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정원
아야세 마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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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세 마루는 2021년에 한국에 출간된 단편집 ‘치자나무’로 처음 만난 작가입니다. 저의 非미스터리 최애작 목록에 들어있는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의 구보 미스미와 ‘화소도중’의 미야기 아야코와 마찬가지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 수상작가라 일단 관심이 갔었고,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살펴보니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눈길이 끌렸습니다. ‘치자나무’ 서평의 일부를 소개하면...


“모티브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 속 일곱 개의 ‘사랑’은 (대부분) 너무나도 기괴한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탓에 마치 외계나 이계의 생명체에게 어울리는 낯선 감정처럼 와 닿습니다. 그로테스크. 아마, 이 작품을 단어 하나로 설명해달라고 하면, 더없이 진부하고 게으른 답이지만, 이보다 더 적확한 답은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감각의 정원’은 2010년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 수상작인 ‘꽃에 눈이 멀다’(花に眩む)를 포함하여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입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치자나무’와 거의 비슷해서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애틋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몸의 어딘가에 틈새를 지니고 있으며, 과거의 기억을 담은 유리구슬을 그 안에 담고 살아간다는 설정(‘마이, 마이마이’), 사랑하는 마음이 발동하면 몸 안에 돌이 생기는데 그 마음이 폭주하면 돌이 몸을 집어삼킬 수도 있다는 이야기(‘떨리다’), 인간은 태어난 곳과 환경에 따라 제각기 다른 꽃을 피부에서 피워내는데 그 꽃의 뿌리가 심장에 닿으면 죽음과 함께 흙으로 돌아간다는 설정(‘꽃에 눈이 멀다’) 등 수록작 대부분은 ‘치자나무’ 못잖게 기괴한 판타지와 탐미적인 서사를 품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하는 사랑도 있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마음을 정리하는 안쓰러운 사랑도 있습니다. 평범한 설정과 서사라면 그리 기억에 남을 일이 없는 사랑 이야기들이지만, 아야세 마루 특유의 상상력과 문장 덕분에 매 수록작마다 마지막 한 줄을 읽고 나면 몸과 마음을 살짝 떨리게 만드는 여운을 느끼게 됩니다.

첫 두 수록작 ‘매끈하게 움푹한 곳’과 ‘230밀리미터의 축복’의 경우 판타지적 설정이라곤 전혀 없는 비교적 평범한 사랑 이야기지만, 다 읽고 곱씹어보면 미묘한 분위기 속에 서늘함과 애틋함이 공존하는 이야기란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치자나무’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강하게 갈릴 수 있습니다. 애초 비현실적인 기괴함에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면 “무슨 이런 설정이 다 있어?”라며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관음증에 가까운 호기심으로 그로테스크한 사랑 이야기를 엿보고 싶은 독자라면 그 어느 작가에게서도 맛보기 힘든 특별한 흥분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두 수록작만 읽으면 “평범한 사랑 이야기네.”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일종의 애피타이저에 가까운 그 작품들을 지나면 진짜배기 아야세 마루의 이야기가 펼쳐지니 미리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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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기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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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이 료의 ‘정욕’(正欲, 한국 출간 2024년)은 ‘과연 욕망에도 바른 것이 있고 바르지 않은 것이 있는가?’라는 묵직하고도 정답 없는 주제를 다룬 파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생식에 관한 기록이라는 뜻을 지닌 ‘생식기’(生殖記)는 좀더 직설적인 서사를 통해 ‘공동체를 떠받치는 정상성’에 대해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입니다. 동성애자인 다쓰야 쇼세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 이후 32살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정상성’에 대처하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정상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오만한지를 평생 쇼세이를 지켜봐온 ‘나’라는 화자를 통해 그립니다. 흔하진 않아도 다소 익숙해 보이는 주제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생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데 있습니다. 또한 생식의 기록(生殖記)이면서 동시에 생식기(生殖器)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린 쇼세이의 삶을 짓밟았던 건 “공동체의 균형, 유지, 확대, 발전, 성장에 공헌하려는 마음, 즉 공동체 감각”입니다. 그 감각은 쇼세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숨죽인 채 살아가라는 압박과 함께 이상하고, 더럽고, 악한 것이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부모에게 의존해야 했던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공동체의 일원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만이 가정과 학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취업 후,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된 시점부터 쇼세이의 생존법은 달라집니다. 정상성과 공동체와 자본주의가 한 패라는 걸 명확하게 깨달은 쇼세이는 은폐와 위장 대신 좀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꾸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반하는 사람들을 노리는 ‘감시카메라’를 교묘하게 회피할 방법을 하나둘씩 터득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마음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하고 판단, 결단, 선택, 선도를 담당하는 위치에 서지 않으며 그저 걷는 것. 손을 얹기는 하나 절대 힘을 주지 않는다.” (p77)


