신이 된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띠지 카피는 자칫 이 작품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할 수도 있는데, 일부 그런 내용이 있긴 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카피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큰 틀은 할머니와 큰오빠에 의해 쫓겨난 뒤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기까지의 연희의 굴곡진 30년의 과거, 그리고 복잡한 심경 속에 연아의 무병에 대처하는 현재로 구성돼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다섯 개의 괴담이 소개되는데, 이 괴담들은 연희의 현재 이야기들과 절묘하게 맞닿아 있어서 본 내용 못잖게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특히 괴담들 대부분이 ‘현세의 지옥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앞서 ‘여성의 이야기’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연희의 과거는 비극 투성이이고 현재 역시 고통스런 딜레마에 사로잡혀있지만, 이 대목들이 더 큰 파장과 여운을 남기는 건 격하고 직설적인 표현 대신 차분하고 담담한 문장들로 그려진 덕분입니다. 30년 전 자신을 쫓아냈고 여전히 무당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큰오빠 원일에 대한 양가적 감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똑같은 운명을 부여받은 조카 연아에 대한 연민, 그리고 무당이자 여성으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을 통째로 뒤바꿔버릴 수도 있는 ‘중대한 선택’에 대한 고민 등 격정적인 상황과 감정이 연이어 몰아치지만, 전혜진은 오히려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함과 담담함을 견지함으로써 더 깊고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주인공 연희는 “예전에 썼던 ‘여성, 귀신이 되다’의 이야기들을 소설로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2021년에 출간된 전설과 민담에 관한 작품으로, 소설은 아니지만 연희를 탄생시킨 그 이야기들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또 여러 작가들과 함께 펴낸 여성 혹은 귀신에 관한 앤솔로지도 다수 있는데, 그 작품들도 찬찬히 찾아볼 생각입니다. 


무당, 여성, 괴담이라는 외피 때문에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재미와 무게감과 여운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한 번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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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토호 - 모두가 사라진다
니이나 사토시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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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여동생 아오바가 숲속 폐가에서 커다란 천 뒤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자 초등학생 나쓰히는 겁에 질립니다. 하지만 “아오바가 누군데?”라며, 애초 그런 존재가 없었다는 듯 되묻는 부모님과 이웃들 때문에 나쓰히는 대혼란에 빠집니다. 아오바가 사라지는 걸 함께 목격한 소꿉친구 아키토 외에는 누구도 아오바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쓰히 주변에서 또 다시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지도교수 후지에다, 시간강사 기요하라, 그리고 비명에 사망한 친구 등 모두가 수백 년 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이야기 ‘아사토호’와 연관 됐음을 알아낸 나쓰히는 아키토와 함께 그 이야기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읽기 전까지 알고 있던 정보라곤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 아이는 내 여동생이다. 모두가 말한다. 그런 아이는 처음부터 없었다고.”라는 뒷표지의 홍보카피, 그리고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호러 대상을 수상한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란 게 전부였습니다. 짐작컨대 미쓰다 신조 스타일의 호러물이 아닐까, 싶었지만, ‘아사토호’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미스터리와 호러,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작품이었고, 실은 여러 번 중도포기를 고민했을 정도로 무척 어렵고 난해한 이야기였습니다. 4년 전 ‘유지니아’를 끝으로 더는 읽지 않고 있는 온다 리쿠가 더 편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는데, 그래선지 서평을 써선 안 되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고, 어느 정도의 평점을 줘야 할지 감조차 잡기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더구나 인터넷서점에 올라온 후한 호평들을 보고 나니 제가 책을 잘못 읽었거나 저의 독해력이 엉망이었거나 아니면 그저 제 취향에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정체불명의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내 존재는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이야기에 의해 정해진다.” (p322)


작가가 ‘아사토호’에서 말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한 줄이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저의 혼란과 자괴감은 사실 이 철학적인 명제 하나에서 비롯됐습니다. 만일 이 작품이 수백 년 전에 쓰인 작자미상의 이야기 ‘아사토호’가 야기한 호러 미스터리이자 판타지 괴담이었다면 아마 미쓰다 신조의 ‘작자미상’과 엇비슷한 대중적이고 흥미로운 호러물이 됐겠지만, 작가는 “존재는 이야기에 의해 정해진다”라는 철학적인 명제를 밑바탕에 깔아둠으로써 그 어느 장르물과도 차별되는 독특한 서사를 만들어냈습니다. 

