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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
가지 다쓰오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10월
평점 :
간토대학 건축학과 교수인 나카조 도모이치는 임종 직전의 어머니로부터 “네 동생은 살해당한 거야.”라는 말을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동생 슈지는 23년 전인 1945년, 전쟁의 화를 피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을 시골로 대피시켰던 학동소개(學童疏開) 당시 외딴 산골마을 야마쿠라의 용신연못에서 익사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나눈 시간도 거의 없었던 동생이지만 도모이치는 슈지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야마쿠라로 향합니다. 하지만 관련자들은 거의 다 죽었거나 기억을 못하거나 왠지 도모이치를 피할 뿐입니다. 그러던 중 슈지의 진실을 아는 듯 했던 한 인물이 용신연못에서 사체로 발견되자 경찰은 도모이치를 의심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살짝 편집해서 정리하면 “1979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현란한 트릭, 완벽한 복선 회수, 논리적 완결성, 밀도 높은 전개와 더불어 전후의 상실감, 가족을 둘러싼 죄의식, 인간 심연의 어두운 심리 등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복선의 신’이자 전설의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보통 출판사의 소개글은 약간 또는 그 이상의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지만, 다 읽은 뒤에 찾아본 이 작품의 소개글은 액면 그대로 믿어도 괜찮을 정도로 99%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에서 1945년 패전 전후를 배경으로 한 일본의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저 같은 독자라면 푹 빠질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데,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인물들과 그들의 복잡다단한 서사, 당시 시대상과 풍습에 대한 친절하고도 풍부한 설명, 희로애락에서부터 지독한 살의에 이르기까지의 소름끼치도록 날것에 가까운 감정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버무려 완성시킨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라는 고전 미스터리의 미덕과 매력이 그것입니다.
야마쿠라에 도착한 도모이치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의사, 23년 전의 일을 세세히 기억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선 입을 다무는 간호사, 슈지가 익사한 현장에 있었지만 도모이치의 접근 자체를 막는 노인, 외지인인 도모이치를 경계하는 듯한 경찰, 그리고 야마쿠라의 명문가였지만 지금은 사람도 저택도 모두 사라져버린 다에미家에 관한 갖가지 소문 등 도모이치는 크고 작은 정보들을 손에 넣긴 하지만, 슈지가 살해당했다는 확신을 품진 못합니다. 그러던 중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린 도모이치를 돕는 건 10년째 여사친인 추리소설 마니아 미오입니다. 미오는 기상천외한 추리로 도모이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물론 도모이치가 야마쿠라에 온 일도, 그가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린 일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등장인물도 꽤 많고, 메인 사건 외에 교수인 도모이치가 연구 중인 일련의 실험도 심상치 않아 보이고, 23년에 걸쳐 풍화된 기억들은 서로 엇갈리거나 그저 모호하기만 해서 독자는 작가가 여기저기 흩뿌려놓는 단서들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될 건지, 그래서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좀처럼 쉽게 예상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 단서들이라는 것이 다 읽고 돌이켜보면 크고 선명한 것도 있지만, 대수롭지 않아 보였던 단어 하나 또는 흔한 풍경 묘사나 인물의 표정인 경우도 있어서 이 작품이 왜 ‘복선의 신’으로 불리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슈지의 죽음의 진상이 드러나는 대반전에선 앞서 읽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한 지점으로 집결되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일본에서 거의 40년 만에 ‘가지 다쓰오 복간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그 첫 작품이 ‘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라고 합니다. 작가 소개글을 보면 제23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 ‘투명한 계절’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데, 머잖아 한국에도 꼭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전미와 본격의 매력이 잘 배합된 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가지 다쓰오의 대표작만큼은 꼭 읽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