세상이 많이 바뀐 뒤로 이른바 ‘다양성’이니 ‘연대’니 하는 인식들이 확산됐지만, 그조차도 ‘공동체 감각의 거만한 아량’이라고 여기는 쇼세이는 조금도 자신의 생존법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회인으로 10년을 살아오는 동안 쇼세이의 세상은 평온하고 안정적이었지만, 같은 독신 기숙사에 사는 이성애자 커플의 고민, 이직을 선언한 후배의 놀라운 고백,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 속에 담긴 (조만간 실현될 게 확실한) 새로운 ‘생식법’을 접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나, 어릴 때 커서 성기 모양을 고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몸의 성장이 어느 정도 끝난 스무 살쯤일까? 내가 어떤 기질의 사람인지 알 때쯤 성기를 고르는 거야.” (p153)


‘태어나면서 부여된 생식기의 모양’에 대한 동료 여성의 고민은 쇼세이에게 낯선 화두를 던집니다. 이분법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던 쇼세이의 세계관을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새로운 생식법’이 몰고 올 혁명에 가까운 변화 역시 쇼세이에게 큰 충격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중반쯤부터 아사이 료의 진짜 작의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기존의 생존법과는 조금은 다른 길을 모색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쇼세이의 변화가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물론 아사이 료는 마지막까지 “이것이 내 주장이자 정답이다.”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정욕’과 마찬가지로 “세상엔 이런 면도 있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라는 어려운 질문을 남긴 채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정욕’과 ‘생식기’ 모두 편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어쩌면 저 자체가 ‘공동체 감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거만한 아량’을 베푸는 위선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식기’를 찾아 읽은 건 ‘정욕’과 마찬가지로 불편하긴 해도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길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충분히 충족되긴 했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사이 료가 또다시 비슷한 주제를 들고 나온다면 그때는 좀 고민이 될 것 같은 게 사실입니다. 우선은 서점대상 1위에 오른 ‘인 더 메가 처치’를 읽으면서 ‘생식기’의 여운과 후유증을 좀 달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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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유어 달링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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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28년이 된 웬디는 어느 날 저녁, 남편 톰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과도한 음주와 지독한 우울증도 문제였지만, 31년 전에 함께 저질렀던 살인에 대한 죄책감을 지우지 못한 톰이 추리소설을 쓰는 중이라며 그 안에 살인사건이 등장한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 살인사건은 영원히 비밀로 묻어두기로 했던 두 사람의 죄를 모티브로 삼고 있었고, 만약 소설이 공개된다면 파멸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점점 무너져가는 톰을 지켜보며 웬디는 그를 죽이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와의 마지막 여행을 준비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 ‘Kill your darlings’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 궁금했는데, 서평을 쓰기 전에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읽어보니 “가장 사랑하는 문장을 지워야 좋은 글이 된다.”라는 뜻의, 글 쓰는 이들을 위한 유명한 문학 격언이었습니다. 이 격언을 비틀어 이 작품을 한 줄로 요약하면 “가장 사랑하는 톰을 죽여야 웬디의 삶이 완벽해진다.”가 됩니다. 