다만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대목에서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저는 길을 잃어버렸고, 그런 채로 마지막 장까지 꾸역꾸역 읽어내긴 했지만, 작가의 의도를 절반은커녕 잘 해야 20~30% 정도만 이해한 채 책을 덮고 말았습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으면 조금은 더 이해가 될까 싶었지만, 그 어느 서평에서도 제가 원하는 답을 찾진 못했습니다. 


어쩌면 한 번쯤 더 읽으면 작가의 심오한 의도와 이 작품의 의미에 더 다가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굳이 그런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궁금함과 호기심이 남은 것도 아니고, 단지 저와는 맞지 않은 이야기 또는 제 취향이 아닌 작가라고 생각하는 게 더 마음 편한 일 같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한마디만 보태자면, 북로드에서 펴낸 책답지 않게 오타가 너무 많아서 읽는 도중 여러 번 기분이 상했습니다. 조사의 오류가 가장 많았고, 인물 이름이 틀리거나 단어 자체가 아예 빠진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중쇄 때 꼭 바로 잡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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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선 남자 ㅣ 스토리콜렉터 126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허형은 옮김 / 북로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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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안보부 특수프로젝트부 요원 트래비스 디바인은 CIA요원 제니퍼 실크웰이 살해당한 사건에 투입됩니다. 그녀가 살해당한 곳은 본가가 있는 메인주의 해안가 소도시 퍼트넘. 도착 직후부터 소도시 특유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분위기가 감지됐지만, 디바인은 현지 경찰과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수사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내 혼란에 빠지고 마는데, 그가 전달받은 정보와 달리 제니퍼는 CIA 업무와 관련된 이유로 살해당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퍼트넘에선 15년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기묘한 죽음과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는데, 디바인이 볼 땐 제니퍼의 죽음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게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미 육군 특수부대의 유능한 장교였지만 비극적인 사건 때문에 전역한 뒤 월스트리트의 애널리스트로 일하던 트래비스 디바인은 전작 ‘6시 20분의 남자’에서 퇴역장성 에머슨 캠벨에게 협박성(?) 스카웃 제의를 받곤 국토안보부 특수프로젝트부에 몸을 담았습니다. 전작에서 연쇄살인사건은 물론 국가안보와 관련된 굵직한 사건을 해결한 디바인의 다음 행보는 당연히 사이즈가 좀 더 큰 첩보 스릴러 서사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이번 작품에서 디바인은 ‘비밀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소도시 속 명탐정’으로 맹활약합니다. CIA요원 제니퍼를 살해한 국가안보 위협세력을 찾아내고 1급 기밀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되찾는 것이 당초 디바인의 미션이었지만, 그는 침묵과 은폐로 일관하는 퍼트넘의 주민들과 경찰을 상대하며 아무도 예상 못한 참혹한 진실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장르물 가운데 폐쇄적인 소도시에 툭 떨어진 주인공이 갖은 난관과 방해를 이겨내고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음산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인구 300여 명의 해안가 소도시 퍼트넘은 사건의 무대로 더없이 매력적인 곳임은 물론, 수사 과정에서 숱한 위기를 넘기며 여러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디바인의 명탐정 캐릭터를 더욱 빛나게 해줍니다. 또한 디바인의 조사와 탐문을 방해하거나 의심스러운 진술만 거듭하는 퍼트넘의 주민들은 그 가운데 누구든 범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미묘한 분위기를 발산하곤 해서 진실에 대한 궁금증을 몇 배로 증폭시킵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디바인의 조사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15년 전부터 최근까지 퍼트넘에서 일어난 몇몇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입니다. 독자 입장에선 이 죽음들이 제니퍼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 해답이 공개되는 지점까진 디바인조차 혼란에 빠진 상태라서 독자 역시 작가가 제공하는 단편적인 정보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설정은 전문 청부업자들의 소행으로 보이는 디바인에 대한 연이은 습격인데, 이 역시 제니퍼의 죽음과 관련 있는지 여부가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과거와 현재가 뒤얽힌 정황도 복잡한데다 누구 하나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듯 보이는 덕분에 거대한 첩보 스릴러 서사 못잖게 독자의 두통을 유발합니다. 한 번에 완독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띄엄띄엄 나눠서 읽어야 된다면 메모장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잘 짜인 미로마냥 정교하고 탄탄하게 설계된 이야기란 뜻인데, 마지막에 진범과 진실이 밝혀지는 대목에 이르면 이렇듯 매력적인 설계를 구상한 데이비드 발다치의 필력에 진심으로 감탄하게 됩니다.