“처음 남편을 죽이려고 했던 건 디너파티가 열린 밤이었다.”라는 웬디의 고백으로 시작된 첫 챕터가 2023년 두 사람의 마지막 여행을 그리고, 이어지는 챕터에선 5년 전인 2018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후 톰과 웬디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던 1992년을 거쳐 14살이던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운 1982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주 오래 전,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설경구의 명대사와 함께 영화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이 암전된 뒤 몹시 울컥해지며 영화의 첫 장면을 허겁지겁 되새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경험을 했을 텐데, 만일 ‘박하사탕’이 시간의 순서대로 구성됐더라면 그 감흥은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 역순 스릴러’인 ‘킬 유어 달링’ 역시 똑같은 느낌을 선사했는데,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모든 것이 서투르고 풋풋하지만 그래서 순수함 덩어리 그 자체였던 1982년 14살의 톰과 웬디의 첫 키스 장면을 읽는 순간 2023년, 남편 톰을 죽이기로 결심한 50대 중반의 웬디와 그저 무기력하게 무너져가고 있던 톰의 모습이 떠오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함에 사로잡혔습니다. 곧바로 앞으로 돌아가 첫 번째 챕터를 다시 읽었는데, 그제야 이 작품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중반부쯤 중도포기를 고민했던 게 사실입니다. 사건 위주의 스릴러가 아니라 지독한 심리 서스펜스물이라는 건 첫 챕터에서 진작 눈치 챘지만, 지루할 정도로 집요한 심리묘사와 (두 사람의 과거의 죄와는 무관한) 느슨한 에피소드들이 반복되면서 “계속 읽어야 되나?”라고 고민했던 겁니다. 그러다가 31년 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이 공개되면서 다시 집중할 수 있었고, 다행히도 이 작품의 미덕이 응축된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중반부의 지루함 때문에 별 4개에 그치고 말았지만, 한때 중도포기 또는 잘 해야 별 3개라고 실망했던 걸 감안하면 그만큼 마지막 장의 충격과 여운이 대단했다는 뜻입니다.


냉소적이고 현실적이며 이성주의자인 웬디와 예민한 낭만주의자에 매사 감정적이고 여린 톰은 애초부터 ‘영원한 비밀을 약속한 살인 공범’이 되기엔 부적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웬디가 지난 31년 동안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살아왔다면, 톰은 웬디와 결혼한 지 얼마 뒤부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은 자의 딜레마’에 빠진 채 조금씩 무너져왔습니다. 과도한 음주와 지독한 우울증, 그리고 노화에 따른 육체적 쇠락까지 겹치면서 톰은 소설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려 했던 건데, 그건 남은 삶을 망가뜨릴 생각이 조금도 없는 웬디에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고, 가장 사랑하는 문장을 지워서라도 좋은 글을 얻어내겠다는 냉정한 결단을 내리게 만듭니다.


이야기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소소하긴 해도 몇 가지 반전이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톰과 웬디가 저지른 살인 외에도 뜻밖의 살인이 등장하기도 하고, 초반에 등장한 인물 가운데 그 정체가 막판에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설정들 덕분에 흐트러졌던 집중력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중반부의 지루함이 이 작품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자 동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지루함’인 것도 사실입니다. 부디 이 지루함을 잘 넘겨서 ‘킬 유어 달링’의 진가를 꼭 맛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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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되살아난다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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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타마현 가미시마초에서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이 발견됩니다. 사방으로 흩어진 살점과 뼈 때문에 12년차 베테랑인 현경 수사1과 마키하타 게이스케마저 얼어붙게 만든 그 시신의 주인은 인근의 독일 제약회사 스턴버그의 연구원인 기류 다카시.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 그가 폭력성을 급상승시키는 신종 마약 ‘히트’를 청소년들에게 판매했으며, 그 배후에 독일 제약회사 스턴버그의 추악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는 의심이 제기되자 경찰청까지 비공식적으로 수사에 가담하게 됩니다. 한편 살해된 기류의 연인인 마리무라 미사토가 수시로 사건 현장에 나타나자 마키히타는 그녀가 사건의 진상은 물론 기류에 대해 뭔가를 감추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올해 초 이 작품이 출간됐을 때 “반전의 제왕! 나카야마 시치리의 최초의 소설!”이라는 띠지의 문구에 눈길이 사로잡혔던 기억이 분명하지만, (가을이 돼서야 읽게 되긴 했어도) 정작 읽는 동안엔 그 문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탓에 읽는 내내 ‘나카야마 시치리가 좀 변했네.’라는, 오해 아닌 오해를 하게 됐는데, 대부분의 인물이 다소 거칠고 날것 같은 캐릭터였고(그중 일부에겐 굉장히 고급스럽고(?) 심오한 과거사 또는 트라우마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사건보다는 인물의 심리에 좀더 치중하는 낯선 서사가 눈에 띄기도 했으며, 결정적으론 ‘범인’이 드러난 이후 100여 페이지에 걸쳐 공포물과 액션물이 혼재된 긴 클라이맥스가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 전까지 나카야마 시치리의 장르물 29편을 읽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무척 의아했다가 서평을 쓰기 위해 인터넷서점에 들어가 본 뒤에야 ‘문제의 띠지’를 다시 발견했고, 저의 무딘 기억력 때문에 오해 아닌 오해를 한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행위라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시신의 상태, 주위에서 늘 밝고 건강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던 기류가 신종 마약을 판매했다는 놀라운 사실, 그 배후에 1차 대전 때부터 부도덕한 연구와 상술을 자행해온 독일 제약회사의 수상쩍은 정체, 그리고 기류의 죽음 이후 인근에서 연이어 발생한 유아와 동물의 유괴 등 도무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정보들 때문에 마키하타를 비롯한 사이타마현경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거기다가 12년차 베테랑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유족 또는 피해자 지인들과의 접촉을 어려워하는 마키하타는 중요한 정보를 가진 게 분명한 기류의 연인 미사토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며 수사를 이끌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와중에 경찰청에서 비공식적으로 파견된 마약전문 수사관 구조 고헤이가 자신과는 정반대의 수사 방식을 내세우며 폭주하듯 불법수사까지 강행하자 마키하타의 곤란함은 극에 달합니다. 