독자에 따라 ‘압도적인 육체의 강력함과 명석한 지능’을 지닌 디바인이 ‘소도시 속 명탐정’이 아니라 ‘첩보물의 주인공’으로 맹활약해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앞으로도 디바인이 국가안보보다는 연쇄살인사건 등의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명탐정으로 활약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 중에서도 FBI 객원요원인 주인공 데커가 쇠락한 소도시에서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폴른’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좀 더 주인공의 매력을 드러내기도 하거니와 몰입도도 높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2024년에 출간된 디바인의 세 번째 이야기 ‘To Die For’에도 디바인의 이런 매력이 잘 녹아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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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쿠 - 망자의 터
기타자와 도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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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간토 대지진(1923년)으로 아내 시즈코를 잃은 후루세 소이치로는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무녀 미쓰코에게 강령 의식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강령을 마친 미쓰코는 “부인은 참말로 떠나신 게요?”라는 불길한 말을 남겼고, 그날 밤부터 후루세에겐 기괴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그러던 중 시즈코의 목소리와 향기를 지닌 괴이가 침실에 나타나는 일까지 벌어지고, 그것이 제대로 성불하지 못한 채 저승으로 가지 못한 망령임을 알게 된 후루세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 와중에 그런 망령들만 골라 잡아먹는 ‘얼굴 없는 괴이’ 에리마키와 맞닥뜨리자 후루세의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어본 작가지만, 2023년 제43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호러 대상’에서 최초로 대상, 독자상, 가쿠요무(カクヨム)상 등 3관왕을 차지한 화려한 타이틀에 눈길이 끌려 관심을 갖게 된 작품입니다. 붉은 부채들과 앙상한 나무, 그것들을 바라보고 앉은 한 여인이 그려진 표지도 인상적인데, 이야기 역시 음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무척 독특한 호러 서사를 선보입니다. 기타자와 도는 인터뷰에서 에도가와 란포와 사와무라 이치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어떤 대목에선 미쓰다 신조의 분위기도 살짝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온고쿠’는 한자로 표기하면 遠國, 즉 직역하면 ‘먼 나라’이고, 이 작품에선 죽은 자가 사는 곳이자 (부제인) 망자의 터를 뜻하며, 아내 시즈코의 망령이 후루세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부르는 노래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성불을 한 망자라면 누구나 온고쿠로 가야 하지만, 아내 시즈코는 무슨 이유에선지 이승을 떠나지 못한 망령으로 전락했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후루세 앞에 나타나곤 합니다. 

그런 후루세를 더욱 공포에 떨게 만드는 건 이승을 떠나지 못한 망령들만 골라서 잡아먹는 ‘얼굴 없는 괴이’ 에리마키입니다. 그 어떤 호러물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캐릭터인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존재라서 주인공 후루세보다 더 눈길을 끕니다.