단서를 찾고 추리를 통해 진범의 정체에 이르는 전형적인 미스터리와 달리 ‘마녀는 되살아난다’는 캐릭터 위주의 심리 미스터리에 더 가까운 작품입니다. 특히 살해된 기류의 불행했던 유년기라든가, 아직도 악몽을 꾸게 만드는 한 피해자 가족의 “비겁한 인간!”이란 한마디에 사로잡혀 있는 마키하타의 트라우마, 그리고 마약수사에 관한 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로 폭주하는 경찰청 수사관 구조 고헤이의 비극적인 가족사 등 주요 인물들의 과거사와 심리가 사건보다 훨씬 더 높은 비중으로 그려집니다. 그 덕분에 독자는 ‘누가, 왜 기류를 그토록 참혹하게 죽였는가?’라는 미스터리보다는 ‘그들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빠른 속도와 거침없는 반전으로 유명한 나카야마 시치리의 전형적인 스타일과 전혀 다른 결로 전개되던 이야기는 마지막 100여 페이지를 남기고 그야말로 장르를 갈아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소름 돋는 공포가 지배하는 액션물로 변신합니다.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주인공 마키하타가 과연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가늠조차 안 되는 극한의 상황들이 연이어 벌어지는데, 이 대목에서 독자는 ‘애초 나카야마 시치리가 이런 취향을 좋아했나?’라는 의문과 함께 각별한 호기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서평 제목에 ‘히트 1’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2012년 이 작품의 후속작인 ‘히트업’이 출간됐기 때문인데, 살해된 기류가 청소년들에게 판매했던 신종 마약 ‘히트’를 소재로 좀더 큰 사이즈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조만간 출간될 것으로 보이는데, 다시 한 번 나카야마 시치리의 ‘초기 취향’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아 무척 기대가 됩니다. 물론 그의 ‘빠른 속도와 거침없는 반전’에 익숙해진 나머지 이 작품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독자도 많겠지만(저 역시 그런 점 때문에 별 1개를 뺐습니다만), 일단 이 작품을 읽었다면 후속작을 쉽게 외면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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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
가지 다쓰오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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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 건축학과 교수인 나카조 도모이치는 임종 직전의 어머니로부터 “네 동생은 살해당한 거야.”라는 말을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동생 슈지는 23년 전인 1945년, 전쟁의 화를 피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을 시골로 대피시켰던 학동소개(學童疏開) 당시 외딴 산골마을 야마쿠라의 용신연못에서 익사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나눈 시간도 거의 없었던 동생이지만 도모이치는 슈지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야마쿠라로 향합니다. 하지만 관련자들은 거의 다 죽었거나 기억을 못하거나 왠지 도모이치를 피할 뿐입니다. 그러던 중 슈지의 진실을 아는 듯 했던 한 인물이 용신연못에서 사체로 발견되자 경찰은 도모이치를 의심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살짝 편집해서 정리하면 “1979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현란한 트릭, 완벽한 복선 회수, 논리적 완결성, 밀도 높은 전개와 더불어 전후의 상실감, 가족을 둘러싼 죄의식, 인간 심연의 어두운 심리 등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복선의 신’이자 전설의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보통 출판사의 소개글은 약간 또는 그 이상의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지만, 다 읽은 뒤에 찾아본 이 작품의 소개글은 액면 그대로 믿어도 괜찮을 정도로 99%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에서 1945년 패전 전후를 배경으로 한 일본의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저 같은 독자라면 푹 빠질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데,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인물들과 그들의 복잡다단한 서사, 당시 시대상과 풍습에 대한 친절하고도 풍부한 설명, 희로애락에서부터 지독한 살의에 이르기까지의 소름끼치도록 날것에 가까운 감정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버무려 완성시킨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라는 고전 미스터리의 미덕과 매력이 그것입니다.


야마쿠라에 도착한 도모이치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의사, 23년 전의 일을 세세히 기억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선 입을 다무는 간호사, 슈지가 익사한 현장에 있었지만 도모이치의 접근 자체를 막는 노인, 외지인인 도모이치를 경계하는 듯한 경찰, 그리고 야마쿠라의 명문가였지만 지금은 사람도 저택도 모두 사라져버린 다에미家에 관한 갖가지 소문 등 도모이치는 크고 작은 정보들을 손에 넣긴 하지만, 슈지가 살해당했다는 확신을 품진 못합니다. 그러던 중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린 도모이치를 돕는 건 10년째 여사친인 추리소설 마니아 미오입니다. 미오는 기상천외한 추리로 도모이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물론 도모이치가 야마쿠라에 온 일도, 그가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린 일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등장인물도 꽤 많고, 메인 사건 외에 교수인 도모이치가 연구 중인 일련의 실험도 심상치 않아 보이고, 23년에 걸쳐 풍화된 기억들은 서로 엇갈리거나 그저 모호하기만 해서 독자는 작가가 여기저기 흩뿌려놓는 단서들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될 건지, 그래서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좀처럼 쉽게 예상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 단서들이라는 것이 다 읽고 돌이켜보면 크고 선명한 것도 있지만, 대수롭지 않아 보였던 단어 하나 또는 흔한 풍경 묘사나 인물의 표정인 경우도 있어서 이 작품이 왜 ‘복선의 신’으로 불리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슈지의 죽음의 진상이 드러나는 대반전에선 앞서 읽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한 지점으로 집결되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일본에서 거의 40년 만에 ‘가지 다쓰오 복간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그 첫 작품이 ‘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라고 합니다. 작가 소개글을 보면 제23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 ‘투명한 계절’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데, 머잖아 한국에도 꼭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전미와 본격의 매력이 잘 배합된 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가지 다쓰오의 대표작만큼은 꼭 읽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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