이야기는 시즈코가 망령이 된 이유와 후루세를 찾아오는 목적, 망령을 잡아먹는 에리마키의 정체, 그리고 자신의 가문에 전해 내려온 거대한 저주의 실체 등을 무녀 미쓰코를 통해 알게 된 후루세가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흘러갑니다. 전반적으로 호러물의 본연의 역할인 ‘서늘함’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망령이 된 아내 시즈코에 대한 후루세의 그리움과 죄책감이 이야기 바탕에 깔려 있다 보니 읽는 내내 안쓰러움과 애틋함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나를 가장 사랑했던 존재가 저주에 빠져 나를 죽이러 다가온다’는 잔혹하고도 애달픈 상황”이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후루세의 처지를 한마디로 잘 요약해놓았는데, 이런 설정 덕분에 독자는 일반적인 호러물과는 전혀 색다른 느낌의 엔딩과 마주하게 됩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됐지만, ‘온고쿠’는 서늘함과 애틋함이 공존하는 호러물이라 오히려 뜨거운 한여름보다는 요즘 같은 시기에 읽는 것이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좀더 구체적인 줄거리를 언급하지 못했는데, 호러물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궁금증과 관심이 발동한 독자라면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도 단단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에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도 꽤 상세한 내용을 공개하고 있으니 뒷표지에 실린 줄거리 정도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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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의 아이 : 상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더픽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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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잠든 뒤 깨어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희귀질환 이레스. 무려 네 명의 환자가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이 병에 걸립니다. 이들을 담당한 신경내과의 시키나 아이는 오랫동안 봉인해온 트라우마가 재발하며 공황에 빠집니다. 환자들 모두 발병 직전 자신처럼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원인도, 치료법도 없어 절망하던 아이는 뜻밖의 경로를 통해 ‘환자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기억과 상처를 직면하고 영혼을 구하는 치료법’을 알게 됩니다. 주술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지만 첫 환자의 꿈속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 아이는 그(녀)를 혼수상태에 빠뜨린 고통의 원인과 비밀을 찾는 위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몽환의 아이’라는 제목과 “잠든 사람의 꿈속으로 들어가 영혼을 구하는 의사”라는 홍보카피만 놓고 보면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이야기인 게 사실입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꿈’에 관한 이야기는 대체로 어렵고 골치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훅 끌린 이유는 오로지 하나, 작가가 저의 ‘무조건 필독 작가’ 중 한 명인 치넨 미키토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모호하고 난해한 이야기겠지만, 치넨 미키토라면 ‘꿈 이야기’조차 매력적으로 풀어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몽환의 아이’는 섞이기 힘든 여러 장르가 혼재된 작품입니다. 메디컬 미스터리, 연쇄살인 스릴러, 범죄피해자의 트라우마가 메인 장르지만 거기에다 판타지 서사, 특히 이세계(異世界)와 주술(呪術)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신비하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끼어들면서 독자로 하여금 놀라움과 혼선을 거듭 경험하게 만듭니다. 

현실 속 시키나 아이는 최악의 트라우마를 남긴 23년 전의 무차별 살인사건과 현재 진행 중인 연쇄살인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채 혼란에 빠지지만, 희귀질환 이레스에 걸린 네 명의 환자의 꿈속에 진입한 후엔 그들의 영혼이 만들어낸 ‘몽환의 세계’ 속에서 갖가지 비현실적인 위기 상황에 부딪히면서도 그들의 기억과 상처와 고통을 살피며 미스터리를 해결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키나 아이의 ‘현실’과 ‘비현실’은 비극적인 접점을 갖게 되는데, 독자는 놀라움과 혼선을 느끼면서도 이 방대한 이야기들을 한줄기로 엮어낸 치넨 미키토의 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현실과 비현실 속 사건들은 복잡하고 많은데다 과거와 현재가 쉴 새 없이 교차되다 보니 쉽고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또한 환자들의 꿈속 ‘몽환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판타지의 룰(Rule)도 설렁설렁 읽어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꽤 집중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키나 아이가 양쪽 진영을 오가며 갖은 위험 속에서도 비밀과 진실을 캐내고 환자의 영혼을 치유하는 이야기,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시키나 아이와 환자들의 비극이 실은 밀접하게 연관돼있음이 밝혀지는 과정, 그리고 막판 대반전과 함께 시키나 아이에게 찾아온 가혹한 운명과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다다르는 애틋한 엔딩 등 치넨 미키토가 직조한 거대하고 정교한 서사는 두 권에 걸쳐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순식간에 읽어내게 할 정도로 재미와 여운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꿈이 얽힌 판타지 서사 때문에, 또 이세계와 주술이 가미된 비현실적인 설정 때문에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치넨 미키토에게 한 번이라도 반했던 독자라면, 또 지금껏 맛보지 못한 독특한 미스터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직은 인터넷서점이나 블로그에 많은 서평이 올라오진 않았지만 다른 분들의 의견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중요한 정보라든가 위화감이 드는 대목들을 꼼꼼히 메모하면서 읽는다면 이 작품의 묘미를 좀더 진하게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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